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 [5화] 인생은 타이밍! 역사도 타이밍?
“이거 철새들이 아주 엉덩이가 들썩들썩 한 모양이구만?”
하스드루발은 누미디아의 사절단을 데리고 히스파니아로 온 노잡이 멜카르트샤마가 건네 준 파피루스를 펼쳐보면서 말했다.
“그럴 수밖에요 도련님. 얼마 전에 히스파니아에서 보내온 은괴를 보고 카르타고 시민들이 얼마나 열광했는지 모릅니다!”
그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라고 일부러 덮개 없는 수레에 실어서 원로원까지 천천히 가져가라고 했는데.’
“도련님도 그 모습을 보고 벌레 씹은 표정을 짓던 대 한노를 보셨어야 하는데!”
3년 전 바르카 가문은 히스파니아로 이주하기 위해 카르타고를 떠났다. 그 날 많은 시민들이 바르카 가문을 배웅하는 모습을 보고 대 한노는 점잖은 척 거드름을 피우며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하밀카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히스파니아 땅에 은이 많긴 하지. 그런데 그 땅의 야만인들이 리비아인처럼 호락호락할 줄 아나?”
사실 대 한노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히스파니아는 몇몇 그리스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토를 부족단위의 원주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베리아족과 켈트족으로 불리는 이 부족민들은 용맹스럽고 호전적이었으며 게릴라전에 뛰어났다.
카르타고는 오래 전부터 히스파니아의 해안가에 몇 군데 무역거점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 거점들은 늘 원주민 부족들의 습격에 시달려왔다.
대 한노가 정복해온 농경민족 리비아인들에 비하면 히스파니아의 부족들은 ‘전투민족’이라 부를 만한 강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밀카르는 뛰어난 지휘력으로 히스파니아 정복사업을 시작한지 불과 2년 만에 벌써 은이 매장된 지역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주 3년 차인 이번 해에 처음으로 은광을 개발하여 본국에 은 50달란트(고대의 무게·화폐 단위/1달란트는 약 26kg~34kg)를 보냈다.
사실 액수로만 보면 바르카 가문이 보낸 은은 그 당시 지중해 최고의 부국(富國) 카르타고의 재정에 약간 보탬이 되는 정도였을 뿐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 갑자기 서지중해 무역독점권이라는 막대한 국가예산 수입원이 사라진 상황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이 카르타고 시민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액수가 얼마 안 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예산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은 50달란트는 카르타고 임금노동자의 약 800년 치 연봉과 맞먹는 거금이다. 평소에는 가져보기는커녕 볼 기회도 없는 엄청난 양의 은 덩어리를 보고 평민들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당연했다.
‘나도 전생(前生)에 눈앞에 5만원 짜리 지폐가 몇 백억 원 쌓여있으면 아마 눈이 튀어나왔겠지.’
하스드루발은 보고 있던 파피루스를 돌돌 말고나서 멜카르트샤마에게 은화가 든 가죽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수고 했어 멜카르트샤마. 카르타고에 돌아가서 정보를 모을 때 도와준 사람들에게 와인이라도 한잔 사줘.”
“아니! 대수롭지 않은 수고에 20세겔이나 주시다니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스드루발님. 타니트 여신께서 바르카 가문을 지켜주시길!”
80일치 임금을 부수입으로 얻은 멜카르트샤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하스드루발의 방을 나갔다. 하스드루발의 입가에도 미소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좋았어! 본국에서 중도파가 해외파로 돌아서고 있구만!”
노잡이 멜카르트샤마가 가져온 파피루스에는 카르타고 100인회 의원들의 동향이 적혀있었다.
카르타고의 정부는 하급관료들을 제외하면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로 수페트.
카르타고 정부의 최고위직으로 시민들이 선거로 2명을 선출한다. 로마의 집정관, 한국의 대통령과 비슷한 직책으로 행정과 대법관의 역할을 했으나 임기도 1년으로 짧고 생각보다 권한도 작았다.
둘째로 원로회의.
카르타고의 국정 자문기관. 영국 국회의 상원과 비교할 수 있는 권위 있는 기관이지만 입법보다는 자문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기관이다. 수페트와 마찬가지로 시민들이 1년에 한번 28명을 선출한다.
셋째로 100인회.
