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10화
수혁은 일단 먼지로 뒤범벅이 된 옷을 벗고 씻었다.
그러고는 곧장 박상태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노크를 해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직 안 올라온 건가?’
수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팀장들과 이야기 할 것이 있다고 하더니, 아직 로비에 있는 것 같았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어? 상태 형.”
때마침 박상태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문 앞에 서 있었다.
“어디 가냐?”
“잠깐 형하고 할 말이 있어서요.”
수혁은 그렇게 말을 하며 뒤에 있는 팀장들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얘긴데? 급해?”
“급한 건 아니고요. 일단 씻고 내려오세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박상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너무 찝찝해 좀 씻고 싶었던 것이다.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팀장들은 엘리베이터를 타며, 수혁에게 눈인사를 했다.
한국 구조팀 내에서 수혁의 위치는 독보적이었다.
지금까지 구조한 요구조자의 수는 여덟 명.
그리고 그 여덟 명은 모두 수혁이 발견하고 구조까지 해냈다.
덕분에 독일 내에서 한국 구조팀의 위상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언론에서는 연일 수혁과 한국을 칭찬했고, 어딜 가든 감사 인사와 함께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러니 수혁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수밖에.
수혁 역시 팀장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로비로 향했다.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프런트 직원 중 한 명이었다.
“김수혁 씨.”
직원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수혁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커피잔이 들려져 있었다.
“커피를 준비했습니다.”
수혁이 부탁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숙소의 직원들은 편의를 최대한 봐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 커피도 그 노력 중 하나였다.
“아, 감사합니다.”
수혁이 어색하게 웃으며 커피를 받아 들었다.
“그럼 편히 쉬세요.”
직원은 수혁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커피만 주고 돌아갔다.
그런 직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수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과도한 배려가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미국에서 받는 영웅 취급보단, 이런 소소한 배려가 더 좋았다.
수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창밖을 쳐다봤다.
여전히 밖에는 기자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을 보며 수혁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지휘권을 가져올 수 있을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 안 되면 한국의 지휘권만이라도 가져와야 할 텐데.’
한국 구조팀의 대원은 약 80명.
부족한 수이긴 하지만 그 정도라면 꽤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전체 지휘권은 무리일 테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은 방법이 없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영웅이잖아?”
수혁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어색한 영어가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뭐지?’
그것이 자신을 향한 비꼼이라는 것을 눈치챈 수혁이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몇 명의 동양인이 수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국인은 아니고.’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한국 사람이었다면 수혁을 향해 영어로 말을 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지.’
일본 구조팀.
저들은 일본 구조팀의 대원들이 확실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일본 구조팀도 머물고 있었지.’
그들은 쉬다가 밥을 먹으려고 내려온 것인지, 편한 옷차림이었다.
“나에게 한 말입니까?”
수혁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들 중 한 명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영웅이라는 부끄러운 별명으로 불릴 사람이 또 있나?”
그 말을 들은 수혁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게 분명했다.
“그 별명은 좀 불편하군요.”
수혁이 더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는 뜻을 간접적으로 전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다.
그것은 이전 생에서의 경험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오늘 일어났던 일 때문이었다.
‘율리안이 먼저 나서게 한 게 후회되네.’
만약 수혁이 직접 나섰더라면, 지금 저들은 이렇게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설설 기었을 것이다.
‘아니, 그 반대인가?’
지금보다 더 적대적으로 나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가정이야 어떠하든, 이젠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생각할 게 많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저런 질 떨어지는 장난에 어울려 줄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 대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에게 영웅담이나 좀 들려주지 그래?”
그들은 허락도 없이 수혁의 앞자리에 앉았다.
‘이건 뭐, 깡패 새끼들도 아니고.’
그들은 마치 야쿠자라도 된 것처럼 껄렁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수혁을 내려다봤다.
그 한심한 모습에 코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참자, 참아.’
마음 같아선 얼굴에 주먹 한 방씩 꽂아버리고 싶었다.
율리안이 이와타의 얼굴을 뭉개긴 했지만, 일본을 향한 앙금이 아직 풀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이놈들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아질 테니.’
내일, 혹은 모레쯤에 다시 한 번 참혹한 재난이 터진다.
이런 곳에서 괜히 척을 졌다가, 구조하는데 삐걱거리기라도 한다면 애꿎은 요구조자들만 희생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지금 숙소 밖에는 기자들이 한가득이었다.
잘은 안 보였지만, 이쪽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 주먹이라도 날리면…….
‘내일 아침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겠지.’
마치 율리안처럼 말이다.
별로 원하는 그림은 아니었다.
그래서 수혁은 참았다.
그 모습에 일본 대원들이 착각하기 시작했다.
수혁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커피만 마시자, 자신들에게 겁을 먹은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의기양양해진 그들이 수혁을 비웃었다.
“왜 말이 없지? 우리와는 별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 건가?”
수혁의 입장에선 같잖은 착각이었다.
