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78화
6일째.
벌써 예정된 촬영일이 거의 끝나간다.
그동안 제작진들은 계속해서 미션을 던져 주었다.
불 피우기.
물고기 잡기.
야자 열매 따기 등등.
평생을 도시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미션들이었다.
그리고 그 미션의 대부분은 수혁의 팀이 승리했다.
솔직히 말해서 수혁의 신체 능력이라면, 그런 미션 정도를 완수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덕분에 수혁의 팀은 날이 갈수록 풍요로워졌다.
미션에 걸린 상품도 상품이었지만, 수혁이 계속해서 움직이며 뭔가를 한 덕분이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또 뭘 그렇게 만드세요?”
잠에서 깬 시애가 눈을 반짝이며 수혁에게로 다가왔다.
“배를 한번 만들어볼까 해서.”
“배, 배요?”
시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수혁은 피식- 웃었다.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카누 같은 거야.”
수혁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해왔는지도 모를 커다란 통나무의 가운데를 파내고 있었다.
“그냥 심심해서 만들어보는 건데, 잘될지는 모르겠네.”
시애는 이제 그냥 그러려니 했다.
지난 6일 동안 수혁은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뭔가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돌을 깨트려 도끼나 칼 같은 것을 만들어내더니, 나중에는 그걸 이용해서 식탁이나 의자 같은 것을 뚝딱뚝딱 잘도 만들었다.
제작진들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결과였다.
그들은 출연자들이 고생하고, 서로 갈등과 협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계획했었다.
덤으로 팀을 두 개로 나누어 경쟁 구도를 통해 긴장감도 줄 생각이었고.
그런데 수혁이라는 한 사람 덕분에 모든 것이 틀어져 버렸다.
고생은커녕, 이쯤 되면 아늑한 휴양지에 놀러 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다른 한 팀은 제작진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제작진은 이 그림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수혁이라는 인간이 보여주는 경이로움은 충분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어머, 또 뭐 하세요?”
이번엔 안나경이 둘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처음에는 대화도 잘 나누지 않고 도도한 분위기를 풍겼었는데, 지금은 꽤 친근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카누 만드신대요!”
수혁 대신 시애가 신나서 대답을 해주었다.
“카누?”
안나경 역시 깜짝 놀랐다.
그러곤 호기심 서린 눈빛으로 수혁이 만들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런 거 예전에 본 적 있어.”
TV에서였는지, 영화에서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수혁이 하는 것처럼 통나무 가운데를 파내서 배를 만드는 장면이었다.
“몇 인용이에요?”
“2인용이요. 시애랑 둘이 타시라고.”
수혁의 말에 시애와 안나경은 동시에 환하게 웃었다.
수혁 덕분에 딱히 할 일도 없어 심심했던 차에, 이런 즐길 거리가 생겼으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도 괜찮네.’
남들에게 인정을 받는 기분.
이전 생에서는 그리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도 받고, 유명세도 타고 있었다.
솔직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어젯밤 카메라를 설치하고 베이스캠프로 돌아갔던 제작진들이 이제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장비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수혁이 만드는 카누에 관심을 보였다.
“이러다 비행기도 만드시겠어요.”
유예림은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으로 감탄했다.
“오늘 미션은 뭡니까?”
수혁은 제작진들의 그런 표정을 너무 자주 봐서인지, 별다른 감흥 없이 물었다.
“아, 일단 다 모여주시겠어요?”
유예림은 출연자들을 한자리에 모이도록 했다.
그러자 시애는 아직 잠을 자고 있는 하성우를 깨워 데리고 나왔다.
“벌써 내일이 촬영 마지막 날이네요.”
네 명이 모두 모이자 유예림이 웃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쉬웠어요.”
“다 수혁 씨 덕분이죠.”
“놀러 온 것 같았다니까.”
수혁을 제외한 셋은 유예림의 말에 참새처럼 짹짹거렸다.
“김수혁 씨가 대단한 건 저희 제작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말한 유예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폭포가 흐르는 물웅덩이와 한눈에 봐도 튼튼해 보이는 통나무집.
흙을 개서 만든 아궁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식탁과 의자.
근처 커다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그네까지.
도저히 정글 서바이벌을 하러 온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배는 사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유예림의 말에 출연자들의 얼굴에 실망과 의문이 떠올랐다.
“왜, 왜요?”
잔뜩 기대하고 있던 시애가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그건 오늘의 미션과 연관이 있습니다.”
유예림도 출연자들이 저 카누를 타는 모습을 담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미션 수행을 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최종 미션은 바로…….”
유예림이 종이를 펼쳤다.
[정글에서 탈출하라.]
“아…….”
“탈출? 우리끼리?”
생각지도 못한 미션에 출연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탈출 방법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출발 시간 역시 자유입니다만, 도착 시간은 오늘 저녁 7시까지입니다. 그보다 늦으면 먼저 도착했다 하더라도 패배 처리하겠습니다.”
출연자들을 한 번 둘러본 유예림은 지도 한 장을 꺼내 수혁에게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목적지까지 도착하셔야 합니다.”
수혁이 지도를 살펴보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줬던 지도와는 사뭇 달랐다.
예전의 지도가 낙서나 다름없었다면, 이번에는 꽤나 상세하게 만들어진 지도였다.
