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53화
케인 로저스가 다녀간 지 하루가 지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와의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다른 건 둘째치고, 미국이 한발 걸치겠다는 사실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한데…….’
수혁은 일을 너무 단순하게만 생각했다.
짐 머레이의 재력과 능력이라면 충분히 단체를 설립하고도 남을 것이라 여겼는데,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짐 머레이가 총력을 다해 해결하고자 했다면, 방법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직접 나서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은 없었다.
짐 머레이 역시 그것을 인정했다.
만약 미국의 도움을 거절한다면, 생각보다 일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수혁은 그리 급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길 했지만, 짐 머레이는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단체를 설립하고, 틀을 잡아놔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은 수혁을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자신 때문이기도 했다.
짐 머레이의 살아온 세월이 결코 짧지 않았기에.
“하아.”
수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짐 머레이는 확언을 해주었다.
미국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그것에 대한 대가로 그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말 그대로 선의의 도움에 불과하다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과연 미국의 말을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짐 머레이의 말을 따르는 것 외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 일의 주체는 그였으니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좋은 뜻으로 시작을 한 짐 머레이의 의도가 변질되지나 않을지…….
“무슨 고민 있나?”
“아, 팀장님.”
수혁이 책상에 앉아 계속 한숨만 쉬고 있자, 전승철이 다가오며 물었다.
“어제부터 계속 고민 중인 것 같던데.”
정확히는 케인 로저스라는 외국인과 이야기를 나눈 뒤부터.
“무슨 안 좋은 말이라도 들었나?”
“그런 건 아닙니다.”
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미국이라는 국가만 뚝 떼어놓고 생각을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단체 설립이 훨씬 수월해졌으며, 엄청난 자금력과 힘을 통한 지원이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전승철은 수혁을 가만히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을 굳이 캐묻는 취미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내일이군.”
마침내 미국의 명예시민증 수여식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모여서 같이 가기로 했는데, 너는 따로 가겠지?”
“그렇습니다. 차를 보내준다고 하더군요.”
“2팀에게 미안하게 됐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내일은 1팀 근무 날이다.
그런데 전원 수여식에 참석하라는 공문이 내려와 어쩔 수 없이 비번인 2팀과 근무를 바꾸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휴일 계획을 모두 세워두었던 2팀은 난리가 났다.
하지만 어딘지도 모를 저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내려온 명령을 무시할 수도 없는 법.
결국 2팀은 1팀을 대신해 내일 근무를 서는 수밖에 없었다.
수혁과 1팀의 팀장인 전승철은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별수 없지. 다음에 간식거리라도 사서 줘야…….”
[구조 출동! 구조 출동!]
갑작스레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아, 젠장!”
“10분 남았는데 출동이라니!”
사무실 쪽에서 욕설과 함께 대원들이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퇴근까지 10분.
고작 10분만을 남겨두고 출동해야 한다는 사실에 하늘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원망은 원망이고, 지금은 뛰어야 했다.
수혁과 전승철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
“심각한데?”
강병규가 신음했다.
신고가 들어온 현장은 백화점이었다.
지상 6층, 지하 3층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건물.
본래라면 고급스러운 외관에 온갖 치장물들이 가득했을 백화점의 외부는 온통 불길에 휘감겨 있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수혁이 전승철에게 물었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본부에 들러 상황을 파악하고 온 전승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화재가 발생한 지 한 시간이 경과한 상태다.”
“한 시간이요?”
강병규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대체 그동안 뭘 하고 있었답니까?”
아무래도 초기진화에 실패한 듯싶었다.
“처음에는 충분히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모양이다. 그런데 예상보다 불길이 생각보다 빠르게 퍼졌고.”
다음 달이면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덕분에 백화점 내부는 온갖 장식과 시즌 상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그것들 때문에 화재가 빠르게 번진 건가?’
수혁의 표정 역시 심각해졌다.
“본인들 힘으로만 해보려다 결국 힘이 들 것 같아 지원 요청을 했다고 하더군.”
“음…….”
차라리 처음부터 지원 요청을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요구조자 파악은 되었습니까?”
“파악한 바로는 84명이다. 하지만 그 이상이 될 가능성이 커.”
84명은 모두 백화점 직원들이었다.
손님들의 숫자는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황.
전승철의 말을 들은 수혁은 곧장 ‘생명 감지Ⅲ’를 사용했다.
‘하나, 둘, 셋…….’
스킬을 통해 백화점 내부에 있는 요구조자를 파악하던 수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생각보다 차이가 많이 나는데?’
출동한 소방관들이 파악한 요구조자의 수는 84명이었지만, 수혁의 스킬에 감지된 사람은 총 132명이었다.
