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5화 (5/201)

[ 5 ] [4화] 카르타고의 평민, 대한민국의 서민

“으아아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책상 앞에 앉은 하스드루발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이대로 역사가 흘러가면 앞으로 벌어질 2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패배한다.

그는 바알 함몬 신전에서의 맹세 이후 카르타고가 패배하고마는 원인을 밝히고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궁리해왔다. 그렇게 두달을 고민한 끝에 찾아낸 가장 중요한 원인은 아래와 같다.

1. 용병에 의존하는 병역시스템

카르타고 육군은 군 지휘관과 고급장교만 카르타고 시민을 임명하고 나머지는 주로 용병과 속주민 징집병으로 충당했다. 그러다보니 전쟁이 장기화되면 나라의 곳간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반면 이 시대의 공화정 로마는 국민개병제를 실시하고 있어 전쟁이 나면 로마시민들은 거의 한국군 이병 수준의 보수만 받고 전쟁터로 나갈 뿐만 아니라 무장도 자비로 마련한다. 한마디로 카르타고군은 로마군보다 전쟁지속력, 스테미너가 부족하다.

2. 우수한 군 지휘관의 부족

하스드루발의 아버지 하밀카르는 의심의 여지없이 S급 지휘관이다. 형 한니발도 앞으로 SS급 지휘관으로 자라날 것이다. 하지만 카르타고의 600년 넘는 역사에서 내세울만한 무장은 이 둘뿐이다. 반면 로마에는 A급 지휘관이 차고 넘친다.

원인은 고급장교가 카르타고인 귀족으로만 구성되는데도 귀족들이 대체로 병역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군복무 경험이 없으면 원로원 의원 등 사회 최상류층이 될 수 없었던 로마와 달리 카르타고에서는 재산이 많고 인맥이 좋으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될 수 있었다.

바르카 가문 같은 명문가의 일원이 군 지휘관이 되는 경우는 대단한 애국자이거나 터무니없는 야심가일 때뿐이었다.

하스드루발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평민들은 해군에 자원입대라도 하지. 상류층 병역기피 증상이 21세기의 어느 나라하고 아주 빼다 박았네. 빼다 박았어.’

그러나 위의 두 문제는 마지막 문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3. 상류층의 지나친 탐욕과 국난에 대한 무관심

저번 1차 포에니 전쟁 막바지에 로마와 카르타고 양쪽 정부는 모두 재정이 바닥나 전쟁을 질질 끌고 있었다.

그 때 대부분의 카르타고 부자들은 자기 집 금고 문을 단단히 잠그고 목욕탕에서 때나 밀고 있었지만 로마의 부자들은 미적거리는 정부를 비판하며 재산을 기부해 군함 200척과 선원 6만 명으로 이뤄진 정규군 급 의병을 조직했다. 그리고 그 의병들이 지쳐있던 카르타고군에 결정타를 날려 전쟁을 끝냈다.

역사대로라면 이런 현상은 2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계속되어 결국 카르타고의 패배에 가장 큰 원인이 된다.

하스드루발은 머리를 쥐어뜯는 것도 부족한지 절구 찧든 책상에 이마를 계속 박아댔다.

“역사를 알면 뭐해! 네 살짜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 뿐이잖아!”

그러던 하스드루발이 뭔가 깨달은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이런 놈들을 뭐 하러 지켜? 나라가 망해 가는데 군대도 안가고 돈도 안내는 놈들을?”

하스드루발은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비르사 언덕위에 있는 바알 함몬 신전을 향해 한국어로 외쳤다.

“어이! 바알 함몬! 나 그냥 바르카 가문 사람들 데리고 로마에 귀순하면 안 될까? 거기다 당신 신전도 근사한 걸로 하나 세워줄게!”

그 때 하스드루발의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스드루발.”

하스드루발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 곳에는 형 한니발이 서있었다.

‘아오 하필이면 이런 장면을 걸려버렸네. 뭐 하는 짓이냐고 물어보겠지? 뭐라고 대답 한다?’

그러나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가자. 하스드루발.”

“어? 나가자고? 어디로?”

“시민광장.”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에게 이끌려 카르타고의 구 시가지에 있는 시민광장에 갔다.

처음에는 뜬금없이 외출을 하자고 한 형의 행동이 굉장히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고대 카르타고의 구 시가지 풍경을 보자 고개를 든 역사 덕후의 덕심이 금방 의구심을 덮어버렸다.

그동안은 부유층 거주지에 있는 신전이나 대저택 같은 큰 건물만 보아왔고 평민들이 사는 건축물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기원전 3세기에 중정(中庭)이 달린 6층 건물이라니! 한국 아파트랑 생긴 게 별로 다를 것도 없잖아. 아직 한반도는 고조선시대라 움집에 사는 사람도 많을 텐데. 어? 저건 뭐야? 가죽조각을 화폐로 써? 완전 지폐네! 지폐! 카르타고가 명목화폐(名目貨幣)를 사용했다는 게 정말이었군!’

하스드루발이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두 사람은 구 시가지 한 가운데 있는 시민광장에 도착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 치면 아고라(Agora)에 해당되는 공간이었다.

다만 아고라가 상행위는 물론 다양한 토론이나 문화행사도 자주 이뤄진 종합문화공간이라면 카르타고의 시민광장은 상행위의 비중이 높은 상업지구의 느낌이 강했다.

카르타고의 건축물과 민속문화에 정신이 팔려있던 하스드루발은 광장에 들어설 때부터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이 아직 어린 두 형제와 마주칠 때마다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명문가 자제인걸 알아봐서 그런 건가? 그래도 너무 많이 알아보는데?’

