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61화
길 한복판에서 커다란 덩치의 두 사람이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니, 경찰이 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경찰이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순찰을 돌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상황에 급히 걸음을 옮긴 것이다.
그러다 경찰은 톰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긴장을 풀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어이, 톰. 무슨 일이야?”
경찰은 뉴욕 소방서의 구조대장인 톰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뉴욕의 안전을 책임지는 두 기관이었는지라, 서로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수혁 역시 웬만한 경찰들과는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오랜만이군.”
톰 역시 잠깐 굳어졌다가, 경찰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 동양인이 시비를 걸어?”
경찰은 수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톰에게 물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네. 그냥 내가 오해를 좀 해서.”
“오해?”
“아무것도 아니야.”
톰은 고개를 저으며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지만, 경찰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관광객?”
경찰은 고압적인 태도로 수혁에게 질문했다.
‘쯧.’
망했다.
미국에서 경찰의 공권력은 엄청나다고 들었다.
한국처럼 대응했다간 총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이런 경우에는 순순히 경찰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떠올린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여권 좀 봅시다.”
“이봐, 리오. 방금 전 일은 내 실수로 벌어진…….”
“잠깐 기다려.”
톰이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리오라 불린 경찰관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심심한데 잘 걸렸다’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잘못 걸린 듯했다.
“…호텔에 놓고 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수혁은 여권을 호텔에 두고 나온 상태였다.
“서로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이유는요?”
분위기가 조금 험악하긴 했지만, 실제로 싸움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누군가 신고를 한 것도 아니었고.
그러니 경찰이 수혁을 경찰서로 연행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봐, 리오. 내가 오해라고 하지 않았나?”
“이건 내 일이야. 나서지 마, 같이 연행되고 싶지 않으면.”
리오가 톰을 향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둘은 안면이 있는 사이가 맞았지만, 그것이 꼭 친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실제로 경찰과 소방관이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는 흔했다.
오죽하면 미국에서는 구조하고 있던 소방관을, 길가에 구조차를 주차했다는 이유로 경찰이 체포한 적도 있었다.
톰과 리오는 그 정도로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톰은 리오의 말에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수혁 역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전화 한 통 해도 됩니까?”
수혁은 제임스에게 이 상황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오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일단은 서로 가서 이야기합시다.”
아무래도 된통 걸린 듯했다.
수혁은 결국 리오와 함께 순찰차에 올랐다.
톰이 계속해서 리오를 말려보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써서…….”
톰이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수혁에게 사과했다.
자신의 오해로 벌어진 일이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수혁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을 가르쳐 주었다.
“거기 가서 제임스라는 가이드를 찾으세요. 그리고 제 상황을 이야기하면 도움을 줄 겁니다.”
“제임스. 알겠습니다.”
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리오는 순찰차의 문을 닫고는 톰을 향해 웃어 보였다.
얄밉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그럼 나는 이 불법체류자일지도 모르는 동양인을 데리고 가보도록 하지.”
리오는 휘파람을 불며 차를 몰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톰은 잠시 자리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1초라도 빨리 제임스라는 사람을 찾아 이 상황을 알려야만 했다.
“코리아?”
수혁은 책상에 앉아 마치 죄수 취급을 받으며 질문 공세를 받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북쪽? 남쪽?”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질문의 대부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방문 목적은?”
“관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일자리를 구하러 온 건 아니고?”
노골적으로 비꼬는 듯한 질문에 수혁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자 리오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질문을 계속했다.
“언제 도착했지?”
“어제.”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고?”
“2주 정도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여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야.”
“후우.”
수혁은 치솟는 화를 간신히 억눌렀다.
마음 같아선 주먹으로 한 대 갈기고 싶을 정도였다.
수혁이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짐한테 미안한데.’
바쁜 사람을 보스턴에서 뉴욕까지 불러놓고, 정작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짐 머레이에게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조급해졌다.
바로 내일 테러가 일어날 텐데, 이런 곳에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전화는 언제 쓰게 해줄 겁니까?”
수혁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때가 되면 알아서 쓰게 해줄 테니까, 일단은 질문에 대답부터 해.”
리오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수혁을 괴롭힐 생각인 듯했다.
“이거 나중에 정식으로 항의할 겁니다.”
“그러시던가.”
리오가 귓구멍을 파며,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이 웃었다.
‘아오.’
수혁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제임스는 찾았으려나?’
이렇게 전화 연결을 시켜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톰에게 부탁하길 잘했다.
다만, 얼마나 걸릴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 최은송을 가이드하며 관광하기로 했으니, 호텔에 없을 확률이 높았다.
만약 그렇다면 톰이 제임스를 찾는 데 오래 걸릴 수도 있었다.
그럼 짐 머레이는 홀로 약속 장소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테고.
