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14화
슈미츠는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사이에 주마등이 스쳐 지나갈 정도로 놀랐다.
그러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김갑수의 외침으로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긴 했지만,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금씩 끌어올려지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이대로 있다가 다시 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가 밀려왔다.
다시 본래 있던 10층까지 올라가는데 걸린 시간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슈미츠는 그것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괜찮냐?”
손을 뻗어 슈미츠를 붙잡은 뒤, 창문 안쪽으로 끌어당긴 김갑수가 물었다.
“괘, 괜찮습니다.”
슈미츠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물론 슈미츠는 전혀 괜찮은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은 핏기가 사라져 파리하게 질려 있었고, 손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이놈 맛 갔는데?”
김갑수는 새삼스레 슈미츠가 아직 소방 학교 학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놀랄 만한 일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이렇게 패닉에 빠질 정도의 일이냐고 물으면, 김갑수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현장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위험하고 심각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놀라고 두렵긴 하겠지만, 이렇게 정신 줄을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혹한 환경의 현장을 경험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많이 무뎌지기 때문이었다.
김갑수가 슈미츠를 보며 피식 웃었다.
왠지 저 커다란 덩치가 귀여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 만하죠. 갑자기 떨어져 죽을 뻔했는데.”
수혁 역시 김갑수와 같은 심정이었다.
자존심과 승부욕으로 똘똘 뭉쳐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았던 슈미츠가 저렇게 혼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제로는 열 살도 넘게 차이가 났으니, 귀여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놈은 첫 출동에 별의별 걸 다 겪었네.”
정식 소방관이 된 것도 아니었건만 화염 속을 뚫고 현장 진입을 했고, 직접 요구조자와 대면했으며, 건물에서 추락해서 죽을 뻔했다.
이 정도면 첫 출동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겪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성격이 좀 꺾였으면 좋겠는데요.”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그 잠깐 사이 무엇을 느꼈는지에 따라 바뀔 수도, 그대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갑수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실습이 예정되어 있는 10일 중 이제 1일 차다.
너무 급하게 하지 않아도, 현장에서 구르다 보면 느끼는 점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팀워크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들어가 있을 테고.
“정신 차려라.”
슈미츠에게 다가간 수혁이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쳤다.
가볍게 몇 번 친 정도였지만 워낙 수혁의 손이 매웠는지라, 금세 슈미츠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아!”
정신을 차린 슈미츠는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자신의 몸을 살피며, 정말로 무사한지 확인했다.
“꼴값 떨고 있네.”
김갑수가 그런 슈미츠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덩치는 산만 한게 무슨 겁이 그렇게 많아?”
독일인.
거기다 유난히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였는지라 거리감이 좀 느껴졌는데, 이번 일로 갑자기 친근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전까지는 손님이라는 이미지였다면, 지금은 정말 막내가 들어온 듯했다.
김갑수에게 머리를 맞은 슈미츠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런 인사 방식이 익숙하지 않아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슈미츠가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전해졌다.
“됐고, 일단 장비부터 벗어.”
김갑수는 슈미츠에게 아직도 달고 있는 완강기의 로프와 장치를 벗으라고 명령했다.
잠시 분위기가 풀리긴 했지만, 사실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요?”
수혁이 김갑수에게 물었다.
불길은 지척까지 다가왔다.
화재 진압은 아직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불길에 집어삼켜질 것이다.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 것이 아니라면…….
“그냥 뚫고 가는 수밖에.”
다행히 이젠 요구조자도 없었다.
방화복을 입고 있는 구조대원 세 명이 전부였으니, 이대로 불 속으로 뛰어들어 뚫어버리는 방법밖에는 남지 않았다.
위험천만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수혁은 ‘미니 맵’을 실행했다.
현재 자신들과 화재진압대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확인한 것이다.
‘음…….’
생각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 정도라면 자신이나 김갑수면 몰라도, 슈미츠에겐 버거울 정도의 거리였다.
‘실드를 쓰면?’
슈미츠의 옆에서 ‘실드’를 사용한다면 정말 손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엄청난 후폭풍에 휘말릴 게 뻔했기에, 그 방법은 정말 위험할 때 쓰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남은 방법이 몇 가지 더 있긴 했다.
슈미츠와 김갑수를 완강기의 로프에 묶어 수혁이 손으로 내려주는 것.
하지만 그 방법은 김갑수가 절대로 반대할 것이다.
아니, 방금 떨어져 죽을 뻔한 슈미츠 역시 극렬하게 반대할 게 분명했다.
다음으로는 아직 옥상에 남아 있는 대원들이 로프를 내려주고, 레펠로 내려가거나 올라가는 방법.
하지만 이 방법 역시 슈미츠는 불가능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다면 몰라도 지금 당장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다.