흔히 100인회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104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기관이다. 원래는 국정감사 기능과 판사 역할을 맡기기 위해 만든 기관이지만 어느새 행정, 입법, 사법을 모두 주도하는 최고의 권력기관이 되었다.
문제는 종신직인 이들을 시민들이 선출하지 않고 명문 귀족들끼리 뽑는다는 점이다.
한국으로 치면 재벌들이 자기들끼리만 밀실에서 쑥덕거려 판사의 권한까지 가진 국회의원을 뽑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외에도 민회가 있었지만 북한의 위성정당처럼 사실상 실권이 없는 장식적인 기관에 불과했다.
하스드루발은 장차 로마와 전쟁을 벌일 때 카르타고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바르카 가문을 지원하게끔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일단 본국의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필요가 있었고 그 정보를 아버지의 인맥을 활용해 해외파 의원들과 평민들에게서 얻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카르탈론 의원이 한 달 째 바알리아톤 의원하고 목욕탕에 같이 다닌단 말이지? 이 양반도 국내파에서 중도파가 됐다고 봐도 되겠네. 그럼 이제 해외파 25%, 국내파 45%, 중도파 30% 정도인가? 그래도 아직 간당간당 하구만.”
중도파는 해외무역과 대농장 양쪽에 재산을 분산투자 한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상인정신이 투철한 카르타고 인들 중에서도 특히 돈에 민감했고 한 계파의 중론을 따르기보다는 그 때 그 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을 지지했다.
‘이 철새 무리들을 계속 아군으로 두는 건 어렵겠지. 그저 한 타이밍. 전쟁이 한창일 때. 딱 그 때만이라도 해외파를 지지하게끔 해야 돼.’
그 때 누군가 하스드루발의 방문을 두들겼다. 시중을 드는 하인이 방문 밖에서 말했다.
“하스드루발 님 누미디아에서 온 사절단과 만나실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금방 준비하고 나갈게.”
검술 훈련을 하다말고 멜카르트샤마를 만났던 하스드루발은 서둘러 훈련복을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사절단과 만나는 자리에 도착하니 이미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도착해 있었다.
“하스드루발. 왜 이리 늦었느냐?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사절단 일행 분들과 인사를 나눴다.”
아버지 하밀카르가 도끼눈을 부릅뜨며 하스드루발을 꾸짖었다. 하스드루발이 아버지와 사절단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먼 길을 오신 분들께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사절단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일곱 살이시라고 들었는데 아주 의젓하시군요. 카르타고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가업을 잇기 위한 교육을 받느라 놀 시간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분명 학업에 힘쓰다 시간가는 줄 모르셨던 거겠지요.”
하스드루발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절단의 말이 고마워 눈물을 찔끔 흘릴 뻔 했다.
‘내 말이! 석사 논문 쓸 때 보다 요즘이 더 빡세다 진짜.’
카르타고의 아이들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다섯 살만 되면 어릴 때부터 가업을 잇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바르카 가문 같은 경우 귀족가문의 아들들이 흔히 받는 무역실무, 농장경영은 물론이고 병법, 승마, 무술, 요새건설 같은 군사 교육도 소화해야했다.
그것만으로도 벅찬데 자는 시간도 쪼개가며 역사를 바꾸기 위한 ‘딴 짓’도 하고있으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하밀카르가 사절단에게 하스드루발을 소개했다.
“마실리 부족 여러분. 정식으로 소개드립니다. 제 둘째아들 하스드루발입니다. 제 옆에 있는 둘째 사위하고 이름이 같아서 혼동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자 사절단장이 능숙한 유머로 하밀카르에게 대답했다.
“어디 이름이 같은 정도로 사람을 헷갈리면 카르타고의 진정한 동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40만 카르타고 시민 중 5만 명은 이름이 하스드루발일 텐데요!”
워낙 동명이인이 많은 페니키아인을 소재로 한 농담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지만 하스드루발은 웃을 수 없었다.
‘마실리 부족! 오늘 누미디아에서 온 게 마실리 부족이었었구나!’
마실리 부족은 카르타고의 속주 누미디아에 사는 유목민족으로 카르타고의 오랜 동맹이다.
마실리 부족은 앞으로 벌어질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와 함께 로마를 상대로 싸워 많은 전과를 올리게 된다.
그러나 전쟁 말기 마실리 부족이 어려운 상황에 쳐할 때 카르타고의 100인회는 그들을 배신해버리기로 결정한다.