‘손님들도 꽤 갇힌 모양인데.’
상황이 심각했다.
“지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같다.”
전승철 역시 요구조자가 최소한 백 명 이상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 정도 숫자라면 절대 자신들만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었다.
“일단 신일서에 요청하도록 하지.”
“부탁드립니다.”
“너희는 돌입할 준비해.”
전승철의 명령에 대원들이 백화점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이거 쉽게 잡힐 불길이 아닌 것 같은데?”
장비를 챙기던 강병규가 말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화재는 심상치가 않았다.
결코 한두 시간 내로 꺼질 불은 아니었다.
“그보단 요구조자들이 걱정이네요.”
백화점 내부의 상품들은 거의 대부분이 화학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 말은 곧, 불에 타면 유독 가스를 내뿜는다는 뜻이었다.
지금이야 다행히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듯싶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연기라…….”
장비를 모두 착용한 강병규가 백화점을 올려다봤다.
붉게 물든 밤하늘 위로, 검은색의 연기가 치솟아 오르는 것이 보였다.
“서둘러야겠군.”
수혁과 강병규의 대화를 듣고 있던 대원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
‘어쩌지? 어쩌지?’
대체 어떻게 하다 일이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연희는 행복한 표정으로 쇼핑을 하고 있었다.
올 한해도 잘 버텨주었다며 자신에게 선물 하나쯤은 해도 좋겠다는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던 것이다.
1년에 한 번은 사치를 부려도 될 것이라며 평소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명품 가방도 구경하고,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매장도 들어가 봤다.
확실히 명품은 명품인지라 가격표를 보면 움찔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만큼은…….
어떤 것을 사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그때.
갑자기 백화점 내부의 불빛이 모두 꺼졌다.
북적이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딱히 불안에 떨지는 않았다.
김연희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곧 불이 다시 들어올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정전이 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심각한 일이 닥쳐왔다.
따르르르르르르릉-!
갑자기 화재경보기가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빛이 모두 꺼져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와중에 무작정 달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히 엄청난 혼란이 들이닥쳤다.
사람들이 넘어지고, 서로 밟고, 밟혔다.
김연희 역시 정신없이 달렸다.
대체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도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엄마아!”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김연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설사 정말이라고 해도, 곧 아이의 엄마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엄마, 어딨어! 엄마아!”
아이의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그녀의 귀로 파고들었다.
김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쳐다봤다.
사람들의 손에 들려진 스마트폰의 불빛이 산란하며 정신을 어지럽혔다.
‘아이다!’
그리고 김연희는 그 불빛 사이로, 혼자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향해 달려갔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방향과는 반대였는지라, 계속 부딪히고 넘어졌다.
그런데도 김연희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아이의 앞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괘, 괜찮니?”
김연희가 조심스럽게 아이를 붙잡고는 물었다.
“엄마가, 엄마가 없어요.”
아이는 울먹이며 계속해서 엄마를 찾았다.
“언니가 꼭 찾아줄게. 걱정하지 마.”
이 혼란 속에서 엄마의 손을 놓친 게 분명했다.
아이의 엄마 역시 지금쯤 속이 타들어 가고 있을 터.
김연희는 일단 아이와 함께 이곳에서 빠져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으윽!”
이리저리 사람들에게 치이던 와중에 다리가 다친 모양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데, 다시 움직이려 하자마자 찌릿한 통증이 몰려왔다.
‘어쩌지?’
미친 듯이 달려가던 사람들도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비상구를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이다.
‘전화라도…… 어?’
스마트폰을 꺼내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던 김연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없어!’
스마트폰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매고 있던 가방 역시 언제 잃어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언니?”
김연희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아이는 더욱 불안에 빠졌다.
“괜찮아,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김연희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아이를 진정시켰다.
‘일단은 나가야 해.’
걷기도 힘들 정도로 아픈 것을 보니 아무래도 뼈가 다친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가만있을 순 없었다.
김연희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붙잡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가 놀랄까 봐 꾹 참은 김연희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계단 쪽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
내려갈 수가 없었다.
너무 시간을 지체한 탓일까?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연기를 들이마시면 안 좋다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 혼자만 있다면 숨을 참고 한번 내려가 볼 생각을 해보겠지만, 지금은 아이와 함께 있었다.
만약 아이가 연기를 들이마신다면?
‘못 내려가.’
김연희는 고개를 돌려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 역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훌쩍이고 있었다.
“우리 다른 쪽으로 갈까?”
아이와 함께 몸을 돌렸다.
백화점을 빠져나간 사람들과는 정 반대쪽으로.
그렇게 김연희와 아이는 백화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