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52화
수혁은 당황한 낯빛으로 눈을 끔뻑였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정말이지 여기서 볼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여, 여긴 어떻게?”
어찌나 당황했는지, 절로 말을 더듬을 정도였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웬 외국인이 찾아왔나 싶었는데, 수혁과 알고 있는 사이처럼 보였으니 가만히 서서 둘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만 있었다.
“일단 인사부터 하지.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네.”
케인 로저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수혁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아, 네. 오랜만입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악수를 나누자 케인 로저스가 빙긋- 웃었다.
“많이 당황한 모양이군.”
“그럴 수밖에요.”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 로저스가 한국에 와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설사 대통령과 함께 왔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방문할 이유는 없었다.
‘차라리 톰이 왔다고 하면 덜 놀랐을 텐데.’
짐 머레이로부터 톰이 한국에 간다는 사실을 이미 들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케인 로저스는 정말 상상도 못 해봤다.
“이분들은 자네 동료인가 보군.”
케인 로저스가 수혁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전승철과 강병규를 보고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갑자기 들이닥쳐 죄송합니다. 저는 이번에 미국에서 대통령님을 모시고 방한한 보좌관 중 한 명입니다.”
케인 로저스는 자신을 NSA의 국장이 아닌, 보좌관이라고 소개했다.
딱히 비밀이랄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떠벌리고 다닐 사실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의 보좌관이라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 때문에 오셨나 보군요.”
전승철이 수혁의 손에 있는 공문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은 케인 로저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수혁 씨를 잠시 빌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죠. 아직 업무 시작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으니.”
“감사합니다.”
전승철을 향해 감사 인사를 한 케인 로저스가 수혁을 향해 따라오라는 듯 눈짓했다.
하지만 수혁은 굳이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케인 로저스는 꽤나 불편한 존재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수혁을 ‘영웅’으로 만들었던 사람도 그였고, 미국 명예시민을 받게 한 것도 그였다.
‘아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온 것도 저 사람이 한 짓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 정도였다.
사실은 그 반대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수혁에게 케인 로저스는 가까이 해봐야 별로 좋은 꼴을 보지 못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미국에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다.
아무리 귀찮다고 해도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어디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휴게실로 가시죠.”
멀리서 온 사람이었으니 카페 같은 곳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건물 밖에는 아직도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아이고.’
기자들을 떠올리니 또 골치가 아파졌다.
그들은 케인 로저스가 누구인지 모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뿐.
분명 수혁을 찾아온 외국인의 정체가 궁금해 여기저기 알아볼 게 뻔했다.
얼마 안 있으면 케인 로저스의 정체를 알아낼 것이고, 그러면 또 기사가 엄청나게 쏟아지겠지.
수혁은 한숨을 내쉬며 케인 로저스를 휴게실로 안내했다.
무려 미국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NSA의 국장과 독대하기에는 조금 초라한 장소였지만, 수혁은 신경쓰지 않았다.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게 해줄 대접으로는 말이다.
사람 몇 명 앉으면 끝날 정도로 협소한 장소.
케인 로저스는 휴게실 안을 잠시 둘러보더니 의자에 털썩 앉았다.
“시설이 조금 열악하군.”
미국 소방서에 비하자면 말이다.
소방관들에 대한 예우와 복지가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미국이었으니, 그 말에 딱히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잠깐 쉬기엔 괜찮습니다. 커피?”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는 묻자, 케인 로저스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하긴, 저런 고위급 인사가 자판기 밀크커피 같은 걸 입에나 댈까?
수혁은 괜히 입술을 삐죽이며 자신의 커피만 뽑았다.
“연락도 없이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수혁이 약간의 질책을 담아 말하자 케인 로저스가 픽- 웃었다.
“자네가 오질 않으니 나라도 와야 하지 않겠나?”
미국으로 오라는 말을 거절했던 것을 끄집어내자, 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잘 아실 텐데.”
“물론이네.”
미국의 명예시민증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간접적인 것도 아니고 대놓고 표현한 것이었다.
그것을 못 알아들을 케인 로저스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나도 월급 받는 몸.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에 수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신이 결정한 일이 아니란 뜻입니까?”
“뭐를? 아, 이번 방한 말인가?”
케인 로저스는 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를 과대평가해 주는 건 고맙네만, 나는 그럴 권한이 없다네.”
NSA의 국장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대통령을 움직일 정도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 말은?”
“당연히 대통령의 뜻이었네.”
“허……!”
수혁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당연히 케인 로저스가 뒤에서 꾸민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니?
“나도 자네만큼 놀랐네. 워낙 서프라이즈를 좋아하는 분이라서 말이지.”
