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88화
“설마 둘 다 부를 줄이야.”
전승철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런 구경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거 아닙니까?”
전승철과 달리 이희도의 음성에는 설렘이 가득해 보였다.
“우리가 언제 또 훈장 수여식 같은 걸 참관해 보겠습니까. 기껏해야 표창식 정도가 한계지.”
오지환 역시 이희도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그건 전승철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비번에 이렇게 서울까지 와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계속 축 처져 있을 순 없지.’
다시 한 번 깊게 한숨을 내쉰 전승철은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아무리 귀찮다고는 하지만, 수혁은 현재 자신의 부하이다.
부하가 훈장을 받는 경사스러운 날에, 팀장이 이런 표정을 짓고 있을 순 없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신일서에서도 참관하면, 사람이 꽤 많겠는데요?”
소방관으로선 대한민국에서 첫 번째로 받는 독일의 훈장이다.
당연히 언론 쪽에서도 기자들을 보냈을 것이고, 그 외에도 소방청의 높으신 양반들도 대거 참관할 가능성이 높았다.
“옷들 정리해. 괜히 흐트러진 모습 보이지 말고.”
전승철은 자신의 옷매무새를 만지며 대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높으신 분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특수구조대의 대원들이 책잡힐 만한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특히나 설립된 지 이제 고작 한 달밖에 되지 않은 곳이라면 더욱 더.
대원들의 복장을 점검한 전승철은 서울역 앞에 있는 독일 대사관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소방관 정복을 입은 대원들이 지나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별 뜻 없이 스쳐 지나가듯 보는 것에 불과했지만, 대원들은 왠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조금 이동하자 독일 국기가 걸려 있는 대사관이 보였다.
“어? 신일서 분들인가 보네요.”
대사관 앞에는 그들과 같은 정복을 입고 대기 중인 소방관들이 보였다.
계급장을 보니 간부들은 아니었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신일서의 소방관들밖에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전승철이 그들 중 한 명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아, 전 팀장.”
그의 인사를 받은 것은 박상태였다.
박상태는 전승철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미미하게 찌푸렸지만, 이내 그것을 지우고는 악수를 나누었다.
“특구에서도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거 괜히 끼어드는 건가 싶어 민망하네요.”
수혁은 정식으로 특수 구조대에 발령받은 것이 아니었기에, 전승철은 자신들이 이곳에 와도 되나 싶었다.
“수혁이 현재 소속은 그쪽이니까요. 불편해하실 것 없습니다.”
박상태가 웃으며 전승철의 부담감을 덜어주었다.
“그런데 안 들어가고 왜 여기 서계시는 겁니까?”
“아,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하는군요. 조금 기다린 후에 입장이 가능하답니다.”
박상태의 말에 전승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일찍 오긴 했나 보군요.”
아직 수여식이 시작하는 시간까지는 한 시간가량 남아 있었다.
아직 기자들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너무 이르게 온 것 같았다.
“그럼 근처에서 커피나 한잔하면서 기다리시는 게……?”
대사관 앞에서 이렇게 멍하니 서 있는 것보다야 카페에 앉아서 시간을 죽이다 들어 가는 편이 더 나았다.
“그럼 그렇게 할까요?”
박상태 역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차라, 그들은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이 몸을 돌려 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에, 대사관 안쪽에서 누군가 나왔다.
“어디 가십니까?”
율리안이었다.
그는 갑자기 어딘가로 가려는 듯한 모습의 대원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 아직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커피나 좀 마시려던 참이었습니다.”
박상태가 나서서 율리안과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이런,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커피는 다음에 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이제 준비가 다 되어가거든요.”
때마침 손님을 받을 준비가 끝난 듯했다.
“그렇습니까?”
박상태가 살짝 반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전승철과 함께 있는 것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 했기 때문이었다.
수혁에게 그가 사과했고, 자신과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평판으로도 전승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박상태는 왠지 전승철이 껄끄러웠다.
수혁과의 문제도 해결된 마당이었으니 그런 감정의 원인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커피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박상태의 말에 전승철이 그러자며 대답하고는, 다같이 대사관 안으로 입장을 시작했다.
내부는 잘 꾸며져 있었다.
독일 하면 왠지 삭막한 느낌이었는데, 나름대로 조경도 훌륭했고 고급스런 느낌이 잘 전해져 왔다.
“식장은 이쪽입니다.”
율리안이 대원들을 이끌고 한쪽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몇 분 정도 걷자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 커 보이지는 않았지만, 행사를 치르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그 앞에는 훈장 수여식에 참관하는 빈객들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아직 준비가 다 끝난 게 아닌가 봅니다.”
박상태가 묻자 율리안이 머리를 긁적였다.
“서두른다고 하긴 했는데, 주한 대사관에서 훈장 수여식을 하는 게 처음이다 보니, 조금 시간이 걸리고 있는 것 같군요.”
사실 율리안도 그동안 훈장 수여식에 참여한 경험이 한 번밖에 없었다.
바로 자신이 훈장을 받을 때였다.
그러니 어떤 준비가 필요하고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잘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거의 끝난 것 같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리시죠.”
율리안은 일단 대원들을 데리고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와우!”
