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38화
“후우…….”
옥상으로 가는 곳은 더 심했다.
수혁은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봤다.
“어떻게 할까요?”
수혁이 묻자 율리안과 지양호 역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답이 없는데?
계단이 없었다.
가스 폭발의 충격으로 계단 한복판이 무너져 내리며, 길이 끊겨 버린 것이다.
지양호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일단은 어느 정도 화재가 진압된 후에 장비를 써서 건너가는 수밖에 없겠군.”
율리안도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순 없어요.”
하지만 수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진 괜찮았지만, 시간이 더 지체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운이 없다면, 화재로 인해 약해진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다.
오래된 건물이라 목재가 많이 사용되었기에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 화재 진압대에서 열심히 방수하고 있긴 했지만, 그것을 믿고 있기엔 사안이 급했다.
“그런데 이 위에 요구조자들이 있는 것은 확실한가?”
율리안이 물었다.
오늘 하루 동안 수혁이 보여준 모습을 생각해 보면 요구조자는 있을 것 같았지만…….
“네, 있습니다.”
수혁은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대답했다.
“아까 밑에 있을 때 소리치는 걸 들었어요.”
수혁은 대충 둘러대며 변명했다.
그 변명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은 수혁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이런 것으로 그냥 넘어가기엔, 수혁이 오늘 보여준 것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율리안의 질문세례가 쏟아질 게 뻔했기에, 그 상황을 조금이라도 모면하고자 미리 말을 던진 것이었다.
“음…….”
율리안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수혁의 말대로 정말 옥상에 요구조자들이 있다면, 시간에 여유가 많지 않았다.
“사다리차는 언제쯤 도착한답니까?”
“곧.”
율리안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사실 사다리차는 지금쯤 도착하고도 남았어야만 했다.
독일은 2층에 있는 환자를 내릴 때도 사다리차를 사용할 정도로 보편화 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수혁은 일단 사다리차에 대한 기대를 접기로 했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사다리차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
“혼자 가겠습니다.”
“……뭐?”
지양호는 방금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율리안에게 통역도 해주지 않았다.
“두 분은 일단 내려가서 대기하고 계세요. 그러다 사다리차 도착하면 무전 주시고.”
옥상에 남은 요구조자의 수는 네 명이다.
이런 상황에 혼자서 그들 모두를 구할 순 없었다.
수혁은 일단 혼자서 건너간 뒤, 사다리차가 도착할 때까지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을 생각이었다.
“아니, 대체 저길 어떻게 건너갈 생각이냐?”
무너진 계단의 틈은 약 3m가량.
평소라면 제자리멀리뛰기의 기록이 362㎝에 달하는 수혁에겐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방화복과 장비를 매고 있었고, 평지가 아닌 오르막으로 3m였다.
수혁이 아니라 그 어떤 육상 선수가 와도 절대 뛰어넘지 못할 틈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괜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까 먼저 내려가세요.”
조금 위험해 보이기는 했지만, 수혁은 뛰어넘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여기를 뛰어넘는 모습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비현실적인지라, 두 사람을 내려보내기로 한 것이다.
지양호에게 말을 전해 들은 율리안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그냥 뒤돌아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왠지 요구조자를 앞에 두고 도망을 치는 느낌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수혁이 대체 어떻게 저길 건너겠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어서요!”
하지만 수혁의 단호한 태도에 율리안은 어쩔 수 없이 내려가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자존심이나 궁금함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그딴 것보단 요구조자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백만 배는 더 중요했다.
“우선은 네 말을 따르지. 대신 도움이 필요하다면 꼭 무전을 해라. 바로 달려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꼭 그렇게 할게요.”
수혁이 꼭 약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한숨을 내쉬며 계단을 내려갔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것이 내려가고 싶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결국 둘은 수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후우우.”
혼자 남게 되자 수혁은 심호흡했다.
그러면서 발목을 돌리며 풀어주기 시작했다.
충분히 뛸 수 있는 거리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훈련 때처럼 대충 뛸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수혁이 짊어지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 정도면 된 거 같고.’
어느 정도 몸이 풀렸다고 생각한 수혁이 뒤쪽으로 조금 물러섰다.
곧 시선을 정면에 고정하고,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타타탓-!
순식간에 도움닫기를 끝낸 수혁이 그대로 땅을 박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수혁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흐읍!”
장비의 무게가 수혁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것이 수혁의 움직임을 막을 순 없었다.
수혁은 말 그대로 날듯이 허공을 가로질러 3m 떨어져 있는 반대편에 내려섰다.
쿠당탕-!
속도를 견디지 못한 수혁이 앞으로 쓰러지며 요란한 소음을 터트렸다.
‘아, 아슬아슬했네.’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는지,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이미 한번 붕괴가 일어난 계단이었다.
언제 더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였으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온 신경을 집중해 오르다 보니,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
‘생명 감지Ⅱ’로 확인한 요구조자 네 명은 바로 이 문 건너편에 있었다.
문고리를 잡은 수혁이 문을 밀자, 차가운 바람과 함께 불을 피해 옥상 한가운데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직 수혁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이쪽에는 신경쓸 겨를도 없어 보였다.
한 가족으로 보이는 네 명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혁은 일부러 강하게 옥상 문을 닫으며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쾅-!
