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79화
“여기가 본부구나.”
수혁이 눈앞의 건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건물이 하나 올라가기에, 대체 뭐하는 곳인가 싶었는데…….
“설마 FILO 건물일 줄이야.”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지라 수혁은 당황했다.
‘미리 말 좀 해주지.’
짐 머레이가 설명해 주지 않았기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단순히 상가 건물쯤 되겠지, 싶었는데 난데없이 FILO 본부라니.
물론 본사 건물은 미국에 있긴 했다.
이곳에 있는 건 ‘1팀 본부’였다.
“하긴 우리도 출근할 곳은 있어야지.”
수혁의 뒤를 따라오던 박상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출동을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매일 집에만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방식만 달라졌을 뿐, 그들이 하는 일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여기 상주하는 직원들도 있다며?”
“네, 그렇다고 들었어요.”
당연한 말이었지만, FILO에는 구조대원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대원들을 뒤에서 서포트해 줘야 할 직원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이 건물에서 근무하게 될 사람들도 그런 직원들 중 하나였다.
행정적 업무와 더불어 상황실 역할까지도 하는 이들.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교대근무를 통해 24시간 대응이 가능한 체제를 구축해 두었다.
“대체 언제 이런 것까지 생각해 둔 건지 모르겠네요.”
수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구조에만 정신을 집중한 나머지,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니, 아는 게 전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아무리 이전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15년에 가까운 소방관 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장 대원의 경험일 뿐이었다.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직을 원활하게 운영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그런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짐 머레이는 굳이 수혁에게 이런 것을 상의하지 않고 알아서 만들었다.
탁월한 사업가였던 그는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초기임에도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해 냈다.
“일단 들어가자. 다들 모이기 전에 안쪽 구경도 좀 하게.”
“그래요.”
수혁은 박상태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3층의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었지만, 내부는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이곳이 과연 구조대원들이 사용할 건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풍스러운 느낌이 전해졌다.
“무슨 유럽이나 뉴욕에 있는 오래된 소방서를 보는 느낌이네요.”
그렇다고 낡아 보인다는 뜻은 아니었고, 마치 이곳 역시 영화 세트장의 한 부분처럼 느껴졌다.
수혁은 감탄하며 건물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아직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없나 보네.”
“공식적으로 업무는 내일부터 시작이니까요. 오늘은 저희 팀원들만 모일 거예요.”
FILO가 출범한 지는 조금 시간이 흘렀지만, 본격적인 업무는 내일부터였다.
“이거 기대되네.”
박상태가 살짝 들뜬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의 일도 일이었지만, 오늘 모일 팀원들이 어떤 사람들일지 궁금했다.
박상태가 만나본 사람은 율리안과 슈미츠가 전부였다.
톰과 손민준은 이름 정도만 들어본 상태.
수혁이 워낙 칭찬을 많이 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 민준 씨는 형도 본 적 있을 걸요?”
“내가?”
“예전에 특구 체력 테스트 때…….”
수혁이 손민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억난다. 너 말고도 엄청난 놈이 하나 더 있었지.”
박상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혁은 둘째치고, 저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의 괴물이 하나 더 있었다.
“그놈이 온다고?”
박상태가 혀를 찼다.
수혁이 어떤 드림팀을 꾸몄나 했더니, 정말 괴물 같은 사람들만 데리고 온 듯했다.
율리안은 말할 것도 없었고, 슈미츠 역시 나이에 비해 뛰어난 인재였다.
톰은 아직 잘 몰랐고, 손민준은 피지컬만 보면 수혁을 제외하고 가장 뛰어날 것이다.
박상태는 괜히 자신이 이곳에 끼어 있어도 되나 싶은 걱정이 들었다.
자신도 어디 가서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여기에 오니 괜히 주눅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수혁의 생각은 달랐다.
박상태는 뛰어난 소방관이다.
단순한 피지컬과 경험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게다가 수혁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기에 선택했다.
두 사람은 상황실, 회의실, 식당 등을 둘러보며 여러 얘기를 나누었다.
확실히 지금까지 근무했던 곳들과는 차원이 다른 시설들이었다.
“호텔이라고 해도 믿겠다.”
박상태가 허허- 웃었다.
수혁도 동의하는 말이었다.
“일단 회의실로 가서 기다려요. 이제 슬슬 다들 모일 시간이니까.”
모든 대원이 어제부로 이사를 완료했다.
가장 마지막에 이사를 온 건 의외로 손민준이었다.
최대한 오랫동안 부천서에서 일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하루 차이로 가장 늦게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사를 마친 대원들은 아직 서로 인사도 하지 못했다.
너무도 바빠 시간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수혁 혼자만 돌아다니며 환영을 해줄 뿐이었다.
“이제 이웃사촌이니까 자주 보겠지.”
이웃사촌이라는 말에 수혁이 살짝 웃었다.
퇴근했는데, 옆집에 직장 동료가 산다는 게 조금 우스웠던 것이다.
만약 일반 직장이었다면, 그것처럼 불편한 일이 또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FILO는 수직적인 계급 사회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였다.