이에 격분한 마실리 부족은 그 후로마의 편에 선다. 로마군의 지원을 받아 누미디아를 통일한 마실리 부족은 끊임없이 카르타고를 공격하고 결국 카르타고가 멸망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내가 100인회에 신경 쓰는 이유 중 하나가 그놈들이 마실리 부족을 배신하지 못하게 하려는 건데. 오늘은 일단 좋은 인상을 남겨야겠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담화가 끝난 후 하밀카르는 아들들과 함께 사절단을 히스파니아에서 정복한 영토를 견학시키로 했다.
바르카 가문은 동맹부족에게 아직 카르타고의 국력이 건재함을 과시할 수 있고 마실리 부족은 맹주국의 유력자가 이룬 성과를 칭찬하여 환심을 살 수 있어 서로에게 의미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여기가 대장간 입니다.”
하밀카르가 사절단을 대장간으로 안내했다. 사절단은 한 가문의 수장 보다는 작은 나라의 국왕에게 더 어울릴 것 같은 큰 규모의 대장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때 한 직공이 하밀카르가 사절단 일행과 대화하는 동안 기다리고 있던 하스드루발에게 다가왔다.
“하스드루발 도련님 오셨습니까? 저번에 말씀하신 물건 만들어 뒀습니다. 한번 보시지요.”
직공은 발걸이가 달린 나무로 만든 말안장을 손에 들고 있었다. 바로 등자(橙子)였다. 하스드루발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직공에게 소리쳤다.
“아니 그걸 왜 지금 갖고 와!”
서양에 처음 등자가 전해진 건 기원후 8세기 쯤으로 그 전의 기수들은 주로 안장과 고삐만 사용하여 말을 탔다.
등자 없이 말 등위에서 균형을 잡으려면 다리로 말 옆구리를 꽉 조여야 했기 때문에 기수는 대단한 다릿심과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했다.
이 때문에 기병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승마훈련을 시켜야 했기 때문에 고대의 국가들은 많은 기병을 보유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등자 발명 이 전에는 기병의 충격력도 약한 편이어서 많은 고대국가들이 기병을 양성할 동기를 찾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한니발과 싸우기 이전의 로마는 기병을 그저 정찰병이나 연락병, 패잔병을 추격하는 용도로만 활용하고 있었다.
등자는 역사 지식은 석·박사 급이지만 공학 지식은 고등학생 수준인 하스드루발이 당장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미래의 병기였다. 문제는 제조과정이 간단한 만큼 적군도 쉽게 따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오 진짜 X같은 타이밍에 가져오네. 내가 지금 [아아. 이 것이 등자란 것이다.] 이러면서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녀봐라. 그럼 로마는 [우와! 그게 등자로구나?] 이러면서 미친 듯이 기병을 양성해대겠지? 한니발 형이 로마군한테 승승장구 하게 되는 게 다 로마보다 앞선 기병전력 덕분인데. 저거 공개 타이밍 각 잘못 쟀다간 알프스 산맥 넘자마자 로마의 10만 중기병 한테 벌집 된다.’
그 때 마실리 부족의 사절단장이 하스드루발에게 다가왔다.
“호오. 이것 참 흥미로운 물건이군요? 나무로 만든 안장에 발걸이를 다신 겁니까? 신입기병을 훈련할 때 아주 유용하겠습니다.”
하스드루발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 식은땀 한 방울이 속옷을 적셨다. 미래에 적이 될지도 모르는 마실리 부족의 고관이 등자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뭐라고 말하지? 뭐라고 말해야 저 인간이 등자에 흥미를 잃을까?’
하스드루발은 찰나의 순간에 수십 가지 대답을 검토한 끝에 가장 알맞은 대답을 했다.
“제 둘 째 누나 살람보가 승마를 배우고 싶어 해서 만든 장난감입니다. 바르카 가문의 남자가 저런 유치한 물건을 덜렁 거리면서 달리면 히스파니아의 부족들이 카르타고를 얼마나 얕보겠습니까?”
“그건 그렇군요. 저희 누미디아인들은 안장이나 고삐도 없이 말을 타는데 지휘관이 저런 물건을 달고 말을 타면 병사들이 비웃을 겁니다.”
사절단장의 말에 하스드루발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앞으론 보안을 더 중시해야겠다. 뭘 하든 타이밍 뻐그러지면 다 끝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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