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32화
독일은 축구의 나라다.
월드컵에 출전해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했고, 레전드 급 선수들도 수없이 배출한.
때문에 독일 사람들은 축구에 대한 관심이 여느 나라 못지않게 높은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동네 축구장치고는 퀄리티가 엄청 좋네요.”
수혁이 눈앞에 있는 축구 경기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관중석만 있으면 월드컵 경기장인 줄 알겠다.”
지양호 역시 감탄했다.
오늘 축구를 하러 나온 인원은 수혁과 지양호를 포함해 총 열두 명.
나머지 스물세 명은 아직 호텔에서 뒹굴거리거나, 관광 나간 상태였다.
‘이 황금 같은 주말에 뭘 하고 있는 건질 모르겠네.’
수혁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얼떨결에 축구를 하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사실 그 시간에 함부르크 시내를 한 바퀴 도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반대로 지양호는 잔뜩 신난 얼굴이었다.
그는 축구 자체를 좋아했다.
TV로 중계방송을 보는 것도 좋아했고, 직접 이렇게 몸으로 뛰는 것도 좋아했다.
그런데 독일인들과 축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늘 축구를 하러 나온 이들 대부분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저놈은 조금 의외지만.’
수혁이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김성태가 신의성과 함께 경기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평상시 김성태의 성격은 이런 행사에는 낄 것 같지 않아 보였는데…….
‘축구를 좋아하는 건가?’
수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축구는 팀플레이다.
열한 명의 선수가 서로 연계하고, 힘을 합쳐야 하는 경기.
그런데 저런 성격을 가지고 제대로 된 팀플레이를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뭐, 실력에 자신이 있나 보지.’
수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관심을 거두었다.
“오, 왔구나!”
먼저 도착해서 몸을 풀고 있던 미하일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유니폼도 있네?”
미하일과 그의 동료 소방관들은 흰색 유니폼까지 맞춰 입고 있었다.
“하하, 우리는 각 소방서 별로 축구팀을 조직해서 가끔 이렇게 시합하곤 하거든.”
미하일이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마치 ‘느그 집엔 이런 거 없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들은 한국 소방관들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냥 조기 축구회 같은 거 아니냐?’
한국에도 그런 팀들이 수백 개는 있었으니까.
물론 실력에서는 차이가 날진 몰라도, 딱히 특별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미하일이 살짝 당황했다.
“우리는 그런 거 없나?”
지양호가 혹시나 하고 자신들이 입을 유니폼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준비되어 있는 것은 없었다.
“이 조끼를 입고 뛰시면 됩니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율리안이 품에 한가득 형광색 조끼를 들고 다가왔다.
“율리안도 뛰어요?”
수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 그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이런 주말에도 항상 땀을 흘리며 훈련할 것만 같았다.
“축구는 팀워크를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되니까.”
율리안이 웃으며 수혁에게 조끼를 건네주었다.
“어때? 축구는 좀 할 줄 아나?”
율리안이 묻자 수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은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확실히 못 한다고 말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수혁은 메시 저리가라 할 정도의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피지컬이 좋다고 해서 축구를 잘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수혁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잘 모르겠네요. 축구를 해본 지 하도 오래돼서 그리 자신도 없고.”
“의외군. 자네라면 꽤 할 줄 알았는데.”
수혁이 겸양을 떠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없어 하는 모습이자 율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수혁이 보여준 순발력, 체력, 지구력 등을 생각하면, 어떤 운동을 해도 다 잘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한번 해보면 알겠죠.”
수혁이 민망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을 하고는 조끼를 입었다.
“풀타임으로 하면 지쳐서 훈련에도 지장이 생길 것 같으니까, 전반 25분, 후반 25분 경기로 하겠습니다.”
미하일이 대충 경기가 어떻게 진행될지를 고지했다.
“심판은요?”
김성태가 손을 들고 물었다.
“우리 쪽에서 안 뛰는 애들이 봐주기로 했습니다.”
동네 축구에 정식 심판을 불러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 몸 좀 푸시고, 20분 뒤에 경기 시작하시죠.”
조끼를 입은 한국 소방관들이 각자 몸을 풀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서 소싯적에 축구 좀 안 차봤다 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학교든, 군대든, 조기 축구회든.
나름대로 축구 실력에 자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몸을 풀며 누가 선발로 나설지 의논했다.
“어, 그럼 저는 그냥 후반에 나갈게요.”
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수혁이 한 발 빼자, 다른 사람들이 화색을 지었다.
한 명이 빠졌으니 나머지 모두가 선발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제까지는 지쳐서 그렇게 힘들어하던 사람들이…….’
축구를 한다는 말에 저렇게 활기차게 변할 줄이야.
힘들어하던 지난날의 모습들이 전부 거짓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럼 수혁이는 후반에 뛰던가 하고, 대충 포지션도 정해야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서로 공격을 하겠다며 떼를 쓰는 모습이, 마치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러 운동장에 나온 초등학생들 같았다.
‘남자는 다 애라더니.’
축구공 하나에 이렇게 열정적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결국은 짬밥으로 포지션이 정해졌다.
지양호와 신의성의 투톱.
그리고 막내 급인 김성태가 골키퍼.
나머지는 적당히 그 중간에 흩어졌다.
골키퍼가 된 김성태는 ‘이게 아닌데?’라는 표정으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최전방에서 종횡무진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어느 정도 몸도 풀고 포지션도 정했겠다, 곧바로 경기를 시작했다.
수혁은 홀로 벤치에 앉아 준비된 물을 홀짝이며 구경을 했다.
