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92화
“괜찮아요?”
수혁이 물었다.
“네 눈엔 이게 괜찮아 보이냐?”
박상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도 지쳤다.
8층에 있는 요구조자들을 무사히 데리고 나오기 위해, 몇 번이나 건물을 오르내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 육체의 피로가 남아 있는 상황에, 다시 무리하다 보니 몸에 탈이 나고 말았다.
“그러게 평소에 운동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수혁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마, 지금 그게 할 말이냐?”
박상태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수혁을 노려봤다.
하지만 별다른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박상태를 제외한 다른 팀원들은 아무런 이상도 없었으니까.
‘내가 이 괴물들하고 똑같냐고…….’
체력으로 비교하자면 박상태는 톰과 비슷했다.
하지만 이번 현장에 톰은 출동하지 않은 상태.
덕분에 오직 박상태만이 퍼지고 말았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수혁의 말대로 자신이 운동에 조금 더 신경을 썼으면 될 일이었던 것이다.
수혁은 계속해서 투덜거리는 박상태를 보며 실실- 웃었다.
항상 하는 말이었지만, 박상태에게 바란 것은 육체적인 능력이 아니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생명이 경각에 달린 다급한 상황에서 자신의 등 뒤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실제로 나를 구하려다 목숨까지 잃은 사람이니까.’
수혁은 아직도 박상태의 순직을 잊지 못했다.
아니,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생이 다시 한 번 마감할 때까지 말이다.
“못할 건 또 뭐예요. 휴식시간 주어졌다고 놀지만 말고, 이제 운동에도 좀 신경 써요.”
“하, 이 새끼. 팀장 됐다고 아주 나를 물로 보네.”
마음 같아선 예전처럼 뒤통수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었다.
방금 말했다시피 수혁은 이제 자신의 팀장이었으니 말이다.
선배든, 이전의 팀장이든.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수혁의 팀에 들어가기로 결정할 때부터 충분히 이런 걸 감안한 상태였으니까.
물론 FILO의 팀 분위기가 한국과는 달리, 수직이 아닌 수평 관계라고는 하지만…….
평생을 한국의 소방관으로 살아왔던 박상태로선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한 번 팀장은 영원한 팀장이라는 말 알지? 내가 한때 네놈 팀장이었던 거 잊지 마라.”
“지금은 제가 팀장이죠.”
박상태가 옛날 일을 들먹이며 조금이라도 우세에 서보려고 했지만, 수혁은 웃으며 그것을 받아쳤다.
“끄응.”
수혁의 말에 박상태가 앓는 소리를 냈다.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아무튼, 그래서 몸은 좀 어떠냐니까요?”
장난은 이제 그만 쳐도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수혁이 다시 한 번 박상태의 몸 상태를 물었다.
“별거 아니다. 그냥 무리해서 그런 거야.”
박상태는 마지막 요구조자를 건물 밖으로 데리고 나온 뒤, 갑자기 현기증을 호소하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수혁을 포함한 팀원들이 깜짝 놀라 달려갔지만, 당시의 박상태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
다급히 구급대를 호출해 병원으로 이송을 해서 검사를 한 결과.
“과로 조금 한 거 가지고 호들갑은, 쯧.”
인도네시아에서부터 이어진 강행군에 체력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었다.
솔직히 박상태는 그게 너무도 쪽팔렸다.
체력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요즘엔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민다.
그의 주위에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작자들만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수혁은 논외로 치더라도, 다른 팀원들과 고령의 톰까지.
누구 하나 박상태보다 체력이 부족한 사람이 없었다.
안 그래도 그게 조금 신경 쓰이던 차에 이렇게 정신까지 잃어버렸으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다행이네요.”
수혁이 웃으며 박상태를 쳐다봤다.
병상에 누워 있는 박상태의 모습은 사실 낯설었다.
언제나 두 사람의 위치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수혁이 병원의 침대에 누워 있고 박상태가 면회를 오는 모습.
