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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2화 (2/201)

[ 2 ] [1화] 흙수저 역사학도 김성호

노력은 성공을 위한 필요조건 이지만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다. 성호는 그 사실을 인생이 제대로 꼬이고 나서야 깨달았다.

* * *

성호는 오랜만에 친구 태영을 만났다. 학사장교로 입대하고 중위로 진급한 후 처음이니 거의 반년 만이었다. 군인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처음 꺼내는 얘기는 당연히 군대 얘기였다.

“어제 우리 부대에 사단장 왔었거든? 그런데 이 양반이 방문 전날 저녁에 점심을 병사식당에서 드시겠대. 근처 한정식 집 예약 다 해놨는데.”

“야... 완전 공습경보네.”

“난리 났지. 게다가 그날 점심 메뉴가 똥국에 조기튀김이야. 투스타한테 그걸 어떻게 먹이냐? 차라리 뽀글이를 먹이지. 그래서 취사병들 닦달해서 간신히 시간 맞춰서 함박스테이크로 바꿨지.”

“네 표정 보니까 뭔 문제가 있었네. 사단장이 고든 램지 빙의해서 음식투정 부렸냐?”

“그 정도면 다행이지. 이 양반이 식판에 음식받자마자 병사들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대. 그러더니 지정석 말고 밥 먹고 있는 병사들 옆에 앉더라? 근대 사단장 앞자리가 하필이면 우리 중대 고문관이야. 그것도 대대 전체에 소문난 최악의 이등별.”

“헐... 투스타에 이등별... 황홀한 조합이네. 발암 올스타전 나가셔야 겠어.”

“간부들 다 쫄아서 얼굴 창백해져 있는데 사단장이 걔한테 말을 걸었어. 군생활 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뭐냐고.”

“그래서 걔가 뭐래?”

“매일 이런 밥이 먹고 싶다더라.”

“뭐?”

“오늘 메뉴 원래 똥국이었는데 갑자기 함박스테이크로 바뀌었다고 까발리더라고. 그러더니 하는 말이 평소엔 밥이 너무 맛없어서 냉동만 쳐드신대. 사단장 표정 진짜 썩어들어 가더라. 대대장이 사단장 식판 받을 때 요즘 병사 식단 좋아졌다고 이빨 털었었거든. 나중에 대대장한테 욕 엄청나게 먹었다. 중대원 관리 잘하라고.”

“씨발...고문관 새끼 진짜 열 받네! 요즘 군대 왜 그러냐? 그런 새끼는 영창에 쳐 넣어서 한 달 내내 조튀에 해빔소스만 먹여야 돼! 야! 오늘 마침 불금이다. 마셔! 이런 날은 뇌세포를 알코올로 빨아서 스트레스를 씻어내야 돼!”

태영은 성호 앞에 놓인 잔에 소주를 채웠다. 너무 기운차게 들이붓는 바람에 술이 넘쳐 테이블을 조금 적셨다.

“야. 술을 내가 먹지 테이블이 먹냐? 피 같은 술 다 흘렀네.”

“빡쳐서 손에 힘이 좀 들어갔네. 군인복지 차원에서 오늘은 내가 쏜다!”

성호는 태영의 말에 씁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번엔 내가 낼게. 이런 페이스로 너한테 계속 얻어먹으면 나 제대할 때쯤에는 차 한 대 값 나오겠다.”

성호는 잔을 들어 태영과 건배를 하고 꽉 찬 소주 한 잔을 단숨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17도 안 되는 소주가 그 날 따라 유난히 써서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고 태영이 말했다.

“왜? 오늘따라 소주가 쓰냐?”

“인생이 쓰니까 술도 쓰지.”

“아이구 저 애늙은이 어쩌면 좋냐. 요즘은 말에서 너무 먹물 냄새나면 아재 소리 들어. 우린 파릇파릇한 20대라구?”

성호는 태영의 너스레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아직 20대지. 제대하면 30대인 게 함정이지만.”

두 사람은 삼겹살 안주로 소주 5병을 비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영은 꽤 많이 취해서 제대로 걷질 못했기 때문에 성호가 부축해야 했다. 식당 문을 나서니 방금 전화로 부른 대리기사 두 명이 벌써 주차장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성호는 태영을 차에 태우고 태영의 대리기사에게 말했다.

“도곡동 타워팰리스로 가주세요.”

성호가 태영과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데 자동차 조수석에 앉은 태영이 창문을 열고 꼬인 혀로 소리쳤다.

“야! 김성호!”

“어?”

“난 뉘가 진짜 대다난 놈이라고 생가케.”

“뜬금없이 뭔 소리야?”

