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3화 (3/201)

[ 3 ] [2화] 오늘부터 하스드루발 바르카

“한니발, 하스드루발. 어제 타니트 신전에서 했던 것처럼 바알 함몬 님께 맹세해라.”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어린 두 아들에게 말했다. 180cm 정도의 큰 키에 체격이 다부진 남자의 이름은 하밀카르 바르카. 몇 년 전 로마와 카르타고가 20년 넘게 벌인 전쟁에서 마지막 7년간 군대를 이끌어온 카르타고의 장군이다.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높이가 10m는 되어 보이는 바알 함몬의 석상 앞에 놓인 제단 앞으로 다가갔다. 제단에는 네발이 묶인 양 한 마리가 놓여있었다.

두 소년이 다가오자 제단 옆에 서있던 신관이 의식용 단검으로 양의 목을 베어 흘러나온 피를 접시에 담아 한니발에게 가져갔다. 한니발은 약지와 중지에 피를 묻혀 자신의 양쪽 볼에 바른 후 바알 함몬의 석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불멸이신 폭풍우와 번개의 지배자. 위대한 바알 함몬께 맹세하오니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한니발 바르카는 이 시간 이후 당신의 검이 되어 로마의 심장에 칼을 꽂거나 제 심장에 칼이 꽂힐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겠습니다.”

9살 소년의 목소리는 출전을 앞둔 장수처럼 비장했다. 한니발이 맹세의 의식을 마치자 신관은 피가 담긴 접시를 하스드루발에게 가져갔다. 하스드루발도 형 한니발과 같은 방법으로 볼에 염소 피를 바른 후 맹세를 했다.

“불멸이신 폭풍우와 번개의 지배자. 위대한 바알 함몬께 맹세하오니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 시간 이후 당신의 검이 되어 로마의 심장에 칼을 꽂거나 제 심장에 칼이 꽂힐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겠습니다.”

이제 겨우 4살인 하스드루발은 어제 아버지가 딱 한번 들려준 맹세의 말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매끄럽게 말했다. 그러나 형과는 다르게 시키니까 마지못해 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밀카르는 그런 하스드루발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머리는 정말 좋은데 형 같은 열정이 느껴지질 않으니.’

맹세의 의식이 끝나고 세 사람이 신전 밖으로 나서려는데 하스드루발의 머릿속에 중저음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카르타고를 지켜라.’

마치 누군가 텔레파시로 말을 거는 듯한 신기한 느낌이었다. 하스드루발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런 하스드루발을 보고 하밀카르가 물었다.

“하스드루발. 왜 그러느냐?”

하스드루발은 하밀카르와 한니발에게는 그 음성이 들리지 않은 것을 눈치 챘다. 하스드루발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바알 함몬 님께 혼자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밀카르는 그런 하스드루발의 말이 놀라우면서도 반가웠다. 똑똑하지만 매사에 수동적이었던 하스드루발이 뭔가를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우리는 먼저 돌아가마. 실레노스에게 신전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할 테니 기도가 끝나면 같이 돌아오렴.”

“알겠습니다. 아버님.”

아버지와 형이 먼저 돌아간 후 하스드루발은 신관에게 혼자 기도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한 다음 홀로 바알 함몬의 석상 앞에 섰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하스드루발이 석상을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이었군?”

하스드루발은 그렇게 말한 후 잠시 석상을 노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번개로 지진다음 여기로 환생시킨 게 당신이었군?”

그러자 다시 하스드루발의 머릿속에 같은 음성이 울려 펴졌다.

‘카르타고를 지켜라.’

하스드루발은 땅을 보며 한 숨을 푹 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석상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켜는 드릴게. 나도 역사대로 전쟁터에서 한창 나이에 목 잘려 죽긴 싫고. 지금의 가족들에게도 정이 많이 들었으니까. 오늘 이 시간 이후로 하스드루발 바르카로 살면서 카르타고를 지키겠다. 대신 앞으로 당신 신자들 사고방식은 좀 손 봐야겠어. 난 인신공양 극혐이거든.”

신관이 봤으면 거품을 물고 졸도할만한 불경한 광경이었다. 카르타고의 주신 바알 함몬의 석상 앞에서 거침없이 독설을 내뱉는 미운 네 살은 바로 환생한 성호였다.

