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30화
함부르크 시내 관광은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물론, 눈이 즐거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30명이 넘는 남자들이 뭉쳐서 다니다 보니, 영 분위기가 살질 않았다.
“야, 그냥 흩어져.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고, 과음하지도 말고. 알아서들 즐기다가 알아서들 들어와. 내일 일정에 차질 생기면 뒈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넵, 알겠습니다!”
사람들은 지양호가 그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삼삼오오 흩어졌다.
“너는 나랑 다니자.”
“아, 저는 왜요.”
지양호가 은근슬쩍 빠져나가려는 수혁을 붙잡았다.
“너 독일어 할 줄 알아?”
“아니요.”
“그럼 영어 할 줄 알아?”
“……같이 다니죠.”
자신에게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수혁은 한숨을 내쉬며 지양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형만 믿고 따라와.”
언제부터 형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양호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둘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웅장한 시청을 구경한 뒤, 광장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는 주변을 돌아다녔다.
“여긴 화재 진압할 때 물 부족할 일은 없겠네요.”
시청 광장 옆쪽으로 흐르는 강을 본 수혁이 그렇게 말하자, 지양호가 코웃음을 쳤다.
“서울에 한강 있다고 불끄기 쉽대냐?”
그냥 농담처럼 한 말이었는데, 이렇게 핀잔을 주자 수혁이 입을 삐죽였다.
“그래도 네 말이 틀린 건 아니지.”
강이 흐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지양호의 눈에는 확연하게 들어왔다.
거리 곳곳에 놓여 있는 소화전이 말이다.
“여기는 정말 차원이 다르구만.”
시선을 조금만 돌려도 소화전이 몇 개씩 눈에 띄었다.
“이 정도면 네 말대로 물 부족할 일은 없겠어.”
웅장한 시청의 건물을 보고도 심드렁했던 지양호가 소화전을 보며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나라도 잘 되어 있지 않아요?”
수혁이 묻자 지양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근데 조금만 오래된 동네는 아직 부족해, 길도 엉망이고. 도저히 펌프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도 많으니까. 게다가 아직 시민의식도 조금 부족하고.”
지양호의 말에 수혁은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사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미국이었나?’
소화전 옆에 주차되어 있던 차의 유리를 깨고 호스를 연결한 사진이었다.
우리나라였으면 감히 시도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랬다간 차 주인의 욕설과 손해 배상 청구라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그것을 생각해 보면 지양호의 말대로 아직 시민의식이 미숙한 것은 사실이었다.
“독일한테 배우려면, 기술 같은 것보다 이런 걸 배우는 게 백번 나을 텐데. 또 이런 건 안 배워요, 윗대가리들이.”
지양호는 짜증이 나는지 인상을 구겼다.
“언젠간 바뀌지 않을까요?”
수혁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바뀌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이 죽기 전까진 지금과 똑같았다.
언제나 개고생을 하며 죽어나가는 것은 일선에서 목숨을 거는 대원들뿐이었다.
“퍽이나.”
지양호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높으신 분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관심이 없어. 그저 표를 끌어모으는 데 혈안이 되서 관심 있는 척할 뿐이지.”
항상 그래 왔다.
소방관 처우개선은 언제나 말뿐이었고, 정말로 위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쯧, 독일까지 와서 이게 무슨 궁상이냐. 구경이나 하자.”
지양호는 한숨을 내쉬고는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한번 가라앉은 분위기는 쉽게 올라가지 못했다.
결국 둘은 맥주 한 잔씩을 마신 후, 숙소로 돌아왔다.
“쉬세요.”
“그래, 너도 들어가 쉬어라. 내가 괜한 말 해서 분위기 망친 거 미안하다.”
“뭘요.”
수혁은 괜찮다는 듯 한번 웃어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대충 씻은 뒤 침대에 누운 수혁이 시계를 확인했다.
PM 9:30.
“한국은 새벽이겠구나.”
최은송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괜히 잠을 깨울 것 같아 그만두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스마트폰을 보던 수혁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 * *
“수혁이 놈은 잘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수혁이 독일로 떠난 지도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김강식은 점심으로 나온 제육볶음을 한 젓가락 집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걱정할 놈을 걱정해라, 인마. 그놈이 보통 놈이냐? 사막 한가운데다 떨어뜨려도 살아 나올 놈이야, 그놈이.”
박상태는 걱정할 것도 많다며 김강식을 타박했다.
“그건 알죠. 제가 걱정하는 건 수혁이가 아니라, 독일인데요?”
“아…….”
수혁은 가는 곳마다 사고가 일어났다.
아니, 이 정도면 사고를 일으킨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푸켓에서는 쓰나미가 발생했으니, 혹시 독일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질까 조마조마했다.
“하긴, 그놈이 갔으니 뭔가 일이 터져도 이상하진 않지.”
박상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그 얘기 들으셨습니까?”
“무슨 얘기?”
박상태가 고개를 들자 김강식이 조용하게 소근거렸다.
“특구가 생길지도 모른다던데요?”
“……특구? 무슨 특구?”
“여기가 워낙 재난 발생률이 높잖아요. 그래서 행안부 쪽에서 대책을 마련하라고 했다는데, 그 대책 중 하나가 특구 설립이라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그 말을 들은 박상태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자세하게 말해봐.”
이 지역을 책임질 특수 구조대가 설립된다는 것은 박상태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동안 얼마나 개고생을 했던가?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끼니도 제때 챙겨 먹지 못할 때가 많았다.
휴식은커녕, 출동 나갔다가 서로 복귀하지도 못하고 곧장 다시 출동 나가는 경우도 허다했고.