케인 로저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대통령의 충동적인 결정에 얼마나 힘들었던가?
지난 2주간은 정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정도였다.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대통령의 방한은 이미 성사되었으니, 굳이 지난 일을 들먹일 필요는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이걸 받게.”
케인 로저스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수혁에게 건네주었다.
“……스마트폰?”
갑자기 이건 왜 준단 말인가?
“저도 있습니다만.”
그것도 이것보다 최신 기종이.
“대통령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물건이네.”
한국 대통령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케인 로저스가 준 것이니 당연히 미국 대통령과의 직통 전화가 가능한 스마트폰이라는 건데…….
“이걸 왜?”
수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미국 대통령과 할 말이 뭐가 있단 말인가?
아니, 설령 있다고 해도 이상했다.
미국 대통령쯤 되면 수혁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울 텐데, 굳이 새로운 스마트폰을 보낼 이유가 있나?
“보안 문제 때문일세. 그 정도의 위치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면, 보안에 유의해야 하니까.”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도청 불가능한 전화 같은 물건 말이다.
‘보통 스파이 영화에서 나왔지?’
그런 스마트폰을 자신이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걸 써야 될 정도로 긴히 할 말이 있다는 겁니까?”
수혁이 부담스럽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케인 로저스는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진 알겠네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네. 그저 주의를 기울이는 것뿐이니까.”
현재 세계는 테러의 공포에 빠져 있었다.
미국은 물론이고, 이젠 유럽까지.
그런 상황이었으니, 사전에 문제될 소지가 있는 모든 불안 요소를 차단해야만 했다.
수혁에게 건네준 스마트폰도 그 일환의 한 가지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수혁과의 통화가 누군가에게 도청된다면?
그리고 통화 내용 중 보안에 틈이 생길 정도의 정보가 유출된다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이걸 주려고 여기까지 왔단 말입니까?”
수혁이 헛웃음을 지으며 스마트폰을 품에 넣었다.
“겸사겸사. 자네 얼굴도 한번 볼 겸해서.”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수혁이 선을 긋자, 케인 로저스가 뺨을 긁적였다.
그 말이 틀리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수혁은 그를 불편해했고, 케인 로저스 역시 수혁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얼굴을 맞댄 상태로 이렇게 직설적인 표현을 들을 줄은 몰랐지만.
케인 로저스는 민망함에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짐에게 이야기는 들었나?”
“무슨 이야기 말입니까?”
“그 녀석이 계획하고 있는 단체 말이네.”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 근래 가장 많이 신경쓰고 있는 부분이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명예시민증 수여 따위보다 훨씬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 단체에 우리 미국도 한발 집어넣기로 했다네.”
수혁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건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수혁이 생각하고 있는 단체는, 그 어떤 국가에게도 소속되지 않아야만 했다.
만약 한 국가에 속하게 된다면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미국이라면?
‘미국의 재난에 우선적으로 대처해야겠지.’
만약 중국에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더라도, 미국의 교통사고에 우선 적으로 출동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수혁과 짐 머레이가 구상하는 단체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혁의 표정을 본 것일까?
케인 로저스가 손을 내저었다.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네만, 자네가 생각하는 방향은 아니네.”
이어지는 케인 로저스의 말은 수혁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미국은 말 그대로 지원 역할을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사실 단체 설립에는 많은 난관이 있었다.
돈과 사람이야 짐 머레이가 해결한다고 해도, 남은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입국이겠지.”
세계에는 다양한 비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해당 국가의 비자가 없으면 입국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여권 파워가 강하다면 괜찮겠지만, 그것도 만능은 아니었다.
그뿐인가?
장비 이송에 관한 문제도 있었다.
사람을 구하려면 장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장비들을 이동하려면 여러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것들은 꽤나 복잡해서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 외에도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는데…….
“그것들을 해결해 주겠다는 뜻이네.”
케인 로저스, 아니, 미국은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수혁이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단체 설립을 위해 할 일이 많다는 것은 막연히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그냥 짐 머레이에게만 맡겨뒀다.
그런 부분을 잘 모르기도 했고, 짐 머레이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만 모아서 되는 일이 아니었네.’
수혁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박상태와 손민준을 끌어들였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부터 남은 것들은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고 복잡한 것들뿐이었다.
“짐하고는 이야기가 된 건가요?”
수혁이 물었다.
“물론이네.”
“짐도 받아들인 거고요?”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지.”
수혁은 잠시 고민하다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겁니까?”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이해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도와준단 말인가?
수혁의 물음에 케인 로저스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내일모레면 자네도 미국의 시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