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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큐 시스템-125화 (125/425)

레스큐 시스템 125화.

“속옷은 잘 챙겼어요?”

“챙겼어요.”

“핸드폰 충전기는? 지갑도 챙겼죠?”

“다 준비했으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최은송의 계속되는 질문에 수혁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권은?”

“!”

문을 나서던 수혁이 멈칫하더니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여권이 어디 있더라…….”

“어제 짐 쌀 때 어디다 뒀는지 기억 안 나요?”

최은송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수혁이 안방으로 달려갔다.

“여기다 두고 까먹었네.”

수혁이 머쓱한 표정으로 여권을 흔들며 나왔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또 빼먹은 건 없어요?”

“네, 이젠 정말 없어요.”

수혁의 대답에 최은송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출발해요.”

최은송이 문을 열고 캐리어를 끌며 밖으로 나가자, 수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오늘은 수혁이 독일로 연수를 가는 날이었다.

거의 9주 정도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최은송은 아쉬움을 느꼈지만, 그것을 내색하진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을 혼자 두고 해외로 나가는 수혁에게 복수하기라도 하듯, 쉴 새 없이 잔소리했다.

짐을 챙기는 것에서부터 해외에 나가서 주의해야 할 점까지.

거의 밤새도록 이어진 최은송의 성화에 수혁은 볼이 홀쭉해질 정도였다.

솔직히 좀 무서울 정도였지만, 사실 수혁은 그것마저도 좋았다.

평생을 합쳐도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 챙겨주는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최은송은 마치 수학여행을 가는 아들을 챙겨주는 엄마의 모습과도 같았다.

자신을 위해 걱정하며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는 그녀가 고마웠다.

“내가 들게요.”

재빨리 최은송의 곁으로 다가간 수혁이 그녀의 손에 있는 짐들을 뺏어 들었다.

최대한 짐을 줄이고 필요한 것들만 챙긴다고 했는데, 9주나 되는 기간이다 보니 짐이 많아졌다.

캐리어만 두 개였고, 그 외에 자잘한 것들이 들어 있는 가방도 두 개가 더 있었다.

“오늘은 수혁 씨 차를 타고 가볼까요?”

이렇게 짐이 많았으니, 최은송의 차보다는 수혁이 짐 머레이에게 선물받은 SUV를 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럴까요?”

수혁 역시 그편이 더 낫다고 판단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양반은 왜 연락이 없지?’

수혁에게 차를 선물하고 헤어진 짐 머레이는 조만간 연락을 준다더니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이제 자신은 독일로 떠난다.

그럼 연락을 받을 수도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운전은 누가?”

“내가 할게요.”

수혁이 선뜻 나서 운전석으로 향했다.

‘처음 타는 건가?’

차를 선물받은 게 한 달 전이다.

그 시간 동안 이 좋은 차를 주차장에서 썩혔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갈까요?”

수혁은 조수석에 앉은 최은송이 안전벨트를 착용한 것을 확인하곤 차를 출발시켰다.

역시 비싼 값을 하는 차였다.

부드럽게 앞으로 치고 나가는 속도감이 마음에 들었다.

SUV임에도 승차감 역시 웬만한 세단 못지않게 좋았다.

“차 좋네요.”

수혁이 웃으며 말하자 최은송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기분 좋게 도로를 달렸다.

“혼자 잘 지낼 수 있겠어요? 부모님 집에 들어가 있는 게 낫지 않아요?”

“괜찮아요. 여기가 우리집인데 어딜 또 가요.”

우리집이라는 말에 수혁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출퇴근하는 것도 서울이 나을 테고, 혼자서 집에 있는 것도 걱정되고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방범도 잘 되어 있고, 여차하면 내가 빡!”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에 수혁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 대 맞으면 아주 골로 가겠네.”

“그쵸?”

수혁이 맞장구를 쳐주자 최은송이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정말 싸우진 말고, 무슨 일 벌어지면 바로 도망쳐요.”

“내가 앤가 뭐…….”

최은송이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연락은 자주 할 거죠?”

“물론이죠.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보고할게요.”

“그건 너무 많고, 이틀에 한 번씩 해요.”

연수라고는 하지만, 수혁이 가는 곳은 독일의 소방학교다.

하루 종일 구조 교육을 받아야 할 텐데, 그 고된 일정을 소화한 후, 쉬어야 할 시간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몇 명이나 간다고 했었죠?”

“서른다섯 명인가? 아마 그랬을 거예요.”

“생각보다 많네. 숙소 같은 건 단체로 같이 자는 거예요? 군대처럼?”

군대라는 말에 수혁이 흠칫했다.

이전 생까지 합하면 제대한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군대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안 좋아졌다.

만약 입대 전의 시점으로 회귀를 했다면, 수혁은 그냥 자살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설마요. 그래도 독일인데. 많아야 두 명 정도 같이 쓰지 않을까요?”

“하긴, 수혁 씨 말이 맞겠네요. 독일인데.”

수혁은 제발 자신의 말이 맞길 바랐다.

수혁을 제외한 서른네 명이 모두 수혁보다 상급자다.

경찰에서 파생된 조직이었는지라, 그 분위기가 딱딱하고 군대와 비슷했다.

한마디로 수혁은 서른네 명의 고참을 둔 이등병이라는 뜻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괜히 오한마저 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교육받을 때 조심해요. 또 다치지 말고. 독일에서 다치면 문병도 못 가니까.”

“조심할게요.”

현장도 아니고, 소방 학교에서 훈련만 하는데 다칠 일은 없었다.

그래도 최은송을 안심시키기 위해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서로를 걱정하며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공항에 도착했다.

트렁크에서 짐을 꺼낸 수혁은 최은송을 한번 안아주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몸조심하고, 내 걱정도 하지 말고, 교육 잘 받고 와요.”

