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83화
총 열한 시간의 이동.
최소 여덟 시간 이상은 걸릴 거라고 하긴 했지만, 정말로 예상보다 세 시간이나 더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그나마 자카르타 인근에서는 좀 괜찮았다.
혼잡하긴 해도 도로 사정이 나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수도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곤혹스러울 정도였다.
포장이 안 된 도로를 달리는 일도 잦았고, 길이 막혀 한참 동안이나 꼼짝달싹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꼬박 열한 시간을 차 타고, 배를 타며 이동한 후에야 간신히 술라웨시 섬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엉망이구만.”
쓰나미가 일어난 지 거의 20시간 가까이 흐른 덕분에 물은 많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직도 물이 빠져나가지 못한 채 고여 있었다면, 구조에 큰 지장이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물이 많이 빠져나갔으니 조금은 수월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무 늦었어.’
구조는 수월해졌지만, 그 말은 시간이 늦었다는 뜻도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희생자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을 테고.
물론 수혁과 FILO의 입장에선 최선을 다했다.
최대한 빠르게 올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현지 구조대원들조차 아직 이곳에 투입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수혁과 팀원들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눈앞의 처참한 광경이 가슴을 무겁게 찍어 눌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들은 안 보입니다.”
지금쯤이면 이 폐허 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넘쳐나야 정상이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인도네시아 구조대를 제외하고서라도, 사람들을 구하고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한 이들이 보여야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관광지가 아니라 그럴 거다.”
술라웨시 섬은 널리 알려진 관광지가 아니었다.
관광지라기보단 로컬의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섬이었다.
옛날 한국처럼, 서양인 관광객들이 오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며 관심이 집중되는 곳.
그러니 자카르타나 발리처럼 사람이 넘쳐나지는 않았다.
거기다 건축물 역시 그리 튼튼하지 못해 많은 사람이 지진과 쓰나미에 희생되었을 테고.
인도네시아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술라웨시 섬에 대한 공부를 조금 한 율리안의 말에,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눈치를 챈 것이다.
“그래도 안쪽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을 거다.”
쓰나미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해변보다는 그나마 안쪽의 사정이 좀 나을 터.
수혁은 일단 팀원들을 이끌고 조금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여기엔 딱히 구조할 만한 사람이 없어.’
‘생명감지Ⅲ’를 사용해 봤지만, 구조가 필요한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워낙 심각한 타격을 받은 탓에, 생존자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서만 최소한 수백 명은 죽었겠네요.”
손민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그렇겠지. 인도네시아에선 대체 이런 상황이 될 때까지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서포터 직원의 브리핑에 의하면, 오히려 민간인들로 구성된 민간 구조대원들이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 지경에도 굼뜬 행동을 보이고 있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런 것에 심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오직 사람들을 구하기 위함이었으니까.
***
“젠장!”
에밀리는 욕설을 내뱉었다.
“대체 왜 내가 동남아를 올 때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냐고! 아아악!”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외치던 에밀리는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결국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쓰나미에 휩쓸리며 나뒹굴다 나뭇가지에라도 찔렸는지, 그녀의 허벅지는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찢겨 있었다.
그동안 기자 생활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고통을 느껴보는 건 처음이었다.
너무 큰 고통에 몸이 덜덜- 떨려올 지경이었다.
“푸켓에서는 특종이라도 건졌지…….”
몇 년 전.
푸켓에서도 지금과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그때도 갑작스럽게 쓰나미 경보가 울렸고, 아름답던 자연은 순식간에 돌변해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다행히 에밀리는 늦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그 이후 누군가를 만나 커리어의 정점을 찍을 수 있는 특종을 만들어냈다.
“그때가 좋았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영웅.
한국에서 여행 온 소방관의 뒤를 따라다니며 취재한 결과, 에밀리는 그를 푸켓의 영웅으로 불리도록 만들었다.
그 이후 에밀리는 그 영웅의 뒤를 영원히 따라다닐 것이라 다짐했었다.
그의 능력이라면 푸켓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충분히 세계가 놀랄 활약과 스토리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녀의 꿈은 좌절되었다.
한국 주재원 신청을 했지만, BBC에서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소방관 한 명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으로 가겠다는 그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훗날 BBC에서는 땅을 치고 후회를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자신이 만든 영웅은 이제 푸켓의 영웅이 아니라, 전 세계의 영웅이 되었다.
역사상 아홉 번째로 미국의 명예시민이 되었으며, 독일 테러 현장에서 수없이 많은 생명을 살렸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람들을 구한 덕분에, 8개월이란 시간 동안 생사를 헤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제 와 다시 그를 따라다니며 취재하기에는 너무도 커버렸다.
결국 에밀리는 푸켓 이후로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했고, 덕분에 이런 인도네시아의 촌구석까지 취재를 오게 된 것이었다.
그랬는데…….
“또 쓰나미라니.”
이번에는 푸켓처럼 운이 좋지도 못했다.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긴 했지만, 이대로라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상처를 통해 감염된 것인지,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감염은 아닐 거야.’
에밀리는 애써 감염 가능성을 무시했다.
