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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큐 시스템-104화 (104/425)

레스큐 시스템 104화.

진태용은 수혁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 기억 못 하시나 봐요? 전에 대회에서 한 번 뵀는데.”

“어,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아주 낯선 얼굴은 아니었다.

“하긴, 그땐 그냥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만 봤었으니까. 기억 못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신경쓰지 마세요.”

수혁이 죄송스런 표정을 하자, 진태용은 고개를 저었다.

진태용이 수혁을 본 것은 당연히 전국 대회에서였다.

그때도 수혁은 꽤 유명 인사였다.

신일역 붕괴 사고의 주역 중 한 명이었으니까.

기적과도 같은 일에 언론에서도 꽤 다루었기 때문에, 당시 대회에 참가한 소방관 대부분이 수혁을 알고 있었다.

설령 몰랐다 하더라도, 그날 수혁이 세운 기록을 봤다면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저놈한테 뭐라고 한 겁니까? 하는 행동을 보면 저렇게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냥 주최 측에 알리겠다고 협박을 좀 했어요. 경기에 참가하려고 이 먼 해외까지 왔는데, 실격처리가 될 수는 없으니 물러선 거죠.”

수혁이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런 생각 자체를 해보질 못한 것이다.

“하여간 저런 몰상식한 놈들이 꼭 한 명씩은 있어요.”

“이런 경험이 많으신가 봐요?”

“많은 건 아니고… 이 대회에 세 번 정도 참가를 했었거든요. 그때는 한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열렸지만. 그때 몇 놈이 저런 식으로 행동하더라고요.”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소방관들은, 수혁에게 시비를 건 남자를 불편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만 봐도 모든 사람이 저렇게 무개념은 아니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냥 무시가 답입니다.”

진태용은 저런 놈들과 시비가 붙어봐야 좋을 게 하나 없다며, 그냥 무시로 일관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수혁은 그런 진태용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마저 준비하기 시작했다.

직접 챙겨온 자신의 방화복과 헬멧을 착용하자, 진태용의 눈에 살짝 동정심이 서렸다.

“장비가…….”

“조, 좀 낡았죠? 하하.”

보급을 받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것들임에도, 수혁의 방화복과 헬멧은 몇 년은 현장에서 구른 것처럼 엉망이었다.

“나름대로 손질하긴 하는데, 워낙 상한 곳이 많아서 이 모양이네요.”

신일서의 평균 출동 횟수는, 전국 평균의 두 배 이상 많았다.

그리고 그중 대형 재난 출동은 세 배에 육박할 정도.

그러니 장비가 남아날 리가 없었다.

보급품 신청해 놓기는 했지만, 물량이 많지 않아 새로운 보급품을 받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하여간 이놈의 나라는…….”

진태용은 자신의 장비를 확인했다.

그의 장비도 낡긴 했지만, 수혁의 것보단 상태가 괜찮았다.

사비를 들여 장비를 직접 구매했기에 그나마 이 정도 상태였다.

“저도 슬슬 새로 사야 하나, 고민하고 있습니다.”

쪽팔리는 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장비가 이래서야, 제대로 된 구조작업을 하기가 힘들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요구조자와 자신 모두 위험에 빠질 수가 있는 것이다.

진태용은 수혁의 옆에 자리잡고 앉으며 이런저런 정보를 주기 시작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 보이죠?”

진태용이 가리킨 곳에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소방관이 있었다.

검은색의 방화복을 입고 있는 그는, 우람하진 않지만 꽤 균형 잡힌 몸매와 탄탄한 근육을 지니고 있었다.

“율리안 뮐러라는 사람입니다. 독일에서 온 친구고.”

수혁은 그게 뭐 어쨌냐는 듯 쳐다봤다.

그러자 진태용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난 대회 우승자예요. 그때 기록이 아마 수혁 씨랑 동률일걸요? 아마 이곳에서 수혁 씨와 더불어 가장 우승에 가까운 사람일 겁니다.”

그 말에 수혁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다시 쳐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일까?

눈을 감고 있던 율리안의 눈이 떠지며, 수혁을 향했다.

수혁은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그를 향해 고개를 한번 숙여주었다.

다행히 율리안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수혁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사람 성격 참 좋아 보이네요.”

율리안의 눈빛은 선해 보였다.

“그가 근무하는 함부르크에서는 엥엘이라고 불린다더군요.”

“그게 무슨 뜻인데요?”

“천사.”

“아…….”

괜히 수혁이 오그라드는 별명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율리안이라는 소방관에게 호감이 생겼다.

천사라고 불릴 정도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았다.

“저쪽에 있는 덩치는 러시아에서 온 안드레이. 지난 대회에서 율리안에게 밀려 아쉽게 2위를 차지했던 사람이죠.”

순간 유지환이 생각나는 외모였다.

우락부락한 근육과 험상궂은 얼굴.

소방관이 아니라 격투기 선수 같았다.

진태용은 그 외에도 요주의 해야 할 소방관들을 소개해 주었다.

“저놈은요?”

수혁이 시비를 걸었던 놈을 가리켰다.

“호주의 올리버였나? 그럴 겁니다. 세계 대회는 이번이 첫 출전인데, 듣자하니 꽤나 실력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인성은 쓰레기지만. 대체 왜 소방관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놈이랍니다.”

수혁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올리버를 살짝 노려보았다.

관상을 믿지는 않지만, 성격이 야비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진태용은 그 후로 몇 명을 더 가르쳐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경기 잘 치르세요.”