“알았어요. 연락 자주 할게요.”

수혁은 최은송의 볼에 뽀뽀를 한번 해주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럼 갈게요. 출근 조심히 하고.”

최은송은 마주 웃으며 수혁을 배웅하고는 차를 타고 떠났다.

멀어지는 차를 잠시 지켜보던 수혁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 큰 집에 혼자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혼자 있을 최은송을 생각하니 미안해졌다.

“김수혁?”

그때 누군가 수혁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혁이 돌아보자, 그곳에는 커다란 덩치의 남자 한 명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신일서 김수혁, 맞지?”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냐는 뜻이 담긴 눈빛에 남자는 크게 웃으며 다가왔다.

“지양호라고 한다.”

자신을 지양호라고 소개한 남자는 수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부터 9주 동안 같이할 사람이기도 하지.”

“아, 반갑습니다. 김수혁이라고 합니다.”

“알지, 유명한 몸이신데.”

지양호의 말투는 왠지 비꼬는 것 같았지만, 그 표정에는 정말로 순수한 호감만이 가득했다.

그 표정을 본 수혁 역시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 말은 놔도 되지? 내가 이래 봬도 나이가 좀 있으니까.”

“당연하죠.”

사실 얼굴만 봐도 나이가 많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박상태와 비슷하거나, 그보다도 많은 것 같았다.

둘은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집합 장소에 도착했지만, 둘이 가장 먼저 도착을 한 것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일찍 도착한 것 같네요.”

수혁은 최은송의 출근 때문에 일부러 조금 일찍 출발했다.

“그런 것 같군.”

아직 한 시간 정도의 여유 시간이 있었다.

“커피라도 마실까요?”

“그럴까?”

둘은 일단 짐을 놓고 근처의 카페로 갔다.

“어허, 내가 산다. 새파란 후배한테 얻어먹을 순 없지.”

주문한 수혁이 자연스럽게 지갑을 꺼내 계산하려는데, 지양호가 팔을 붙잡으며 말렸다.

그러곤 카드를 꺼내 계산을 했다.

잠시 후 나온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수혁이 지양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잘 마시겠습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지양호는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말투가 거칠긴 하지만, 호탕한 성격의 좋은 사람 같았다.

수혁은 다른 사람들도 지양호와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자신의 짐 옆에 조금 전까진 없었던 사람 한 명이 서 있었다.

수혁이나 박정우와 비슷한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수혁과 지양호를 보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수혁 역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김수혁이라고 합니다.”

“아, 그 김수혁?”

그는 수혁의 이름을 듣더니, 방금 전까지 보였던 정중한 태도를 바꾸었다.

“유명한 분이시네.”

처음 지양호를 봤을 때 그가 했던 말과 같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뉘앙스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쪽 분은?”

“……하, 그쪽?”

지양호가 인상을 구겼다.

지양호의 계급은 소방경.

이번 연수를 가는 소방관들 중 가장 높은 계급이자, 책임자였다.

그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계급이 두 단계 아래인 소방장이었으니…….

아무리 잘 쳐줘도 소방교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놈이 감히 자신을 그쪽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지양호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얼굴까지 험악해지자, 조금 전과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섭게 변해 버렸다.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선배한테 뭐? 그쪽? 너 이 새끼, 어디 서에서 근무해? 너희 팀장 누구야?”

지양호가 윽박지르자, 남자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어, 그러니까 저는…….”

“말도 똑바로 못해?”

지양호가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곤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얼굴을 가져다댔다.

“네가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하나만 알아둬라. 앞으로 내 앞에서 그딴 태도 취하면 넌 그날로 뒈지는 거야. 알겠어?”

“예, 예!”

지양호는 그가 수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단박에 눈치를 챘다.

그리고 그 생각의 근원이 되는 것이 시기와 질투라는 것도.

그간 수혁의 활약상을 들으며, 수혁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던 지양호였다.

그런데 감히 자신의 앞에서 그런 수혁에게 적대감에 가까운 감정을 보였으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잘해라.”

지양호는 남자의 어깨를 몇 번 두들겨 주고는 수혁에게 돌아갔다.

“우린 커피나 마저 마시자고.”

지양호가 수혁을 끌고 의자로 데리고 갔다.

수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와 지양호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어쨌든 저 남자도 자신의 상급자인 것은 틀림없다.

괜히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면 앞으로의 일정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수혁은 남자를 외면하고 지양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수혁과 나란히 앉은 지양호는 커피를 몇 모금 쪽쪽 빨아 마시더니 말했다.

“앞으로 저런 놈들 많을 거다.”

“……예?”

“네가 한 일들을 가지고 트집을 잡고 질투하는 소인배들 말이야.”

수혁은 입을 열지 못했다.

“소방관인 주제에 유명해지는 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새끼도 있을 거고, 네가 그냥 언론이 만들어낸 가짜 영웅이라고 까내리는 새끼들도 분명히 있을 거다. 이번에 독일로 가는 놈들 중에서도 분명 그런 놈들이 있겠지. 저 새끼처럼.”

지양호가 말을 하며 방금 전의 남자를 가리켰다.

“보니까 그런 것에 주눅들 성격 같진 않고.”

그의 말대로였다.

기분이 나쁘고 힘들긴 하겠지만, 주눅이 들 이유는 없었다.

“그런 놈들이 시비 건다고 괜히 욱해서 덤벼들진 마라. 아무리 찐따 같은 놈들이라 해도 어쨌든 여긴 계급이 깡패니까.”

“알겠습니다.”

“그런 일 생기면 나한테 말해. 내가 아주 묵사발을 내줄 테니.”

지양호의 말에 수혁이 미소를 지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일정의 시작이 좋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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