요구조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수혁을 발견한 그들의 얼굴에 희망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다행히 아직까진 무사하네.’
사방은 아래층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불과 연기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쪽에는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이렇게 한가운데에 모여 있었던 것 같았다.
단순히 무서웠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론 그것이 이들을 살렸다.
“괜찮으십니까?”
소방관의 입에서 낯선 언어가 들리자, 요구조자들이 흠칫- 놀랐다.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한국어는 낯선 언어였으니까.
수혁은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마스크를 벗었다.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과 저들과는 다른 동양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수혁의 얼굴을 보자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외계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던 건가?’
수혁이 그 모습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소방관들이 쓰는 마스크가 사람들에게 친근한 모습은 아니었는지라,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한국말 아는 사람 없죠?”
수혁이 혹시나 하고 물었다.
하지만 역시나 알고 있을 턱이 없었다.
몇 년 후에야 유럽 전역에 K-POP이 유행하며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겠지만…….
지금은 그냥 아시아 구석에 있는 작은 나라 정도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수혁은 결국 푸켓에서처럼 손짓발짓을 해가며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거부터 써요.”
수혁이 보조 마스크를 꺼내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직 연기가 여기까지 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미리 대비하고 있는 편이 나았다.
화재로 인한 유독가스는 한 모금만 잘못 마셔도 위험하다.
자칫 잘못해서 바람에 날린 연기를 마시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들은 쉽게 마스크를 썼다.
하지만 어린 딸은 낑낑거리며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다.
수혁은 웃으며 딸에게 조심스럽게 마스크를 씌워준 후 말했다.
“일단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들은 말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대충 뜻은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요구조자 네 명 확보했습니다.”
수혁은 무전기를 통해 보고했다.
그러자 반대쪽에서 지양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 명. 알았다. 거기 상황은 어때?]
“지금은 양호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그리 많을 것 같지 않습니다. 사다리차는 어떻게 됐습니까?”
[늦어도 3분, 그 안에 도착한다. 그 정도는 버틸 수 있겠어?]
“충분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좀 서둘러 달라고 해주세요.”
[그래, 뭐 더 필요한 건 없고?]
“음……. 아, 옆에 혹시 율리안 있으면 무전기로 요구조자들 안심시킬 수 있는 말 좀 해달라고 해주십쇼. 말이 안 통하니까 계속 불안해하네요.”
[잠깐 기다려.]
지양호의 말이 끊기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율리안의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율리안은 독일어로 요구조자들에게 말을 건넸다.
수혁이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들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 것으로 봐선 율리안이 잘 이야기해 준 것 같았다.
[더 필요한건?]
“지금 당장은 없어요.”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라. 거의 다 도착을 했다고 연락이 왔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무전을 끝낸 수혁은 일단 가족들을 그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한 뒤,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불길이 생각보다 강했다.
이대로라면 사다리차가 온다고 해도, 곧바로 구조를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난간 주변을 돌아다니던 수혁은 그나마 가장 불길이 약한 곳을 찾아냈다.
“여기라면 방수로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할 것 같긴 한데.”
사다리차를 올리고 집중적으로 방수한다면, 완벽하진 않더라도 사람이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진압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여기로 하자.”
수혁은 구조 포인트를 정한 뒤, 요구조자들에게 돌아가 사다리차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지양호의 말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사다리차가 도착했다.
밑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며 무전이 왔다.
[사다리차 도착했다.]
“연결 지점 생각해 뒀으니까, 일단 방수부터 해주세요.”
수혁의 요청에 물줄기가 위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왼쪽이요. 더, 더. 네, 거기!”
수혁이 방수해야 할 지점을 정확히 찍어주자, 일제히 그곳을 향해 방수가 시작됐다.
[사다리 올라간다. 준비해.]
사다리차는 신속하게 설치를 끝내고는 사다리를 위로 올리기 시작했다.
늦은 만큼 더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일제 방수 덕분에 시야가 확보되며, 보이지 않던 난간 너머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명씩!”
수혁이 검지를 펼치며 소리치자, 일단 아들이 가장 먼저 나섰다.
수혁은 아들을 번쩍 들어 난간 위로 넘겼다.
그러자 옥상에 도착한 사다리에 탑승하고 있던 소방관이 재빨리 아들을 받아들었다.
[한 명 더 가능하다니, 더 태워.]
지양호의 무전에 수혁이 뒤돌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원 모어! 원 모어!”
그러자 이번엔 엄마가 나섰다.
아이들 두 명만 내려보내기엔 불안했던 것이다.
엄마와 아들을 태운 사다리가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이제 남은 것은 아버지와 딸, 단 두 명뿐.
사다리차는 빠르게 요구조자들을 내려다 준 뒤, 다시 올라왔다.
“차례대로 오세요!”
수혁이 손짓하자 둘이 동시에 난간 쪽으로 다가왔다.
수혁은 일단 딸을 들어 사다리로 넘긴 후, 아버지의 손을 붙잡았다.
“가시죠.”
수혁의 손을 잡은 아버지가 난간을 넘어 사다리를 향해 발을 뻗을 때였다.
[잠깐!]
무전기에서 다급한 지양호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수혁의 귀에 쇠가 일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기긱-!
‘……사다리?’
딸을 태운 사다리가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