그러나 하스드루발이 자세히 살펴보니 시민들은 두 형제가 아닌 한니발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평소 시민광장에 자주 나와 평민들과 친분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게 앞을 지날 때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중년 남자가 한니발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한니발 도련님. 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에 뵀을 때보다 키가 조금 자라셨군요.”

“오랜만이야 이토바알. 자네 대장간은 요즘 잘되나?”

이토바알은 한숨을 푹 쉬면서 대답했다.

“요즘은 정말 힘듭니다. 3년 전부터 수출이 확 줄어들면서 저희 같은 평민들은 아주 죽을 맛입니다. 경기가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아요.”

이토바알의 말에서 하스드루발은 예상하지 못한 그리움을 느꼈다.

‘평민을 서민으로만 바꾸면 21세기 한국에서 들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겠네.’

고대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카르타고의 평민들 중에는 농부가 거의 없었다. 수천 명의 노예를 거느리며 대농장을 경영하는 귀족들이 토지를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귀족이 아닌 카르타고 시민들은 대부분 임금노동자이거나 소상공인 이었다. 마치 21세기의 대한민국처럼.

그렇기 때문에 해외무역 활성화를 목표로 삼는 바르카 가문이 평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수출이 줄어들면 소상공인이 가게 문을 닫았고 소상공인이 가게 문을 닫으면 임금노동자가 끼니를 걸렀기 때문이다.

그 때 근심스러운 표정의 남자가 먼발치에서 다가왔다. 한니발과 이토바알 사이에 다짜고짜 끼어든 남자가 한니발에게 물었다.

“한니발 도련님! 바르카 가문이 곧 카르타고를 떠나 히스파니아로 이주한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이토바알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두 손으로 한니발의 팔을 붙잡았다.

“한니발 도련님! 저 말이 사실입니까? 절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바르카 가문이 카르타고를 떠나면 누가 저희 평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겠습니까! 부디 하밀카르 장군님께 떠나시지 말라고 해주십시오!”

이토바알의 만류에 한니발은 아홉 살 답지 않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물을 거둬라 이토바알. 바르카 가문은 카르타고의 시민들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히스파니아로 떠나는 건 카르타고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지 버리기 위함이 아니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아버지 하밀카르는 얼마 전 현대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지역인 히스파니아를 정복하기 위해 바르카 가문 전체를 그곳으로 이주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카르타고 부흥을 위해서는 히스파니아의 풍부한 은 광산을 차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밀카르는 그곳에서 얻을 수입으로 단기적으로는 로마에게 서지중해 무역독점권을 빼앗겨서 발생한 국가재정 손실을 보충하고 장기적으로는 로마와 싸워 무역독점권을 되찾기 위한 군자금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이토바알이 소란을 부리는 바람에 바르카 가문이 곧 카르타고를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민들이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시민광장은 금세 수천 명의 시민들로 가득 찼다. 모여든 시민들은 하나같이 한니발에게 카르타고를 떠나지 말라고 아우성을 치며 두 형제의 길을 막았다.

그 때 한니발이 두 형제의 주변에 모여든 시민들에게 말했다.

“카르타고의 시민 여러분. 오늘 저 한니발과 제 동생 하스드루발은 여러분께 작별인사를 하려고 광장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해양민족인 카르타고인이 배를 타고 나갈 때마다 작별인사를 하며 눈물의 송별회를 벌인다면 언젠가 비르사 언덕위의 바알 함몬께서는 눈물로 목욕을 하시게 될 겁니다.”

아홉 살 소년의 농담에 눈물을 글썽이며 아우성을 치던 시민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저희 형제는 오늘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이 지켜야 할 것을 저희들의 눈과 가슴에 새기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한니발이 이름을 부르는 시민들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방금 제 팔을 붙잡던 대장장이 이토바알.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은 그가 만든 검을 들고 적과 싸웁니다. 저쪽에 서있는 노잡이 멜카르트샤마. 그가 노를 젓기에 무역선이 항구를 떠납니다. 그리고 제 왼쪽에 서있는 염색장이 바알리아톤. 그가 염색약을 만드는 덕분에 우리는 페니키아의 상징인 짙은 자주색(Tyrian Purple)으로 물들인 튜닉을 입습니다.”

한니발은 주변의 시민들 한명 한명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바르카 가문이 지켜야 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시민 여러분의 일상 말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이야말로 카르타고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하면서 한니발은 하스드루발과도 눈을 마주쳤다. 하스드루발은 팔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한니발 형은 나에게 저 말을 하고 싶어서 여기로 데려왔구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가? 환생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저렇게 어린나이에...’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연설을 들으면서 점점 얼굴이 잊혀져가는 이전 생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주변의 시민들과 겹쳐 보이는 것을 느꼈다.

‘역사를 그냥 흘러가게 놔두면 몇십년 후에는 이 광장에 저 사람들의 피가 강물처럼 흐르겠지.’

한니발은 이제 슬픔이 아닌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리는 시민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그러니 카르타고의 시민 여러분. 부디 일상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저와 제 동생은 여러분의 모습을 눈과 가슴에 새기고 떠나 해양대국 카르타고의 위상을 되찾은 다음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한니발이 말을 마치자 광장의 시민들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하지만 하스드루발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돌아올 수 있을까.’

역사대로라면 바르카 가문의 히스파니아 정복사업은 성공적이다. 그러나 그 성공을 기반으로 시작한 로마와의 전쟁.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한 후 고향으로로 돌아오게 되는 바르카 가문의 사람은 한니발 뿐이다. 그것도 히스파니아로 떠난 지 무려 36년이 지난 후에.

“하스드루발.”

생각에 빠져있던 하스드루발이 한니발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한니발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하스드루발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하스드루발.”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따듯한 목소리였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손을 잡았다.

“까짓 거 가보자 형.”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