‘결국은 그냥 달릴 수밖에 없다는 건데…….’
수혁이 김갑수를 쳐다봤다.
“그 방법밖에는 없네요.”
수혁이 김갑수의 의견에 동의했다.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다른 방법을 쓰는 것보단 이게 훨씬 낫다.
‘아까 놓아둔 호스가 아직 무사하다면 좋겠지만…….’
그렇다면 탈출이 훨씬 용이해진다.
30초 남짓만 불길을 뚫고 간다면 호스를 이용해 엄호 방수를 할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호스가 지금까지 무사할 가능성은 적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불길 속에 있었으니, 아무리 내화성 재질로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탈출 방법이 결정되자, 김갑수가 슈미츠에게 설명했다.
불 속으로 들어가 뚫고 갈 것이라는 말에 슈미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지금은 로프에 매달리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두려워했었음에도, 지금은 차라리 그 방법을 선택해 준 두 사람에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좋아, 준비해.”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수혁이 안내를 자처했고, 슈미츠가 중간, 그리고 김갑수가 마지막에 서서 달리기로 했다.
그래야 중간에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해도 대처할 수 있었다.
“셋, 둘, 하나, 뛰어!”
김갑수의 구호와 함께 수혁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왼쪽.’
‘미니 맵’을 실행시킨 수혁은, 복잡한 상가 내부의 복도 중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을 찾아 달렸다.
후끈후끈한 열기가 몰려왔다.
아니, 열기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화염이 세 사람을 집어삼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조심!”
수혁이 한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자, 뒤를 따르던 둘이 그곳을 피했다.
넘실대는 불길이 본래 슈미츠가 향하고 있던 곳을 덮쳤다.
그것을 본 슈미츠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쫙하고 흘렀다.
자신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만약 수혁이 경고해 주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을 것이다.
죽을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큰 화상을 입기엔 충분했다.
‘……어떻게?’
자신은 눈치도 채지 못한 것을, 대체 수혁은 어떻게 알고 미리 경고한 것일까?
한 번뿐이었다면, 그저 운이 좋아 발견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혁의 경고는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위쪽!”
수혁이 위를 가리키면 화재로 약해진 천장이 무너져 내렸고, 바닥을 가리키면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장애물들이 나타났다.
화염으로 가득한 복도 사이를 달리며 대체 어떻게 그런 것들을 모두 찾아낼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단하다.’
슈미츠는 다시 한 번 수혁의 능력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인정하는 것을 넘어 존경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나도 언젠간…….’
저런 소방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깨달은 슈미츠가 흠칫했다.
왠지 다시 한 번 짙은 패배감이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강하게 느끼고 있던 질투심은 꽤나 옅어져 있었다.
슈미츠는 그것을 인지하고 있지 못했지만 말이다.
“조심해!”
다시 한 번 수혁의 경고가 울려 퍼졌고, 덕분에 슈미츠는 이번에도 위험한 상황을 넘겼다.
그렇게 셋은 빠르게 불길을 뚫고 나아갔다.
“괜찮아?”
다니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슈미츠에게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슈미츠는 짐짓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상가 건물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들은 다니엘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했다.
“너 죽을 뻔했다며.”
“누가 그래?”
“김수혁 교관님이.”
다니엘의 말에 발끈했던 슈미츠가, 수혁의 이름이 나오자 입을 다물었다.
지금 슈미츠에게 수혁이란 사람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대상이었다.
분명 싫었다.
질투도 났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수혁이 존경스러워지고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아.”
슈미츠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의 마음을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 조금 위험했던 건 사실인데, 정말로 별일 아니었어.”
슈미츠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니엘에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다니엘 역시 슈미츠가 계속해서 괜찮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충 슈미츠가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정확한 사정은 듣지 못했다.
수혁과 김갑수가 거기까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걱정과 함께 호기심도 같이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하루종일 옥상에서 대기만 하고 있었는데, 동기인 슈미츠는 현장 경험을 제대로 했다는 것이 조금 부럽기도 했고.
그런데 슈미츠가 다니엘의 질문에 얼굴을 굳혔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경험.
그토록 자신만만해 하던 슈미츠가 주눅이 들 정도로 충격적인 경험의 연속이었다.
그것을 대체 무슨 말로 표현을 해야 할까?
슈미츠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떠올리기도 싫어?”
죽을 뻔한 경험을 했다니, 다니엘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
고개를 저은 슈미츠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가장 겪고 싶지 않은 경험과 가장 닮고 싶은 걸 동시에 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하지만 다니엘은 슈미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긴, 그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이해하지 못할 만했다.
그래서 슈미츠는 쓰게 웃었다.
“너도 앞으로 겪어보면 알 거야. 무슨 말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