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40화
다시 5층까지 올라간 수혁은 어깨에 매고 있던 소방호스를 내렸다.
15m에 달하는 길이의 소방호스를 모두 풀어헤친 수혁이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적당한 곳을 찾았는지, 그쪽으로 다가갔다.
‘여기다 묶으면 되겠다.’
한쪽 벽면에 툭 튀어나온 고리.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지금은 이보다 더 좋은 곳을 찾을 수가 없었기에, 수혁은 고리에 호스 한쪽을 묶었다.
그러곤 수혁은 몇 번 잡아당겨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쪽 호스를 잡고는 다시 땅을 박찼다.
부웅-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수혁이 날아오르며 무너진 계단을 뛰어넘었다.
‘됐다.’
수혁은 호스를 계단의 난간에 단단히 묶었다.
아직 화재가 완전히 진압되지 않아 불길이 있었지만, 내열성 재질로 만들어진 호스는 어느 정도 버텨줄 수 있을 것이다.
준비가 끝나자 수혁은 다시 위로 뛰어 올라갔다.
옥상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망연자실한 표정의 아버지와 딸이 몸을 떨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수혁이 크게 소리치자, 둘의 시선이 수혁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동시에 눈물을 흘렸다.
꼼짝없이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곧장 다시 구하러 온 수혁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 것이다.
수혁은 다급한 손짓으로 그들을 불렀다.
“이쪽으로!”
수혁을 보며 굳은 듯 서 있던 아버지가 딸을 안고는 달려왔다.
둘이 도착하자 수혁은 그들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무너진 계단에 도착한 수혁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리 수혁이라고 한들 3m에 달하는 거리를 장비를 맨 채 사람을 안고 뛰어넘을 순 없었다.
“잠깐 기다려요.”
딸 한 명 정도라면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수혁은 모험하지 않았다.
수혁이 딸을 한쪽 팔로 안아 들었다.
그러곤 반대편 손으로 로프 대신 설치한 소방호스를 붙잡았다.
“꽉 잡으렴.”
불안해하는 딸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 번 미소 지어준 수혁이 그대로 앞을 향해 점프를 뛰었다.
“꺄악!”
깜짝 놀란 딸이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
혹시나 몸부림을 칠까 걱정스러웠던 수혁은 딸을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스으으윽- 탁-!
호스의 도움을 받은 수혁은 손쉽게 반대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혁은 딸을 내려놓고는 다시 건너가 이번에는 아버지를 안으며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휴우…….”
수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어려운 관문을 지났으니, 이제는 계단을 통해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사이 화재 역시 꽤 진압이 된 상태였기에, 수혁의 앞을 막을 만한 장애물은 없었다.
수혁이 두 사람을 데리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지 고작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직 옥상에 도착하지도 못했을 시간에 수혁은 두 사람을 구조해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그런 수혁을 보는 독일 소방관들의 눈에는 경악을 넘어 경이로움마저 엿보일 정도였다.
‘대체 어떻게?’
그것은 율리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속도는 둘째치고, 대체 두 사람을 데리고 그 무너진 계단을 어떻게 지나왔단 말인가?
율리안은 구급대에게 두 사람을 인계하고 있는 수혁에게 다가갔다.
톡톡-
율리안이 수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자, 수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 다녀왔습니다.”
수혁이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율리안이 살짝 난감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양호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다녀왔다는군.”
어느새 온 것일까?
이미 율리안의 뒤에 도착해 있던 지양호가 수혁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수고했다.”
그러고는 수혁을 그렇게 말을 했다.
“수고는 다른 분들이 했죠.”
수혁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 이번 구조는 너 혼자 다 한 거나 다름없다.”
지양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상 자신들이 한 일이라곤 요구조자들을 밖으로 안내한 것밖에는 없었으니까.
그 요구조자를 찾아낸 것도, 쓰러지는 사다리차에서 사람들을 구한 것도, 방금 전 두 사람을 구조한 것도.
모두 수혁 혼자 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번 구조는 수혁 혼자 다 한 것이라는 지양호의 말도 과언은 아니었다.
지양호의 말에 수혁은 괜히 민망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양호의 말대로 전부 혼자 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만약 다른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로 이렇게 빠르게 요구조자들을 구해낼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 도움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말이다.
“뭐, 칭찬은 여기까지만 하지, 피곤할 테니까. 그보다 이 양반이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데?”
지양호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돌리며, 자신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는 율리안을 가리켰다.
“묻고 싶은 건 많지만…….”
둘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율리안이 뭔가 말을 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물어봐야 대답을 듣지 못할 것 같으니 나중으로 미루지.”
율리안은 자신의 궁금증을 묻어두었다.
지금은 자신의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율리안이 수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곤 정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함부르크의 소방관이자 시민 중 한 사람으로서, 오늘 너의 도움을 절대 잊지 않겠다. 고맙다.”
수혁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것.
만약 수혁이 없었다면, 모든 요구조자를 구하는 것에 실패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 실패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해서 수혁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수혁은 율리안의 손을 마주잡으며 웃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뭘.”
8주의 시간은 쏜살과 같이 흘렀다.