물론 팀장을 비롯한 관리자급 인원이 있긴 했지만, 그것이 우리나라처럼 상급자로서의 권위를 나타내는 직책은 아니었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
FILO를 위해 일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한국인이 아니다.
수혁의 팀원들만 봐도 절반이 외국인이었다.
만약 한국과 같은 권위적인 계급 사회가 이뤄진다면?
모두 반발할 게 분명했다, 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문화였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팀장의 직책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현장에 나가면, 팀장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만큼 책임감이 막중하고, 신경써야 할 일이 많…….
“응? 누구 온다.”
박상태의 말이 수혁의 생각을 끊었다.
수혁이 고개를 돌려 회의실 입구 쪽을 바라봤다.
“어? 제가 가장 먼저 온 줄 알았는데 일찍 오셨네요.”
“민준 씨.”
손민준이었다.
그를 본 수혁이 웃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건물 진짜 좋던데요? 부천이랑은 비교가 안 되는군요.”
손민준은 감탄한 표정으로 수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쪽은 저희와 함께 일하실 분입니다.”
수혁이 박상태를 소개했다.
“박상태입니다.”
“아, 저는 손민준입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손민준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박상태와 악수를 나누었다.
‘이거 진짜 괴물이네.’
손민준의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힘에 박상태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일단 겉으로 보이는 외형으로만 따지면, 수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괴물이었다.
소방관이 아니라 보디빌더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키가 작은 박상태는 더욱 큰 압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박상태는 이런 동료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그동안 모지리들 데리고 일했던 걸 생각하면…….’
항상 장난치길 좋아하던 신일서의 식구들이 떠올랐다.
좋은 사람들이긴 했지만, 솔직히 능력은 이 팀의 대원들과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두 사람이 첫 대면을 한 뒤, 다른 팀원들 역시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율리안과 슈미츠, 그리고 톰까지.
박상태와 손민준은 톰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이는 좀 많았지만, 톰의 육체는 압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기 더한 괴물이 있었네.’
박상태는 어이가 없어 연신 헛웃음을 내뱉었고.
‘역시 미국 사람…….’
손민준은 감탄했다.
“여기 모인 분들이 오늘부터 함께 일할 팀원입니다.”
면면이 화려하다.
수혁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소방관이었고, 율리안은 수혁이 나타나기 전까지 가장 뛰어난 구조대원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톰은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피지컬을 소유한 데다 뉴욕에서 구조대장을 지냈을 정도의 경험이 있었다.
손민준은 수혁이 인정한 피지컬 괴물이었고, 슈미츠 역시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인재였다.
그리고…….
‘이거 내가 너무 초라해지는데.’
박상태는 자신이 딱히 내세울 것이 없다는 사실에 조금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특수 구조대 출신도 아니었고, 압도적인 피지컬을 지니지도 못했으며,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소방관도 아니었다.
그저 한 지역의 소방서에서 구조팀장의 자리에 있었던 흔하디흔한 소방관.
박상태가 생각하는 자신이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응?’
뜬금없는 소리에 박상태가 수혁을 쳐다봤다.
수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니, 수혁만이 아니라, 회의실 내부에 있는 모든 대원의 시선이 박상태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가 이 팀을 맡기로 한 뒤, 가장 먼저 끌어들인 분이기도 하죠.”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가장 접촉하기 쉽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혁은 박상태에게 제일 먼저 함께하자고 제안했을 것이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그냥 하는 빈말이 아니었다.
‘나를 살리려고 목숨까지 바쳤던 분이지.’
이전 생의 일이긴 했지만, 신입이었던 수혁을 구하기 위해 순직을 선택한 사람이 바로 박상태였다.
비록 이번 생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혁의 기억 속에 박상태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팀원 중 단 한 명만 선택해서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면, 수혁은 주저 없이 박상태를 선택할 것이다.
그 정도로 박상태는 수혁에게 있어 의미가 큰 사람이었다.
“대단하신 분이었군요.”
톰이 박상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그들은 수혁의 인선에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은 상태였다.
어련히 알아서 잘 뽑았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수혁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자신의 등을 맡길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상태가 다부진 어깨를 쫙 펴며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후 서로 자신의 소개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조금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이제 평생을 함께할 동료들이었는지라 좋은 분위기가 흘렀다.
그리고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들어왔다.
“이거 내가 조금 늦은 것 같구만.”
짐 머레이였다.
“짐!”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다가갔다.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그사이에 짐 머레이는 많이 야윈 것 같았다.
‘고생을 너무 하신 것 같은데…….’
수혁은 그가 FILO를 설립하며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얼른 짐 머레이를 부축했다.
“허허, 아직 그 정도로 늙진 않았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수혁의 호의를 거절하진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팀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을 한 번 둘러본 짐 머레이의 표정에 감정이 깃들었다.
그토록 앞만 보고 달려왔던 일의 결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에 가슴이 복받쳐 왔다.
그 어떤 사업의 성공보다도 더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모두 반갑네. 그리고…….”
수혁과 함께하기로 결정해 주어서.
그리고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결정을 해주어서.
“고맙네.”
짐 머레이가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