안으로 들어간 대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은 수여식이라고 해도, 사실 표창식이랑 그리 다를 것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슨 왕실 행사 같네.”
박정우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식장 안의 장식들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고, 작은 장식 하나조차 고급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훈장 수여식이니까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대원들과 다르게, 율리안은 이게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독일이 아닌 주한 대사관에서 치러지는 수여식이었으니, 언론을 의식해 더욱 공을 들인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만약 공로 십자장이 아니라 대공로 십자장 이상의 훈장이 수여되었더라면, 아마 대사관에서 수여식이 열리진 못했을 겁니다.”
대공로 십자장 이상이라면 무조건 독일에서 수여식이 열렸을 확률이 컸다.
그만큼 커다란 훈장이었으니까.
하지만 대공로 십자장이 독일인이 아닌 외국인에게 수여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럴 일이 발생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공로 십자장이 가치가 없는 건 아니죠.”
훈장을 수여받는다는 것 자체가 명예롭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니, 박상태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당연한 말입니다.”
함부르크에서 수없이 많은 생명을 살린 율리안이 받은 훈장도 공로 십자장이었다.
수혁은 독일에서 단 한 번의 출동을 하고, 율리안과 동급의 훈장을 수여받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이거 사람들이 꽤 많구만?”
그때 누군가 식장 안으로 들어오며 걸걸한 음성으로 감탄하는 것이 들려왔다.
대원들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거구의 중년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식장 안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미스터 지!”
그를 본 율리안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오랜만이군, 율리안.”
그는 바로 지양호였다.
수혁과 함께 오늘 훈장을 수여받는 주인공.
“한국에 왔으면 나부터 찾아왔어야지.”
“죄송합니다. 저도 어제 막 들어온 차라…….”
율리안이 미안하다는 듯 말하자, 지양호가 껄껄 웃었다.
“농담이네.”
거의 1년 만에 만나는 두 사람은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로 포옹했다.
“응? 이분들이 수혁이랑 같이 근무하는 분들이신가 보군?”
지양호는 그제야 신일서와 특수 구조대의 대원들을 발견하고는 아는 체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박상태가 가장 먼저 지양호에게 인사를 했다.
“어? 너 혹시 깡따구냐?”
지양호가 그런 박상태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깡따구라뇨. 제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박상태는 질색했다.
설마하니 지양호가 자신의 옛 별명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라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양호는 옛날 박상태가 소방 학교에 입학했을 당시의 교관이었다.
작은 체구의 박상태가 깡 하나는 그 누구 못지않게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깡따구라는 별명을 지어줬었다.
설마 10년도 넘은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쩐지 이름이 낯익다 했더니. 네가 수혁이네 팀장이었어?”
지양호는 ‘이런 우연이 있나?’ 하고 웃으며 박상태와 악수를 나누었다.
“수혁이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독일에서 신세를 많이 졌다고.”
“신세는 무슨, 오히려 내가 그놈 덕분에 어깨 좀 폈지.”
독일 소방관들의 피지컬에 연수 인원들이 기가 죽었을 때, 수혁이 아니었으면 망신만 당하고 돌아올 뻔했다.
“기운도 좋으십니다. 그 나이에 아직도 현역으로 뛰시다 훈장까지 받으시게 됐으니.”
“왜? 부럽냐?”
지양호가 껄껄- 웃었다.
“그런데 수혁이는 같이 안 왔어?”
그러다 정작 주인공인 수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지양호가 물었다.
“글쎄요. 지금은 다른 곳으로 지원 가서 제 소관이 아닌지라.”
박상태가 전승철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원?”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묻자, 전승철이 앞으로 나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배님. 저는 경기 남부 지역 특수 구조대 1팀의 팀장인 전승철이라고 합니다.”
전승철의 소개에 지양호가 흥미로운 기색을 내비쳤다.
전승철이 말한 특수 구조대는 이번에 소방관들 사이에서 꽤나 이슈가 됐던 조직이니까.
“반갑군. 그런데 특구가 여기는 왜……?”
흥미로운 건 흥미로운 거고, 특수 구조대의 팀장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기에 바로 물었다.
“김수혁이 지원을 온 게 바로 저희 팀입니다.”
“아아…….”
지양호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 언젠간 특구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게 지원으로 갈 거라곤 생각을 못 했어.”
“모집할 당시에는 수혁이가 병원에 있었습니다.”
지양호 역시 수혁의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문병을 가려고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방문 자체가 철저하게 금지되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놈 몸은 좀 어때?”
지양호가 박상태와 전승철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괴물도 그런 괴물이 또 없죠.”
“멀쩡합니다.”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러자 지양호가 씩- 하고 웃었다.
“다 나은 모양이구만. 하긴, 그 괴물 같은 놈이 쉽게 은퇴할 리가 없지.”
독일에서 지양호는 수혁이 얼마나 괴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직접 보고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피지컬을 지닌 괴물.
그런 괴물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말 자체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얼른 보고 싶은데,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지양호는 오랜만에 수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잔뜩 기대한 모습이었다.
“제가 그렇게 보고 싶으셨습니까?”
그때 기다렸다는 듯, 수혁의 음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