“아뉘. 그러차나? 너 중1 때까진 나랑 성적 비슷해짜나? 둘 다 완전 바닥 이어짜나? 그런데 이 역사 덕후가 어느 날 갑짜기 사학꽈 교수 돼서 덕업일치 한대. 그러더니 매일 밤새도록 공부해서 서울대에 드러가. 난 돈을 쳐 들여서 과외해도 재수로 지방대 갔는데 .”

“갑자기 낯 뜨겁게 왜 그러냐?”

“그러니까 내가 무슨 말이 하고 시픈 건가 하면! 포기하지 마란 마랴!”

성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성호는 주정을 부리는 태영을 달래서 보낸 후 대리기사와 함께 자신의 차를 타고 집으로 출발했다. 두 사람 다 말이 없어서 차안에는 사레들린 노인의 기침소리 같은 낡은 경차 엔진소리만 가득했다. 그 시끄러운 적막이 불편했는지 대리기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까 친구 분 일찍 성공하셨네요.”

“네?”

“아직 젊은 분이 벤츠를 타시네요. 그것도 S클래스로.”

“아아. 그 친구 중견기업 이사에요.”

“이야 진짜 부럽네요.”

“부럽죠.”

성호는 말수가 적은 편이라 평소대로라면 거기서 대화가 끊겼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술기운 때문인지 말이 술술 나왔다.

“벤츠도 부럽고. 억대연봉도 부럽고. 그래도 제일 부러운 건 실패할 권리에요.”

“실패할 권리요?”

“어렸을 때 오락실 가보셨죠?”

“거기서 살다시피 했죠.”

“저도 초등학교 때 아까 그 친구랑 종종 같이 갔었어요. 주로 '던전 앤 드래곤'이라는 게임을 했었죠. 실력은 제가 더 좋았는데 걔랑 같이 가는 날에만 엔딩을 봤어요.”

“동전 잔뜩 쌓아놓고 오락기 전세내서 했나보네요.”

“맞아요. 저 혼자 가는 날에는 100원만 가져가서 게임오버 될 때까지 했거든요. 그런데 인생도 똑같더라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서민 인생은 한번 미끄러지면 만회할 기회가 없다는 얘기에요. 그 친구는 호기심이 많아서 어린 시절에 이것저것 많이 해봤어요. 고등학교 때는 프로게이머 준비. 대학교 때는 제대하고 나서 뒤 늦게 아이돌 연습생. 대학 졸업하고서는 선수한다고 승마배우다 6개월 만에 접었고. 그 다음엔 1년 쯤 쉬다 자기 아버지 회사에 들어갔는데 그 일이 천직이었어요. 입사하고 얼마동안 일 배우더니 큰 계약을 몇 개나 따냈거든요.”

“버라이어티하게 사셨네요.”

“재밌게 살았죠. 그에 비해 전 한길만 팠어요. 어렸을 때부터 서양고대사가 좋았거든요. 그 분야 교수가 되려면 박사를 해외에서 따야 돼요. 그래서 대학 들어가고 나서 유학 자금을 모았죠. 부모님하고 살면서 대학 4년에 대학원 석사과정 3년, 도합 7년간 악착같이 과외 했더니 석사 졸업논문 통과 될 때쯤에는 1억 원 가까이 모았었어요.”

“대단하시네요.”

“대학원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진짜 천사 같은 교수님을 만나서 제 사정 많이 봐주셨으니까 가능했었죠.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석사과정 마치고 학위증하고 적금통장 들여다보는데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그 때 까지는 인생이 계획대로 풀렸죠. 그런데 대학원 졸업하고 얼마 안 지나서 아버지께서 혈액암에 걸리셨어요.”

“아이구 저런.”

“다행히 조기에 발견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돈이었죠. 마침 아버지 정년퇴임 하시고 퇴직금에 저축 다 끌어 모아서 막 식당 차리셨을 때라 집에 돈이 없었어요. 희귀암이라 보험금도 얼마 안 나오더라고요. 고액암 특약을 안 하셔서.”

“그래서 모으신 돈을 아버지 치료비로 쓰셨나요?”

“그랬죠. 병원비에 어머니 혼자 식당일 하시느라 가게 월세도 못 낼 만큼 매출이 떨어져서 그것도 막고. 그러고 나니까 그 돈 다 쓰고도 좀 모자랐어요. 아까 그 친구한테 돈 빌려서 간신히 메웠죠. 다행히 지금은 완치 되셨어요. 빌린 돈도 학사장교 1년 하면서 다 갚았고. 그렇지만 유학은 물 건너갔죠.”

“진짜 억울하시겠어요.”