* * *

성호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번개를 맞은 후 처음으로 눈을 떴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눈꺼풀을 열었지만 물체의 형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밝고 어두운 정도만 간신히 구분할 수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팔다리도 힘이 잘 들어가지 않고 말을 하고 싶어도 입에서는 아기 옹알이 같은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성호는 자신이 증중 장애인이 되어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말았다.

‘내가 장애인이라니! 내가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장애인이라니!’

성호는 절망적인 착각에 눈물도 나오지 않아 멍청히 누워있었다. 자신이 장애인이 아닌 아기로 다시 태어난 것을 깨달은 것은 세 시간 정도 후였다. 간호사가 팔에 링거 주사를 놓는 대신 유모가 젖을 물렸기 때문이다.

‘아오 당황스럽네. 요즘 세상에 젖병을 쓰지 왜 가슴을 들이대고 그래. 신생아 시력은 0.01 정도라고 했었지. 그래서 눈이 잘 안보였구나. 그나저나 여기는 대체 어디일까?’

그 때 갑자기 밝았던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면서 말을 하고 있나?’

성호는 여자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고 여자가 반복적으로 말하는 한 단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스드루발? 그거 내 이름인가? 무슨 페니키아 사람 이름 같잖아. 여기 혹시 고대 페니키아 아니야?’

성호는 어렸을 적부터 그 유명한 고대 해양대국 카르타고를 비롯한 여러 해양 도시국가를 건설한 민족 페니키아인에 관심이 많았다. 그 때문에 해외 유학도 페니키아사 연구로 유명한 프랑스로 가려고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그 상황이 마냥 달갑지는 않았다.

‘혹시 정말 과거로 전생한 거면 우리 부모님은 어쩌고!’

그렇게 불안감에 휩싸여 5개월 정도를 보내는 동안 시력이 어느 정도 발달해 사물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인은 한명도 없고 구릿빛 피부의 외국인 밖에 안보이네. 옷차림도 전부 튜닉이고. 특히 저 부티 나는 여자가 입은 자주색 튜닉! 저건 빼박 페니키아 스타일이잖아! 나 정말 고대 페니키아에 전생했구나.’

불안이 확신이 되자 항암치료로 머리가 빠져 모자를 쓰신 아버지와 나무껍질처럼 거칠어진 손으로 식당 주방에서 생선을 손질하는 어머니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성호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응애! 응애!”

놀라서 달려온 유모가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아줬지만 성호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성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다 잡은 건 그로부터 6개월 후였다. 자신이 슬퍼한다고 예전 인생의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걱정도 들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매일같이 울어대면 인신공양 당해버릴지도 모르겠다.’

페니키아인들은 나라나 가정에 재난이 닥칠 때 신에게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성호는 원칙적으로 장남이 제물로 바쳐지고 자신에게 형이 한명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매일 우는 둘 째 아들에게 지쳐버린 이번 생의 부모가 융통성을 발휘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제로 여차할 때 친자식 대신 제물로 바치려고 몰래 양자를 들이는 일도 있었다는데 둘째라고 못 바치겠어? 조심해야지.’

그나마 학사장교로 입대하기 직전에 부모님을 보험금 수령인으로 해서 생명보험을 들어놓은 것이 조금 위안이 됐다.

‘뭐 그렇다고 우리 엄마 아빠가 그 전설적인 보험광고처럼 보험금 10억 받으시자마자 화사하게 웃으시지는 않겠지만.’

성호는 전생을 피할 수 없다면 즐기기로 했다. 사실 덕심을 동기로 페니키아사 연구를 했었던 그에게 지금의 세상은 보물창고나 마찬가지였다. 21세기에는 페니키아사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사료나 유적이 상당히 빈약했기 때문이다.

‘빨리 말을 배우고 싶다! 이것저것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듣기도 말하기도 못하니 이거 원!’

그 일념으로 성호는 쉬지 않고 옹알이를 하며 페니키아어를 배웠다. 그 모습을 본 이번 생애의 어머니는 안심하며 기뻐했다.