저들이 다섯 명이나 되긴 했지만, 솔직히 수혁은 1분도 되지 않아 모조리 병원 신세를 만들 자신이 있었다.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군요. 조금 해야 할 생각이 있으니, 나중에 다시 찾아오시죠. 이야기라면 그때 해드릴 테니.”
수혁은 점잖게 말했다.
더는 너희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그러지 말고 오늘 있었던 일이나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좀…….”
“김수혁.”
계속해서 수혁에게 시비를 걸던 대원의 입이 다물어졌다.
어느새 씻고 내려온 박상태가 그의 말을 끊은 것이다.
“아, 상태 형. 빨리 내려오셨네요.”
“좀 급한 거 같아서. 그런데 얘들은 뭐냐?”
“일본 애들인데, 아까부터 계속 시비 걸고 있네요.”
수혁의 말에 박상태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들을 돌아봤다.
“뒈지려면 뭔 짓을 못할까.”
그가 본 수혁은 사람이 아니다.
수백 킬로가 넘는 돌덩이들을 혼자 번쩍번쩍 드는 놈이다.
그런 수혁이 마음먹고 사람을 치면 뼈 한두 군데 부러지는 것으론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박상태는 일본 대원들을 한심하다 못해 불쌍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수혁과 박상태가 서로 한국말로 말을 했기에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던 그들은, 박상태의 눈빛을 보고는 발끈한 표정을 지었다.
“뭡니까?”
물론 박상태는 그들의 태도에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할 말만 했다.
“지금부터 둘이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 좀 비켜주시죠.”
“여기가 당신들의 것도 아닌데 왜 우리가 자리를 비켜야 하…….”
“싫으면 말고. 우리가 가면 되지.”
박상태는 다시 한 번 말을 끊었다.
“카페로 가자. 거기가 낫겠네.”
“그게 좋겠네요.”
수혁이 커피잔을 들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건 뭐냐?”
“직원분이 가져다주시더라고요.”
“아주 VIP가 따로 없네.”
박상태가 픽-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자리를 떴다.
일본 대원들에게는 처음부터 전혀 관심도 없었다는 듯이.
두 사람이 떠나자 닭 쫓던 개꼴이 된 다섯 명의 대원이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조센징들이…….”
그들은 이와타가 왜 율리안에게 맞았는지 이유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수혁과 한국 구조팀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는 상태였다.
때린 당사자인 율리안에게는 한마디도 못 하는 주제에, 수혁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 웃기기 그지없었다.
“두고 보자.”
지금까진 그저 수혁보다 더 뛰어난 업적을 세우기 위해 행동했다면, 지금부턴 조금 다르게 움직이기로 했다.
적극적으로 수혁을 방해하기로.
“무슨 일이냐? 쉬지도 않고 날 이렇게 따로 불러서 얘기할 정도면 좀 심각한 내용인 거 같은데.”
박상태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시키고는 곧장 물었다.
아무래도 그가 빨리 내려온 것은, 수혁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심각한 일 맞아요.”
수혁은 부정하지 않았다.
“뭔데?”
지금까지 수혁이 심각한 표정을 지은 것은 많이 봐왔다.
수많은 현장에 같이 출동하면서 수혁이 저런 표정을 지었을 땐 무조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자연히 긴장이 되었다.
수혁은 남은 커피를 한 번에 털어 넣고는, 입을 열었다.
“테러가 또 일어날 겁니다.”
“……뭐?”
박상태가 눈을 부릅떴다.
솔직히 아까의 일을 보고, 수혁이 내심 일본 대원들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오늘 하루 일어난 일을 그도 바로 옆에서 지켜봐 왔으니까.
그런데 수혁이 꺼낸 말은 그의 상상력을 아득히 벗어난 것이었다.
“테러가 또 일어난……!”
“쉿!”
수혁은 손을 들어 박상태의 입을 막았다.
그러곤 카페 안을 재빨리 살폈다.
다행히 둘의 대화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카페 직원 중 몇 명은 들은 것 같기도 했지만, 한국말이라 이해하지 못한 듯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수혁이 조용히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들으면 안 돼요.”
“미, 미안하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던 박상태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런데 테러라니?”
“아까 짐하고 연락한 거 보셨죠?”
박상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들었어요. 미국에서 정보를 입수했다고 해요.”
미국이라는 말에 박상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미국의 정보력이라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언제 일어난다디? 그건 밝혀냈고?”
“아마도 내일이나 모레쯤에 일어날 확률이 높대요.”
헛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이제 간신히 충격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는데, 또다시 테러라니.
독일 사람들이 느낄 충격이 어떨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형.”
수혁이 조심스럽게 박상태를 불렀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수혁의 모습에 박상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말해. 뭔데?”
박상태가 턱짓하자, 수혁이 말했다.
“지휘권이 필요해요.”
“다시 말해봐.”
박상태는 수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곤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한국 구조팀의 지휘권. 그게 필요해요,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