“먼저 도착한 팀에게는 화려한 저녁 식사와 호텔 스위트룸, 그리고 비즈니스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품이 무엇인지 밝혀지자, 팀원들의 얼굴이 크게 밝아졌다.
아무리 수혁 덕에 편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7일간 오지에서 생활하느라 피로가 꽤 쌓여 있었다.
그런데 스위트룸과 비즈니스석이라니?
의욕이 활활- 타오를 만했다.
“반대로 패배한 팀은 조촐한 저녁 식사와 게스트 하우스, 그리고 이코노미석이 기다리고 있죠.”
“미션은 언제부터죠? 지금부터 출발하면 되나요?”
안나경은 당장에라도 출발할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준비가 되는 대로 떠나시면 됩니다.”
“서둘러요!”
안나경의 다급한 외침에 시애와 하성우가 덩달아 바빠졌다.
‘어디 보자…….’
수혁은 급하게 움직이는 대신, 일단은 지도를 살폈다.
목적지를 확인하고 ‘미니 맵’을 활성화시키자, 푸른 선이 나타나며 최단 거리를 알려주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은데?’
푸른 선은 위험하거나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을 피해, 안전하면서도 빠른 길을 표시한다.
덕분에 일직선으로 쭉 이어지진 않았지만, 이 정도면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았다.
‘두 시간? 세 시간?’
그쯤이면 충분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수혁은 잠깐 멈칫- 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예상 시간을 정정했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 걸리겠지.’
두세 시간은 수혁을 기준으로 측정한 것이었다.
체력이 약한 시애나 안나경을 생각하면 그보단 오래 걸릴 것이다.
‘중간중간 휴식 시간을 포함하면…….’
최소한 두 배 이상은 걸릴 듯했다.
“다섯 시간 정도로 생각하면 되려나.”
“다섯 시간이요? 그거밖에 안 걸린다고요?”
수혁의 혼잣말을 들은 유예림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예? 아, 예. 그 정도 걸리지 않을까 예상해 봤습니다.”
유예림은 수혁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제작진들은 이미 이곳의 사전답사를 한 상태였다.
이번 탈출 미션 역시 먼저 시험해 본 상태였고.
그때는 길을 정확히 알고 찾아갔음에도, 다섯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길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로, 체력이 약한 여자 두 명까지 있는데 다섯 시간?
유예림은 수혁이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 여겼다.
물론, 수혁은 대단했다.
체력도 도저히 사람 같지가 않았고, 생존능력 또한 탁월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만 국한된 것일 뿐,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그녀가 생각하기엔, 절대로 다섯 시간 안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예림은 그런 자신의 생각을 감추고,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한번 기대해 볼게요.”
과연 도착한 후 수혁의 표정이 어떨지 기대가 되었다.
“수혁 오빠! 빨리 서둘러요!”
뒤쪽에서 시애가 호들갑을 떨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도 이만 준비하러.”
“빨리요!”
길은 제법 험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라고 해서, 그냥 콘셉트인 줄 알았는데 진짜인 모양이었다.
“조, 조금만 쉬었다 가도 돼요?”
푹푹- 찌는 더위와 편하지 않은 길에 지친 시애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잠시 시간을 체크한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갈게요.”
마침 제법 쉴 만한 공간에 도착했기에 수혁은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아이고, 힘들어라아.”
“얼마나 남았어요?”
시애는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아 앓는 소리를 냈고, 안나경은 지친 표정으로 수혁에게 물었다.
“한 절반 정도 온 것 같습니다.”
“아, 아직도요?”
시애는 사형선고라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이 정도면 많이 온 거지, 뭐. 예원 팀은 우리 절반도 못 왔을걸?”
이대로 있으면 분위기가 처질 것 같다는 생각에 하성우가 나섰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다.”
시애가 웃으며 대꾸했다.
수혁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물통을 꺼내 들었다.
원래는 직접 만들어 쓰려고 했는데, 다행히 이 정도는 제작진에서 지원해 주었다.
“물 좀 드시죠?”
수혁이 자신의 담당 VJ에게 물통을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카메라와 여러 가지 장비를 가지고 그들을 따라오는 제작진들은, 출연자들보다 훨씬 체력 소모가 심했다.
이렇게 틈틈이 물을 마셔두지 않으면 금방 탈수 증세가 올 정도로 말이다.
“힘드시죠?”
수혁이 묻자 VJ는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김수혁 씨는 별로 힘들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가 보기에 수혁은 동네 마실 나온 사람 같았다.
이마에 약간 땀방울이 맺히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거의 흘리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저야 뭐, 체력에는 자신이 있으니까요.”
수혁 혼자였다면 벌써 목적지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속도를 맞춰 느리게 걷는 바람에, 수혁은 정말로 산책하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혁은 VJ에게서 물통을 건네받으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날씨가 좀 안 좋네요.”
아직 오후 1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은 어두컴컴하니, 마치 저녁 시간은 다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 비가 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VJ 역시 하늘을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비가 오면 어떻게 됩니까?”
강수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많이 온다면?
이런 정글 속에서 비가 퍼붓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상황을 봐야 알겠지만, 너무 많이 내리면 일단 촬영을 접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겁니다.”
“그럼 비가 그칠 때까지 정글 속에서 몸을 피해야겠네요.”
빗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
수혁은 왠지 좋지 않은 예감에 목적지보단 비를 피하는 곳을 찾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