“확실히 체격 차이가 크긴 하네.”
우리나라 소방관들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육체의 소유자들이었지만, 독일 소방관들은 그보다 한술 더 떴다.
“막아! 막으라고!”
지양호의 다급한 외침이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우월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독일 팀은 순식간에 우리나라 미드필더 진을 꿰뚫었다.
공을 몇 번 발로 툭툭 찬다 싶었더니, 어느새 페널티 박스 안쪽까지 들어와 버린 것이다.
깜짝 놀란 수비들이 달려들었지만, 최전방 공격수를 맡고 있는 율리안이 한발 빨랐다.
뻐엉-!
김성태가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공은 골망을 흔들었다.
“……엉?”
경기가 시작한 지 이제 막 3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도 빠른 실점에 수혁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자동문이 따로 없네.”
뭘 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너무 쉽게 골을 내주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독일 팀은 항상 손발을 맞춰온 한 팀이었고, 우리나라는 이제 막 결성되어 같이 뛰어본 적이라곤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납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마! 그걸 뚫리면 어떡해!”
신의성이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걸 어떻게 막습니까? 내가 라모스도 아니고.”
“이렇게 발로 어? 쭉 내밀면! 되잖아, 인마!”
“그렇게 잘하시면 직접 하시든지.”
수혁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재밌네.’
축구보다 저렇게 싸우는 걸 보는 게 더 재밌었다.
“어휴, 진짜. 잘 좀 하자, 응?”
지양호가 말리자 신의성이 분통을 터트리며 되돌아갔다.
가볍게 한 경기 뛰려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기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부족한 피지컬과 팀워크는 곧장 메꿔지는 것이 아니었다.
첫 골을 먹힌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번에는 미하일의 발에서 골이 터졌다.
“으하하하!”
미하일은 웃통을 벗고는 손에 쥐고 허공에 흔들며 세레모니를 했다.
‘뱃살은 없네.’
훈련할 때마다 하도 뱃살이 나왔다고 놀려대기에 진짜로 살이 좀 찐 줄 알았더니, 미하일의 배에는 식스팩이 선명했다.
미하일은 한참 동안이나 좋아하더니 수혁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구경 그만하고 나오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본 수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딱히 축구에 자신도 없는데, 율리안이나 미하일이나, 자신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혁이 괜히 물을 한 병 더 따서 마시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사이 경기가 재개됐다.
더 이상의 실점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한국 팀은 필사적으로 수비에 매달렸다.
공격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 그 덕분에 쉽사리 골문을 열어주진 않았다.
그러다 아쉽게 막판에 율리안을 막지 못하고 한 골을 더 내주며 3:0의 스코어로 전반전을 마쳤다.
벤치로 돌아온 사람들의 표정은 썩어 있었다.
하지만 처음처럼 화를 내거나 하진 않았다.
이건 누구 한 명의 잘못이나 실수 때문이 아니라, 그냥 자신들의 실력 부족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김수혁, 너 후반에 나가라.”
“네, 뭐……. 알겠습니다.”
별로 뛰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잔뜩 독이 오른 신의성의 표정을 본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서 저놈들한테 한 방 먹여줘. 할 수 있지?”
이번엔 지양호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수혁에게 집중됐다.
수혁은 갑자기 엄청나게 부담스러워졌다.
“……저 축구 잘 못 하는데요?”
“자신 없으면 발이라도 걸어. 네 힘이면 안 넘어지곤 못 배길 거다.”
“아니, 그건 좀.”
3:0이라는 점수 차이에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어쨌든 나 대신 수혁이가 공격으로 들어가.”
지양호가 그렇게 말을 하자, 김성태가 슬쩍 손을 들었다.
“저…….”
“뭐?”
“제가 공격으로 나가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자신 있는데.”
3골이나 먹힌 탓에 괜한 눈칫밥을 먹는 것이 싫었던 것일까?
김성태는 더 이상 골키퍼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네가 공격으로 나가면 골키퍼는 누가 해?”
“김수혁이 대신하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축구에 자신도 없다니, 차라리 제가 공격을 하고…….”
“안 돼.”
지양호가 김성태의 말을 끊었다.
“그냥 지금 이대로 하고, 김수혁이 나 대신 공격한다.”
지양호는 더 이상의 반론을 듣지 않겠다는 듯 말을 끝내 버렸다.
그러자 김성태가 수혁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지양호에게 뺨을 맞고 수혁에게 푸는 듯한 모습이었다.
수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몸을 풀었다.
경기가 끝나고 김성태에게 욕을 먹지 않으려면 뭔가를 보여주긴 해야 할 것 같았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됐다.
수혁은 신의성과 함께 중앙선에 섰다.
“잘할 수 있지?”
신의성이 물었다.
“열심히 한번 해보겠습니다.”
잘하는 건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는 건 자신 있었다.
고작 25분 정도 뛴다고 지치지도 않을 테니, 죽어라 달리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응?’
휘슬이 올리기 전, 잠시 상대의 골대를 쳐다본 수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골키퍼가 꽤 앞으로 많이 나와 있었다.
전반전 내내 한국 쪽 유효 슈팅이 단 한 개도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번 차볼까?’
힘은 충분했다.
그리고 왠지 들어갈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삐익-!
후반전 시작 휘슬이 울리자, 신의성이 수혁에게 공을 툭- 차주었다.
그러자 수혁은 망설이지 않고 왼발을 앞으로 내딛고는, 강하게 공을 걷어찼다.
뻐어엉-!
공은 순식간에 독일 측 골망을 흔들었다.
경기장 안에 있는 그 누구도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