처음 부상을 입고 난 뒤 최대한 빠르게 응급 처치를 했고, 상처 부위도 깨끗하게 씻어냈다.
그러니 감염은 아니리라 믿었다.
“대체 구조대는 언제 오는 거야.”
자신이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어난 후에도 시간이 꽤 흘렀다.
하지만 구조대는 보이지 않았다.
푸켓에서도 상황대처가 느리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체감상 지금쯤이면 한창 구조가 시작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코빼기도 안 보이네…….”
에밀리는 떨리는 몸을 가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웬만하면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았지만, 이대로 가만있다간 죽을 것만 같았다.
“사람들을 찾아야 해.”
근처에서 지팡이로 쓸만한 나무 막대를 찾아 땅을 짚으며 주변을 천천히 돌아봤다.
땅이 질퍽거려 걷는 게 힘이 들었지만, 최대한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으음.”
폐허도 이런 폐허가 없었다.
이곳은 해안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음에도,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물은 한 채도 보이지 않았고, 튼튼해 보이던 나무들도 모조리 뽑혀 나간 채 땅을 나뒹굴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과 울음소리.
다급하게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잔해에 깔린 사람들을 꺼내기 위해 용을 쓰는 소리.
온갖 절망적인 소리가 에밀리의 귀를 괴롭혔다.
지금까지 자신이 욕을 하며 절규했던 것이 마치 아이들 장난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게 뭐야…….’
그토록 끔찍해 보였던 허벅지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체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를 팔과 다리가 땅에 떨어져 있었고, 머리가 깨져 희고 붉은 액체를 쏟아내는 사람들이 좀비처럼 돌아다녔다.
시체는 굳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지금 에밀리 자신이 밟고 있는 것도 바로 시체 중 하나였으니까.
“아아악!”
뭉클한 감촉에 아래를 내려다본 에밀 리가 자지러지는 비명과 함께 뒤로 자빠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체의 곁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그녀의 주위는, 말 그대로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까지 대체 어떻게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인지 놀라울 정도로 시체가 많았다.
아무런 초점도 없이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는 시체들의 눈동자에, 결국 에밀리는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목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이 지옥 같은 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물을 잔뜩 머금은 진탕은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손톱으로 땅을 긁어댔다.
‘아아아아아악!’
너무도 큰 공포에 에밀리는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곤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졌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함께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빠르게 혼미해져 가는 정신 속에서 에밀리는 그제야 평온함을 느꼈다.
‘그래, 차라리 정신을 잃으면…….’
마치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이 모두 꿈인 것처럼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에밀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의식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에밀리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쉽게 눈이 떠지진 않았다.
그녀는 죽다 살아났다.
거기에 정신적인 충격도 컸으니, 쉽게 정신을 차릴 순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소음이 너무 심했다.
계속해서 오가는 고함소리에 검게 물들었던 그녀의 의식이 천천히 돌아왔다.
“으음…….”
에밀리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자,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정신이 드십니까?”
누군가가 에밀리에게 물었다.
하지만 에밀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아직 그럴 만한 힘이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자 말을 건 남자가 에밀리의 입에 젖은 수건을 가져다 댔다.
“일단 이것부터 좀 마시세요.”
차가운 물이 입술을 적시며 입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타는 듯했던 몸이 조금씩 식어가는 것 같았다.
“여, 여긴…….”
목을 축인 덕분일까?
에밀리가 천천히 말했다.
쩍쩍 갈라진 음성이 거북할 정도로 탁했지만, 남자는 친절하게 물음에 답을 해주었다.
“임시 보호소입니다.”
“임시…….”
그 말에 에밀리는 정신을 잃기 전 봤던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아.’
그것은 현실이었다.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팔다리가 땅에 굴러다니며, 피와 진흙이 뒤섞여 흘러내리던.
그 지옥 같은 모습은 꿈이 아니었다.
에밀리의 몸이 다시금 떨려왔다.
“진정하세요. 당신은 안전합니다.”
남자가 그런 에밀리의 손을 붙잡아주었다.
‘따뜻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그의 따뜻한 체온이 조금은 진정을 시켜주었다.
에밀리는 눈에 힘을 주었다.
지금 곁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확인을 하고 싶었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쉽지 않았지만, 에밀리는 몇 번을 시도한 끝에 결국은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윽!”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램프의 불빛이었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빛에 에밀리가 깜짝 놀라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괜찮으십니까?”
남자가 다급히 그녀의 얼굴 앞에 손바닥을 펼쳐 빛을 가려주었다.
에밀리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동양…… 인?’
남자는 짧고 검은 머리였다.
덩치도 상당히 좋은 것 같았고, 무엇보다 구조대의 상징인 오렌지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수혁?”
순간 에밀리는 그가 수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선명해지는 시력에 에밀리는 고개를 저었다.
수혁과 같은 동아시아인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아, 아니, 저야말로…….”
사람을 착각한 것에 대해 에밀리가 사과하려는데, 남자가 입을 열었다.
“팀장님과 아시는 분인 줄은 몰랐군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바로 불러 드리겠습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키는 건장한 사내.
그는 바로 손민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