진태용은 수혁이 경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되돌아갔다.

그가 사라지자 수혁은 방화복을 점검하다, 멈칫- 했다.

이곳저곳이 타고 눌어붙은 방화복을 보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평소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수혁의 장비뿐만 아니라, 신일서의 모든 장비가 수혁의 것과 비슷하거나 더 심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보니까 알 수 있었다.

경기에 참가하는 외국인 소방관들.

자신의 것과 비교하면, 그들의 장비는 마치 새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소방관에 대한 대우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절실하게 실감났다.

그러니 쓴웃음이 날 수밖에…….

“모두 밖으로 나와주세요.”

수혁이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데, 대회 관계자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와 소리쳤다.

이제 슬슬 경기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수혁이 밖으로 나가자, 관계자는 참가자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번호표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수혁의 번호는 23번.

정확히 중간 순서였다.

번호를 받은 수혁은 자신과 함께 경기를 치를 24번이 누구인지 확인하다, 미소를 지었다.

바로 조금 전에 시비를 걸었던 올리버였다.

‘아주 하늘이 개박살을 내라고 기회를 주는구나.’

어차피 우승할 생각이었다.

최은송이 그걸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결심한 이상, 같이 경기를 치르는 올리버와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주리라 결심했다.

번호표를 받아 들고 주변을 둘러보던 올리버가, 수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수혁은 그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어주고는, 자신의 번호표를 들었다.

‘네 상대는 나다, 새끼야.’

그것을 본 올리버도 수혁과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너 따위가?’라는 표정이었다.

수혁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번호표를 한 번 흔들어준 뒤, 몸을 돌려 대기실로 돌아갔다.

경기가 기대되었다.

* * *

“누굴 그렇게 쳐다봐?”

율리안은 자신과 같이 독일에서 온 동료, 필립의 질문에 시선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저기 저 친구.”

필립은 율리안이 가리키는 쪽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수혁이 번호표를 들고 누군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동양인?”

율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친구가 왜? 무슨 시비라도 걸어? 내가 혼내줄까?”

주먹을 쥐어 손바닥을 팡팡- 치는 필립을 보며, 율리안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넌 그 호전적인 성격 좀 고치라니까.”

“아니, 난 누가 대장한테 시비 건 줄 알고 그런 거지. 그런데 저 친구한테 왜 관심을 갖는 거야?”

필립이 보기에 수혁은 딱히 관심을 가질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정확하진 않은데, 저 친구가 수혁이라는 사람일 거다.”

“……수혁?”

하지만 필립은 수혁이 누군지 잘 모르는 듯했다.

“푸켓의 영웅.”

“아! 그 한국인!”

필립이 그제야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 영웅에 대한 얘기는 들어봤지. 꽤 대단한 활약을 했었다고?”

“BBC에서 말 한대로라면, 꽤 정도가 아니지. 혼자서 백 명이 넘는 사람을 구조했으니까.”

“조금 과장된 거 아니야? 사람이 어떻게…….”

“글쎄.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율리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수혁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과장된 이야기라는 것에 10유로 건다.”

“그럼 난 그 반대에 10유로 걸지.”

“승패는 어떻게 정할래?”

“음…….”

잠시 생각하던 율리안이 입을 열었다.

“저 친구가 3위 안에 들면 내가 이기는 걸로.”

“좋아.”

필립이 웃으며 동의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가 각자의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닌 소방관들이다.

그 숫자는 약 50명.

그들 사이에서 3위 안에 들려면, 평범한 실력으론 절대 불가능했다.

그런데 저렇게 비실비실해 보이는 동양인이 3위 안에?

“넌 나한테 질 거야, 율리안.”

필립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

율리안 역시,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19번, 20번!”

율리안의 차례가 되었다.

상대는 놀랍게도 러시아의 안드레이였다.

지난 대회의 1, 2위가 맞붙게 된 것이다.

“이번엔 내가 꼭 이길 거다, 율리안.”

안드레이는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율리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율리안은 딱히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가 안드레이를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대체 뭐라는 건지…….’

그냥 러시아어를 알아듣지 못했을 뿐.

안드레이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율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지난번에는 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졌을 뿐이야. 이번에는 기필코 네 코를 납작하게…….”

“Ready!”

심판이 으르렁- 거리는 안드레이의 말을 끊고 준비 신호를 주었다.

“그만 주절거리고 준비나 해라.”

율리안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출발 준비했다.

그제야 안드레이도 정신을 집중하며 앞을 쳐다봤다.

“Go!”

탕-! 하는 출발 신호와 함께, 두 사람이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전까지 경기를 진행했던 이들과 비교해도 월등히 빠른 속도였다.

“와아아!”

관람하던 사람들이 흥분해서 환호성을 질렀다.

‘페이스는 괜찮아.’

율리안은 슬쩍 옆 라인을 쳐다보았다.

안드레이보다 약간 앞서 있는 상황.

이 정도 차이라면, 앞으로 조금 더 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잘하면 기록도 세울 수 있겠군.’

확실히 지난 대회보다 빨랐다.

세계 기록을 갱신하기엔 충분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긴 했지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미안하지만, 안드레이. 이번에도 내 승리다.’

율리안은 이번 대회의 우승도 자신이라고 확신했다.

어느새 그의 뇌리에는 수혁이란 존재가 사라져 있었다.

“4, 4분 55초!”

마지막 타이머를 누른 율리안의 총 기록은 놀랍게도 4분대였다.

세계 신기록을 무려 40초나 단축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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