그게 지금까지 겪었던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입장이 바뀌었다.
수혁은 그게 조금 안타까웠다.
“다행이지. 현장 안에서 쓰러지지 않은 게 어디냐.”
박상태가 몸서리를 쳤다.
방금 한 말처럼 건물 밖이 아닌, 안에서 쓰러졌다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팀원들의 품에 안겨 구조되는 모습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수혁이 다행이라고 한 의도와는 조금 다른 해석이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넌 안 가냐?”
조금 전 다른 팀원들도 한 번씩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유독 수혁만은 계속 옆에 남아 박상태를 귀찮게 굴고 있었다.
“가서 뭐 해요, 할 일도 없는데.”
수혁이 무겁게 말하자, 이번에는 박상태가 픽- 하고 웃었다.
“하긴. 네가 제수씨 말고 놀 사람이나 있겠냐. 사람 구하는 데만 정신이 빠져가지고.”
수혁에게도 친구는 있었다.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분명 이전 생에서는 가끔 시간을 내서 서로 만나 술 한잔 기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생에서는 언젠가부터 그런 자리를 만들지 못했다.
아니, 시간을 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했다.
비번에는 힘들어서?
아니다.
오히려 이번 생에선 이전 생과 비교하자면 여유가 넘쳐흘렀다.
돈이 없어서?
그것 역시 아니었다.
‘내가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았나?’
박상태의 말을 듣고 나니, 지금까지 자신이 뭘 하고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자주 만났던 친구들과도 아주 가끔 생사만 확인하는 연락을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직접 얼굴을 본 것은 결혼식 때뿐.
수혁은 스스로를 반성했다.
이전 생에서, 자신이 힘들 때 항상 위로가 되어주었던 건 바로 친구들이었다.
힘든 와중에도 술 한 잔을 기울이고, 쉴 새 없이 수다를 떨다 보면 다시 기운이 나곤 했다.
그런데 이번 생에서는…….
‘너무 무심했어.’
수혁은 오늘 아침 집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할 일이 없다고? 심심하다고?’
그러면 오랜만에 친구들의 얼굴을 보러 가면 될 일이었다.
아니면 집으로 초대를 하던가.
고시원에서만 살았던 이전 생과는 달리, 지금은 분에 넘치도록 좋은 집도 생겼다.
그런데 아직까지 친구들을 단 한 번도 초대하지 않았다.
‘왜 잊고 있었을까?’
수혁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삐쳤냐? 사내새끼가……. 인마, 원래 남자는 나이 들면 친구들도 다 멀어지고 그러는 거야. 그거 가지고 그렇게 우울해할 필요 없어.”
박상태는 혹시나 자신의 말에 수혁이 상처를 받았나 싶어 잽싸게 입을 열었다.
“삐치긴 누가 삐쳐요.”
수혁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그래?”
“조금 잊고 있던 게 생각이 나서요.”
어차피 다음 출동 때까지는 휴식이었다.
오늘과 같은 일이 자주 생기지는 않을 테니, 여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형수님은 언제 오신대요?”
“아까 오고 있다고 연락받았으니까, 이제 도착할 때쯤 됐을 거다.”
“그럼 전 먼저 일어나 볼게요.”
박상태 혼자 두고 가는 게 좀 걸렸는데, 형수님이 거의 도착을 했다니 슬슬 일어나도 될 것 같았다.
“어디 가게? 너 할 일도 없잖냐.”
박상태는 조금 전 한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수혁을 붙잡았다.
괜히 아무도 없는 집에 가서 혼자 궁상을 떠느니, 여기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수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일이 생각나서요.”
“할 일?”
박상태가 고개를 갸웃하자, 수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친구 만나러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끔뻑이는 박상태에게 인사를 하고 나온 수혁이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러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승우냐?”
* * *
“이야, 슈퍼히어로!”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들려온 소리였다.
고승우는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수혁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런 미친놈.”