전국 어느 곳을 뒤져 봐도 자신들처럼 바쁜 곳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특수 구조대가 만들어진다?
그만큼 자신들의 일이 줄어들 테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상세한 건 모르겠지만, 늦어도 내년에는 예산이랑 인원 충당해서 팀을 꾸릴 거랍니다. 지금은 그거 조율하고 있고.”
“확실한 얘기야? 그냥 떠도는 소문 아니고?”
“그거야 모르죠. 저도 들은 얘기니까.”
김강식이 어깨를 으쓱했다.
“누구한테 들었는데?”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우리 서에서 발이 제일 넓은 놈이지.”
“박정우야?”
박상태가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그놈은 어디서 그런 걸 주워듣는다냐?”
“괜히 마당발이겠습니까?”
김강식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둘은 박정우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만큼 박정우가 물어다주는 정보는 사실인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특구가 만들어지면 좋긴 한데, 예산이 되겠냐? 원래 있던 것도 삭감하려는 판인데.”
“그게 문제죠. 뭐 행안부 장관이 여기저기 발로 뛰고 있다고는 하는데, 이번에도 말만 그러는 걸지 또 어떻게 압니까?”
그냥 믿기에는 그동안 당한 것이 너무 많았다.
“국가직으로 전환시켜 준다고 설레발 친 것도 벌써 몇 년이냐? 매번 선거 때마다 말만 하고 나중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른 척하기 바쁘지.”
박상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젠 기대조차 되지 않았다.
“식사 다 하셨습니까?”
그때 박정우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야, 너 이리 와봐.”
그를 본 박상태가 마침 잘됐다는 듯 불렀다.
“네? 아, 잠시 밥 좀 푸고요.”
박정우는 식판을 들고 밥을 담은 뒤 박상태 옆에 앉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너 그거 얘기 좀 해봐라.”
“……무슨 얘기요?”
“특구.”
“아, 그거요?”
박정우가 자신이 알고 있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강식에게 들었던 것과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결국은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구만?”
박상태가 살짝 실망한 기색이자, 박정우가 말을 덧붙였다.
“이건 저도 어젯밤에 들은 이야긴데요.”
“뭔데?”
“전에 우리한테 장비 기부했던 사람 있지 않습니까? 그 짐인지 빔인지 하는 분.”
“짐 머레이, 이 새끼야. 그런 기부를 해준 분 이름은 좀 외워라.”
“뭐, 어쨌든요. 아무튼 그분 얘기도 조금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거기서 그 양반 얘기가 왜 나와?”
“정확한 건 저도 모르겠는데, 그분이 행안부랑 투자 관련해서 이야기가 오간다는 소문이…….”
“투자?”
기부한 물품만 봐도 짐 머레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부자인지는 알 수가 있었다.
그런 부자가 투자한다는 게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닌데…….
“그게 뭐? 지금 얘기랑 상관있는 거야?”
“그 투자가 특구 설립에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요.”
박상태와 김강식이 눈을 끔뻑였다.
대체 사업가가 투자하는 것과 특구가 설립되는 것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도 건너건너 들은 이야기라 정확하진 않습니다. 그냥 이런 소문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박정우는 말을 끝내고는 밥을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언제 출동이 떨어질지 모른다.
밥 먹을 시간이 있을 때 빨리 먹어두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구조 출동, 구조 출동.]
하늘은 그에게 밥을 먹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오, 젠장! 왜 말을 시켜서 사람 밥도 못 먹게!”
“욕할 시간에 뛰어, 이 새끼야!”
수혁이 없는 신일서는 오늘도 평소처럼 바쁘게 움직였다.
* * *
“으으, 죽겠다.”
소방 학교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 지양호가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교육을 시작한 지 일주일.
한가했던 것은 첫날이 끝이었고, 둘째 날부터는 차라리 현장에 출동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이 들었다.
아무리 단련된 육체라고 해도, 쉬는 날 없이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훈련에 지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너는 왜 멀쩡해 보이냐?”
좌석에 앉아 읽지도 못하는 독일 신문을 펼치고 있는 수혁을 보며 지양호가 물었다.
“저는 아직 젊잖아요.”
수혁이 웃으며 대답하자, 지양호가 이를 갈았다.
“그럼 쟤들은 늙어서 힘들어하는 거고?”
지양호가 버스 뒷좌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기절한 것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수혁이 실소를 지었다.
수혁이 생각하기에도 일정이 너무 빡셌다.
만약 레벨 업으로 인한 신체 능력 상승이 아니었다면, 수혁 역시도 저들처럼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였을 것이다.
“아, 오늘 레펠 탄다는데…….”
지양호가 걱정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레펠 자체는 그리 어려운 훈련이 아니었다.
레펠은 평소에도 많이 하는 훈련이었고, 현장에서도 심심찮게 활용하는 터라 익숙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지친 상태로 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높은 곳에서 줄에 의지해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꽤나 피곤한 일이었던 것이다.
“사고 안 나게 조심하세요. 독일에 연수까지 와서 다치면 그게 무슨 손햅니까?”
“너나 잘해. 레펠을 탈 줄이나 아냐?”
“제 소문 못 들으셨어요? 스파이더맨이라고, 17층에서 호스 하나 들고 뛰어내린 게 바로 접니다. 레펠 따위 껌이죠.”
지양호도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한 신입 구조대원이 가스 폭발이 일어난 빌딩에서, 호스를 붙잡고 요구조자와 함께 뛰어내렸다고.
그때는 웬 미친놈이 하나 들어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게 수혁일 줄이야.
“……그 또라이가 너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