“유모. 우리 하스드루발이 매일 울기만 해서 걱정이었는데 이제 잘 울질 않네! 남편 따라 전쟁터였던 시칠리아에 갔을 때 태어난 아이라 카르타고의 신들께서 이 아이를 축복하지 않으신 건 아닌 지 불안했었어. 말을 빨리 하려는지 요즘 옹알이도 참 열심히 해.”

“그러게 말이에요 마님. 타니트 여신께서 하스드루발 님을 보살피시나 봅니다. 하밀카르 장군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실지!”

그러나 둘째 아들이 말을 빨리 배우기를 기대하던 이번 생의 부모는 하스드루발이 그렇게 빨리 유창하게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 *

페니키아어를 완전히 익힌 후 성호는 숨통이 트인 느낌이었다. 본격적으로 주변의 대화를 귀담아 듣고 따라서 말하기 시작한지 1년이 조금 지난 2살 때였다.

“언어공부를 많이 해두길 잘했지.”

성호는 이전 생애에 사료나 해외논문을 분석하기 위해 영어나 불어는 물론이고 라틴어와 코이네 그리스어를 배운 경험이 있었다. 고대 페니키아어는 다른 언어들과 달리 학습자료를 구하지 못해 제대로 배울 수 없었지만 외국어를 배우는 감각은 살아있었던 것이다.

성호는 서툰 걸음걸이로 집 안을 뽈뽈 거리면서 돌아다니다 마주치는 가족들이나 하인들을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귀찮게 하기 시작했다. 집안은 상당히 넓고 인테리어가 화려했는데 마주치는 하인들마다 아직 두 살밖에 안된 자신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야! 드디어 내가 금수저 인생 살아보나 보다! 이정도면 앞으로 고생할 후학들을 위해서 페니키아 역사서나 쓰면서 호의호식 하고 살 수 있겠다!’

그러나 그 기쁨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성호는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저택 안을 돌아다니다 갑옷을 입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님 검술 훈련 하러 가십니까?”

무장 중이던 하밀카르는 갑옷의 끈을 묶다말고 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살짜리 아들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란다. 또 전쟁터에 가봐야겠구나.”

“또 리비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나요?”

카르타고의 속주인 리비아의 주민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는 건 대부분의 카르타고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역시 두 살짜리가 알만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하밀카르는 놀란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겨우 2살짜리 어린 아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하지만 성호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하밀카르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성호에게 말했다.

“리비아에서 또 반란이 일어나긴 했지. 그렇지만 오늘은 옛 전우들과 싸우러 가는 길이란다.”

“전우와 싸우시다니요?”

“로마와 우리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두고 싸울 때 함께 싸우던 용병들 말이다. 부끄럽게도 우리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패배하고 막대한 보상금을 물게 됐단다. 그래서 용병들에게 줘야할 돈을 다주지는 못하게 되었고. 이 상황을 이해 못한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켰지. 부끄러운 일이야.”

성호는 순간 전생에서 번개를 맞을 때와 비슷한 충격을 받았다.

‘뭐? 용병이 반란? 그 전에는 로마랑 전쟁을 했다고? 그거 용병전쟁이랑 1차 포에니 전쟁이잖아! 그리고 우리 집안 성이 분명 바르카였지. 그럼 난 명장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

성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역사대로라면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형이 일으킨 2차 포에니 전쟁에 참여했다가 기원전 207년에 전사하고 로마군은 그의 머리를 잘라 형 한니발의 눈앞에 던지기 때문이다.

‘워낙 동명이인이 많은 페니키아인이니까 설마 했는데. 진짜 그 하스드루발 이었다니.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죽은 건 한니발이 아마 40살 정도 됐을 때였지? 그런데 나는 형이랑 5살 차이고. 그럼 나 역사대로면 35살에 목 잘려 죽네?’

성호는 자신도 모르게 한국말로 욕을 하고 말았다.

“씨발...”

“그게 무슨 소리냐 하스드루발? 처음 듣는 말이구나.”

“아... 아무런 뜻도 없어요! 아버지.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성호는 그 말을 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그 후로 성호는 이번 생의 가족들을 버리고 목숨을 지켜 역사덕후 김성호로 살아갈지, 아니면 바르카 가문과 카르타고를 지키기 위해 하스드루발 바르카로 살아갈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바알 함몬의 신전에서 하스드루발로 살며 카르타고를 지키기로 맹세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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