처음 독일에 왔을 때는 마치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 길게만 느껴졌던 시간이 모두 흐르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수혁은 호텔에서 짐을 싸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첫날 이곳에 들어와 느꼈던 낯선 기분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게 뭔 청승이냐. 군대 전역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 피식- 하고 웃은 수혁은 마저 짐을 싸고는 방을 나섰다.
“준비 다 했냐?”
마침 지양호도 캐리어를 끌고 방을 나서고 있었다.
“네, 딱히 정리할 것도 없어서.”
“그건 그렇지.”
옷과 몇 가지 생필품, 그리고 선물 몇 가지가 전부였으니, 짐정리를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이유가 없었다.
둘은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에는 먼저 준비를 끝마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오셨습니까? 이쪽입니다.”
둘을 발견한 신의성이 손을 들며 수혁과 지양호를 불렀다.
“우리가 제일 늦었나?”
“아닙니다, 아직 몇 명 더 남았습니다.”
신의성의 대답에 수혁이 사람들을 한 번 살펴봤다.
확실히 몇몇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놈도 아직 안 왔네.’
연수 기간 내내 수혁의 심기를 살살 건드렸던 김성태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수혁은 그동안 그를 벼르고 있었다.
예전에 지양호에게 말했다시피, 사람 한번 만들어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김성태는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운이 좋은 건지.
수혁의 기분을 살살 건드리면서도, 절대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다.
결국 수혁은 연수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된 기회를 잡지 못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괜히 먼저 시비를 걸 수도 없지 않은가?
수혁은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물론 한국으로 돌아가면 평생 만나지 못할 확률이 컸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로비에 서서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모였다.
“나가자.”
인원수를 체크한 지양호가 앞장서 호텔 밖으로 이동했다.
사람들은 8주간 친절하게 대해준 호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지양호의 뒤를 따랐다.
밖에는 그동안 익숙해진 버스가 서 있었고, 율리안과 미하일, 크라우프와 같은 독일 소방관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환영 인사 때와 마찬가지로 율리안이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건넸다.
“수고는 그쪽이 많이 했지.”
지양호가 웃으며 율리안과 포옹을 했다.
“많이 배워갑니다.”
“저희야말로 많이 배웠습니다.”
그동안 많이 친해진 한국과 독일의 소방관들은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며 서로 작별인사를 했다.
“너를 독일로 부른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수혁.”
지양호와의 인사를 끝낸 율리안이 수혁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사실 별로 오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드네요.”
수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다행이군.”
율리안 역시 수혁과 마주 보며 웃었다.
평소 훈련할 때 보면 무슨 기계 같았지만, 지금처럼 웃을 땐 눈가의 주름이 매우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또 부르진 마세요. 다음엔 그냥 여자친구랑 관광하러 오고 싶으니까.”
수혁의 말에 율리안이 크게 웃었다.
“그때가 되면 연락해라. 내가 성심을 다해 가이드해 줄 테니.”
“생각해 볼게요.”
율리안은 수혁을 한 번 안아주고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수혁과 지양호에게만 속삭였다.
“조만간 두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 하나 갈 거다.”
“……좋은 소식이라뇨?”
“지금 말하면 재미가 없지. 기다리다 보면 들을 수 있을 거다.”
이번엔 율리안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양호 역시 궁금한 표정이었지만, 굳이 대답해 주지 않는 상대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모두 탑승하세요!”
출발 시간이 되었는지, 버스 기사가 소리를 쳤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수혁은 왠지 찝찝한 기분을 느꼈지만, 할 수 없다는 듯 버스에 올라탔다.
35명 전원이 탑승을 완료하자, 버스가 이동을 시작했다.
창밖으로 독일 소방관들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수혁과 일행 역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드디어 집에 가는구나.’
헤어짐의 아쉬움은 잠시.
수혁은 곧 최은송과 신일서 동료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한껏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수혁 씨!”
입국장을 나선 수혁을 맞아준 것은 그토록 보고 싶던 최은송의 외침이었다.
“어? 은송 씨?”
설마 최은송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지라, 수혁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니, 출근은 어떻게 하고 여기까지 나왔어요?”
“남자친구가 두 달 만에 돌아오는 건데, 당연히 마중 나와야죠.”
“나는 그냥 버스 타고 돌아가면 되는데…….”
“짐도 많은데 버스 타면 힘들잖아요.”
최은송이 수혁의 손에서 캐리어를 빼앗았다.
“그렇지 않아도 비행기 오래 타서 힘들었을 텐데. 짐은 저한테 맡겨요.”
8주 만에 보는 최은송의 살가운 모습에 수혁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때, 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지양호가 끼어들며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는 지양호라고 합니다. 이 녀석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어머, 그래요?”
최은송은 수혁이 그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저도 좀 태워주시면 얘기해 드릴 수 있는데…….”
“아니, 잠깐만요. 형님은 서울에 사시잖아요. 저희랑 가는 방향이 다른데.”
“괜찮아요, 수혁 씨. 잠깐 들렀다 가면 되죠.”
최은송은 수혁의 말을 막고는 지양호를 쳐다보며 웃었다.
“같이 타세요. 모셔다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지양호는 최은송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수혁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