“죽고 싶더라고요. 그러면 안 되는데 어려울 때 도와준 고마운 친구한테 질투심 느꼈었고. 부모님도 원망스러웠고. 그런데 입대하고 찬찬히 생각해보니까 제 탓이 컸어요.”

“손님 잘못은 없는 거 같은데요. 그냥 운이 없었던 거잖아요?”

“역사 공부하다보면 잘나가다 방심이나 판단 미스로 망하는 케이스를 많이 봐요. 그런데 책에서 배운 걸 제 인생에 써먹질 못했어요. 한국에서 매년 암 걸리는 사람이 20만 명 넘는 거 알고 있었어요. 우리 아버지 평생 공장에서 화학약품 다뤄오셨으니까 건강 조심하셔야 되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럼 배운 놈이 부모님 암보험 정도는 체크했어야 됐는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 하나도 대비를 안했어요.”

성호는 한숨을 푹 쉰 다음 말을 이었다.

“인생 원 코인으로 플레이하는 흙수저가 주변도 안보고 무작정 달리다 자본주의에 걸려 넘어진 거죠.”

그렇게 신세한탄을 하는 사이에 어느새 차가 성호의 집 주변에 도착 했다. 지하주차장이 없는 낡은 아파트 단지는 가로등도 별로 없어서 어두웠다. 단지 내에 한 집이 차 두 대를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갖춰져 있었지만 외부방문자가 많은지 그 날은 빈자리를 금방 찾을 수 없었다. 주차장을 거의 한 바퀴 돌았을 때 대리기사 드디어 자리를 발견했다.

“저기 구석에 한 자리 있네요.”

양쪽에 다른 차가 주차된 좁은 자리였다. 대리기사가 빈자리 쪽으로 차를 몰아가다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고 멈췄다.

“왜 그러세요?”

진호가 묻자 대리기사가 놀란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빈자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차 저거 그 거잖아요.”

진호는 대리기사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어우 씨! 저게 왜 저기 있어!”

빈자리 왼 쪽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은 보디빌더처럼 우람한 세단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어우... 저거 벤틀리 뮬산 이잖아. 기사님. 죄송한데 다른 자리 더 찾아보면 안 될까요? 저거 우리 집보다 비싸요.”

“저도 웬만하면 그럴 텐데 정말 자리가 없었어요. 저도 가봐야 하고요.”

“아이고... 그럼 정말 조심해주세요.”

“그럴게요. 여기 꼭 전면주차 해야 되나요? 후면주차하면 차에 안내장 붙이는 단지가 많던데요.”

“딱지 붙이긴 하는데요. 그냥 후면주차 해주세요.”

대리기사는 나무늘보 같이 느린 속도로 차를 몰아 무사히 주차에 성공했다. 성호는 혹시나 벤틀리에 스크래치를 낼까봐 조심스럽게 차문을 열고 천천히 차에서 내린 후 대리기사에게 현금 17,000원을 건네주었다.

“수고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손님. 그리고...”

“요금이 좀 부족한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저... 힘내세요.”

“네? 아... 네. 고맙습니다.”

성호는 대리기사와 헤어지고 나서도 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

“내가 술김에 너무 청승을 떨었나. 쪽팔리게.”

불과 1년하고 4개월 전 까지만 해도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성호는 타인의 동정이 더 낯설고 괴로웠다. 그 때 성호의 눈에 자신의 차가 들어왔다. 대학교 1학년 때 과외를 좀 더 많이 뛰려고 중고로 샀던 흰색 모닝. 벌써 9년 째 성호와 함께 정말 열심히 뛰어 준 모닝의 모습이 꼭 전쟁을 마치고 귀향한 상이용사처럼 지쳐보였다.

“꼭 내 처지 같군.”

성호는 제대 후의 장래를 생각해보았다. 가정형편을 고려했을 때 유학은 이제 분명히 무리다. 그래도 어찌됐든 아직 굴러가는 저 낡은 모닝처럼 자신도 아마 어떻게든 살아 낼 것이다. 학자가 되지 않으면 취업률 최악인 사학전공자에 30대 신입이지만 과외경험을 살려 학원선생이 되거나 다시 예전 학생들의 소개로 과외를 하면 생계에 지장은 없을 같았다. 다만 목표가 사라지고 생존만이 남은 삶을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성호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살기 싫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갑자기 서쪽 하늘에서 몰려온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면서 폭풍우가 몰아쳤다.

“뭐야. 갑자기 날씨가 왜이래?”

성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때 성호를 향해 번개 한줄기가 떨어졌다.

- 콰앙!

번개를 맞은 성호는 우레 소리가 그치자마자 그 자리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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