레스큐 시스템43화
한가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물론, 그 한가롭다는 기분은 오직 수혁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다른 대원들에겐 여전히 피곤하고 지친 일상이었다.
훈련이 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3일도 채 채우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수혁의 체력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그리 큰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으니, 수혁이 지칠 일은 없었다.
그렇게 수혁에게는 휴식기라 불리기에 충분할 정도의 시간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지.’
아마도 오늘.
그 사건이 일어난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초짜에 불과하던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박상태마저 순직했던 그 사건.
수혁의 시선이 책상 위를 향했다.
지하철 노선도.
이 넓고 넓은 도시를 사방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지하철 노선이 수혁의 눈에 들어왔다.
총 여덟 개에 달하는 역 중에서 수혁이 집중한 곳은 하나였다.
바로 신일역.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수혁이 근무하는 신일서와 지근거리에 있는 지하철역이었다.
도시 내의 역 중에 가장 크고, 그만큼 유동인구도 가장 많았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오늘.
‘무너진다.’
얼핏 기억하기로는 부실공사 때문이었다.
다행히 역 바로 옆에 지어진 커다란 쇼핑센터는 무사했지만, 지하철 플랫폼은 그대로 매몰된다.
심지어 정차했던 지하철마저도 그 붕괴에 휩쓸린다.
그 결과 어마어마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구조는 총 15일 동안이나 이어졌지만, 희생자에 비해 생존자는 극히 적었다.
구조가 늦어졌기에 희생이 더욱 컸다.
수혁이 평소와 다르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자, 그 모습을 본 대원들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지금까지 그들이 겪어왔던 경험을 토대로 본다면, 수혁이 저런 분위기를 풍길 때마다 결코 좋은 일이 발생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 있냐?”
보다 못한 박상태가 수혁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수혁은 그의 기척을 이미 느끼고 있었음에도 흠칫- 놀랐다.
“……상태 형.”
“오냐, 말해라. 네 말이라면 오늘 운석이 떨어진다고 해도 믿을 테니까.”
박상태는 분위기를 좀 풀어보고자 농담을 해봤지만, 수혁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말하라니까?”
반복되는 박상태의 재촉에 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오늘 조심하시라고요.”
“왜? 나 오늘 좀 안 좋냐?”
박상태는 이번에도 농담을 해봤다.
“네. 안 좋으니까, 몸 좀 사리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할 수 있으면 병가를 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순간 박상태는 수혁이 농담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말하는 수혁의 표정은 절대로 농담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무섭게 또 왜 그러냐.”
“병가 내실 생각 없죠?”
“당연하지, 이 새끼야.”
머리를 툭- 치고 지나가는 박상태의 뒷모습을 보며 수혁이 피식- 웃었다.
“그럼 그냥 조심하기라도 하세요. 진짜 느낌 안 좋으니까.”
“오냐.”
박상태는 수혁을 향해 건성으로 손을 흔들어주고는 그대로 사무실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생각 같아선 억지로라도 오늘 쉬게 만들고 싶었다.
김강식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박상태 역시 위험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위험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박상태가 빠질 위인이 아니었다.
수혁의 말을 어느 정도 믿기는 하겠지만, 박상태는 자신이 위험하다고 해서 현장에서 도망갈 정도로 무책임한 소방관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번엔 내가 잘하는 수밖에.’
이전 생에서는 자신으로 인해 박상태가 순직했으니, 이번 생에서는 자신이 구하면 된다.
그 토사 붕괴 속에서 김강식도 구해내지 않았던가?
‘그리고…….’
사실 박상태에게 더 강하게 말하지 못한 이유는 또 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박상태는 구조 3팀의 팀장이자, 수혁을 제외하면 가장 베테랑인 구조대원이었다.
박상태 한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 인해, 구조가 가능한 사람들의 숫자가 달라진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구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박상태의 힘이 필요했다.
‘모두를 구해낼 순 없겠지.’
수혁이 백 명쯤 되면 모를까,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수혁의 능력이라면, 이전 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수혁은 최대한 많은 요구조자를 구하기 위해 다시 생각에 잠겼다.
희미해진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주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틈틈이 기억을 더듬는 것은 꽤나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얼마 동안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오늘은 좀 잠잠하네.”
몇 시간 전에 나갔던 승강기 구조 현장을 제외하면, 단 한 건의 출동도 없었다.
“좋긴 한데……. 좀 불안하기도 하네요.”
박정우가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헛소리하지 마라.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니까.”
그러자 김강식이 박정우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의 걱정이 괜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말이 씨가 되는 경우가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박정우는 김강식의 핀잔에 움찔- 하며 곧바로 사과했다.