수혁은 재빨리 고개를 숙여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췄다.
“미쳤냐?”
그러곤 그만하라는 듯 고승우의 팔을 붙잡고 도망치듯 자리를 이동했다.
“이놈 힘 좋은 거 봐라.”
수혁을 놀리는 재미에 힘을 줘 반항을 해봤지만, 어림도 없었다.
무슨 자동차에 끌려가는 것마냥,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잘 지냈냐?”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지자, 수혁이 한숨을 내쉬며 고승우를 쳐다봤다.
“나야 잘 지냈지, 새끼야.”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수혁과는 달리, 고승우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수혁을 노려봤다.
“나는 네가 TV에 안 나왔으면 뒤진 줄 알았을 거야. 어떻게 연락 한 번이 없냐? 오죽하면 은송이한테 네 안부를 물었다, 내가.”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수혁은 순순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바빠서 그랬는데 어쩌라고.”
물론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사과가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유명인 됐다고 어? 친구 그렇게 무시하고 그러면 나중에 벌받는다.”
“유명인은 개뿔.”
실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
하지만 마치 어제 만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색함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평소에는 잘하지도 않는 욕도 술술 나왔다.
“그동안 내 조언을 잊지 않았나 봐?”
“뭐? 무슨 조언.”
“네 머리.”
수혁이 턱으로 고승우의 머리를 가리켰다.
고승우는 이전 생에서 탈모로 인해 꽤나 고생을 했다.
탈모에 좋다는 건 모조리 해봤지만, 문제를 인지했을 땐 이미 많이 늦은 상태였기에…….
‘효과를 별로 보지 못했지.’
그래서 예전에 고승우를 만났을 때, 말을 한번 해준 적이 있었다.
관리 잘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대머리 된다고.
장난치듯 한 말이었는데, 고승우는 그걸 무시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직도 꽤 풍성해 보였으니 말이다.
“아, 이거? 안 그래도 탈모 조짐이 보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관리를 좀 시작했지.”
탈모 치료제는 아직 없다.
이전 생에서도 수혁이 죽기 전까지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관리를 한다면 최대한 늦출 수는 있었다.
대머리가 아닌, 풍성한 친구의 모습에 수혁이 낄낄- 웃었다.
“그나저나 다른 애들은? 몇 명 더 불렀다며.”
“오고 있을 거야. 다들 퇴근이 조금 늦어졌다고 하더라.”
고승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장인들의 삶이란 원래 그랬으니까.
자신도 운이 나빴다면 아직 회사를 빠져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너는 좋겠다. 무슨 단체에 들어가서 이제 소방서 출근 안 해도 된다며.”
FILO에 대해서 꽤나 많이 알아봤는지, 고승우는 구조팀 활동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것 같았다.
“그렇긴 하지.”
“부러운 놈…….”
“돈도 잘 버는 놈이 개뿔.”
고승우는 소방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연봉을 받고 있었다.
FILO에 들어가며 연봉이 크게 오른 수혁보다도 많았던 것이다.
“세상에 돈이 전부가 아니거든?”
“그렇게 부러우면 너도 소방관 하던가.”
“아, 그건 아니지.”
고승우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수혁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자신은 엄두도 나질 않았다.
“옛날엔 안 이랬던 거 같은데 말이야.”
분명 몇 년 전만 해도 수혁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소방관이 된다며 운동을 열심히 했기에 몸이 좋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몇 년 사이에 수혁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언론에서도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심지어 해외에서도 수혁을 따라다녔다.
얼마 전에는 미국의 명예시민이 되지 않았던가?
눈앞에 있는 놈이 과연 자신의 친구가 맞는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너도 소방관 일 하면 다 이렇게 변하게 돼 있어.”
수혁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슬슬 이동하자. 애들 거의 도착했단다.”
수혁이 스마트폰을 보며 말했다.
몇 명 없는 친구들.
실로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생각에, 수혁의 표정이 살짝 들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