자신이 오지 않으면 이쪽으로 전화를 하겠지만, 리오가 스마트폰 자체를 압수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전원까지 꺼놔서 기대할 수가 없었다.
‘결국은 그 톰이라는 양반이 빨리 제임스를 찾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군.’
수혁이 눈을 감았다.
일이 꼬이려니 이런 식으로 꼬인다.
“지금 잠이 오나?”
수혁이 눈을 감고 있자, 다시 한 번 리오가 비꼬았다.
수혁이 더는 화를 참지 못했다.
눈을 번쩍- 뜨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데, 누군가 경찰서 안으로 들어오며 수혁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혁 씨!”
리오의 책상을 뒤집어엎으려던 수혁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몸에서 힘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임스.”
그토록 기다리던 제임스였다.
그는 어찌나 서둘렀는지, 숨을 헐떡이며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제임스의 뒤로 최은송과 톰의 모습도 보였다.
셋은 수혁을 확인하고는 달리듯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대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괜찮아요?”
제임스와 최은송이 수혁을 향해 걱정 섞인 질문을 쏟아냈다.
“네. 아직까진 별일 없어요, 조금 더 늦었으면 모르겠지만.”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 뭐야?”
리오가 인상을 쓰며 거칠게 물었다.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제임스가 그런 리오를 홱 돌아봤다.
“이분의 여권입니다.”
그러곤 이를 갈며 품에서 수혁의 여권을 꺼냈다.
“여권? 봅시다.”
제임스의 손에서 여권을 받아 든 리오는 천천히 그것을 확인했다.
“흠.”
문제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리오는 어떻게든 딴지를 걸어보려 했지만, 마땅한 이유가 생각나질 않았다.
리오가 혀를 찼다.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여권이 있으니, 더는 수혁을 붙잡고 있을 만한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여권을 돌려줬다.
“그럼 이제 다른 사안에 대해서 얘길 해보자고.”
“다른 사안?”
수혁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자, 리오가 웃으며 책상을 두들겼다.
“아까 톰이랑 벌어졌던 일 말이야.”
“리오, 그건 아까 분명 내가 해명을 했을 텐데?”
“나는 이 동양인한테 물었어.”
헛웃음이 났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의 행동은 분명 문제가 될 겁니다.”
제임스가 얼굴을 굳히며 경고했지만, 리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때였다.
“리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갑자기 뚱뚱한 경찰 한 명이 리오에게 소리를 질렀다.
“…서장님?”
리오가 뜨악! 하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장?’
뚱뚱한 경찰의 정체는 이 경찰서의 서장인 듯했다.
“너 이 새끼!”
서장은 콧김을 뿜으며 리오에게 삿대질을 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리오는 영문을 알 수가 없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뭐? 왜 그러십니까?”
순식간에 곁으로 다가온 서장이 어이없다는 듯, 리오를 노려보다 수혁을 가리켰다.
“이분이 뉘신 줄 알고 이따위 짓을 해?”
서장의 말에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리오는 말할 것도 없었고, 수혁과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혁이 제임스를 쳐다봤다.
혹시 무슨 조치를 취했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톰에게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장 이곳으로 다가온 것이기에 뭔가를 할 새도 없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짐 머레이에게 연락을 한 것밖에…….
“아!”
제임스가 탄성을 내뱉었다.
분명 짐 머레이가 뭔가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사과해! 그리고 당장 풀어드려!”
서장은 뭐가 그렇게 두려운지, 눈동자가 마구 떨고 있었다.
“하지만…….”
리오는 머뭇거렸다.
도대체 서장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 자신보다 더 악질적인 일을 일삼던 서장이 고작 놀러온 동양인 한 명 좀 괴롭혔다고 이렇게 떠는 것이 이상했다.
‘설마 정말로 대단한 사람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순순히 잡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장이 벌벌 떨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면, 서로 데려오기도 전에 자신을 막는 이들이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얼른 사과 안 해?”
서장의 불같은 분노에 리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하게 됐소.”
어이가 없었다.
저게 지금 사과라고 하는 것인지…….
지금까지 괴롭힘당한 걸 생각하면 조금 더 제대로 된 사과를 받고 싶었다.
고작 저따위 사과를 받는 것으로는 화가 가라앉질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얼른 짐 머레이와 만나 내일 있을 일을 상의해야만 했다.
수혁은 이를 악물고 그의 성의 없는 사과를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그딴 걸 사과라고 하는 건가?”
갑작스런 세 번째 방문자.
수혁과 최은송, 그리고 제임스의 얼굴에 반가움이 떠올랐고, 반대로 서장의 얼굴은 새까맣게 죽었다.
“짐!”
짐 머레이였다.
그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수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미안하네. 그리고 이런 더러운 경험을 한 것도 미안하고.”
머리를 들고 리오와 서장을 노려보는 짐 머레이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