실제로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사고가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만약 이 타이밍에 출동이 떨어진다면 눈칫밥 하루 이틀로는 끝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박정우가 수혁에게나 선배지, 구조 3팀 내에서는 아직 햇병아리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사과할 것까지는 없고. 네 말대로 잠잠하니 좋긴 하다.”
김강식은 좀이 쑤시는지 의자에 앉은 채로 이리저리 몸을 풀며 스트레칭을 했다.
“족구라도 한판 할까요?”
구조대원들의 일상은 대부분이 운동이다.
해야 할 서류작업이 없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운동에 쏟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운동 중 족구는 꽤나 인기가 많은 종목 중 하나였다.
“음……. 그럴까?”
족구라는 말에 대원들 모두가 눈을 반짝였다.
책상에 앉아서 멍때리고 있느니, 시원하게 몸이라도 풀고 오는 편이 나았다.
“사무실은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족구를 할 생각이 별로 없던 수혁이 말하자, 다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각자의 실력을 자랑할 생각에 신이 난 듯했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 하늘은 그들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화재 출동, 화재 출동.]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며 출동 명령을 하달했다.
“아씨, 진짜!”
“왜 매번 운동만 하려고 하면 출동인데!”
대원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뛰어가기 시작했고, 수혁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다.
‘왔다!’
수혁은 이 출동 명령이 단순한 화재로 인한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런 수혁의 예감은 적중했다.
“……다시 말해주십쇼.”
살짝 떨려오는 박상태의 음성.
무전기를 들고 상황실과 교신을 하던 박상태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대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신일역이 붕괴했습니다. 피해 규모와 요구조들은 파악하기 힘든 상태고, 붕괴로 인한 화재까지 발생해 현재 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주말 오후 5시.
신일역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인근에 있는 대학의 학생들, 아이와 함께 쇼핑센터에 들렀다 돌아가려는 부모들, 친구들과 놀러 나온 어린 학생들…….
역 앞에 있는 번화가와 대형 쇼핑센터 덕분에 신일역은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났다.
심지어 오늘은 주말이기까지 했으니, 사람이 적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지하철 플랫폼 내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짜증을 내고 있는 박수진도 그 많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벌써 30분이나 지났는데…….”
남자친구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지난 지는 한참 전이었다.
아무리 톡을 보내도 답장은 없었고, 아예 읽지도 않고 있었다.
“그냥 돌아갈까?”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느껴지고 있었다.
아무런 연락도 없는 남자친구를 이 벤치에 앉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느니, 집으로 가거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고 봐라, 진짜.”
하아- 하고 깊게 한숨을 내쉰 박수진은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지하철도 들어오고 있었다.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벤치에서 벌떡 일어난 박수진은 스크린 도어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멈칫- 했다.
“응? 방금 뭐지?”
박수진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잘못 느꼈나?”
분명 지진이 온 것처럼 땅이 출렁거리는 듯한 진동을 느낀 것 같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걸 보니 자신이 잘못 느낀 듯했다.
아니면, 지하철이 들어오는 것 때문에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타는 곳 안쪽으로…….]
“어?”
안내방송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박수진은 또 한 번 진동을 느꼈다.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 역시 그녀와 같은 것을 느꼈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너도 느꼈냐?”
“방금 지진이지?”
“내가 살면서 지진도 다 느껴보네.”
사람들은 대부분 심각하다기보단, 신기해하는 분위기였다.
대피하는 사람도 없었고, 어딘가로 신고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박수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왠지 불안한 감은 조금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태평한 모습에 별일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안이한 판단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쿠르르르릉-!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의 진동과 함께,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뭐, 뭐야!”
사람들은 그제야 뭔가 심상찮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정말로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천장에 달려 있던 조명이 깨지기 시작했고, 벽에 금이 갔다.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던 스크린 도어 역시 산산조각이 났으며, 멈춰 선 열차는 갑작스러운 진동에 문을 닫고 출발하려 했지만, 사람들이 문 사이에 끼어 움직이지 못했다.
“밖으로 나가!”
그런 와중 누군가의 외침이 기폭제가 되었다.
사람들이 출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질서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수많은 사람이 무너져 내리는 돌더미와 함께 뒤엉키고 있었다.
“아아악!”
“비켜! 비키라고!”
“X발, 앞에 빨리 움직여!”
아비규환(阿鼻叫喚).
남자가 여자를 밟고, 어른이 아이를 밟고, 부모는 그런 아이를 보호하다 넘어져 피투성이가 되었다.
“으아앙!”
엄마와 떨어진 아이의 울음소리가 비명들을 뚫고 울려 퍼졌다.
박수진은 계단을 향해 달려가다 그 울음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몸이 덜덜 떨려오고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아이의 울음소리를 못 들은 척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디지?’
자리에 멈춰 선 박수진은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발견한 아이 한 명.
생각보다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넘어졌었는지, 아이는 턱이 까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박수진은 곧장 그 아이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변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