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 [6화] 위대한 삼류(三流) [1]
현대의 스페인에서는 라만차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히스파니아 중부내륙지역의 최남단. 그 지역의 어느 황량한 고원에서 두 무리의 살기등등한 병사들이 5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로의 진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르카 가문이 히스파니아 땅을 밟은 지 어느덧 8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세월동안 하밀카르는 둘째 사위 ‘공정한 하스드루발’과 함께 히스파니아 동남부해안과 그 곳에 사는 거의 모든 이베리아족을 평정했다.
이제 내륙으로 진출할 차례였다. 히스파니아의 내륙지역은 켈티베리안 이라고도 불리는 수 세기 전 갈리아에서 히스파니아로 이주한 켈트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켈트족 군대는 문명국가의 군대보다 조직력이 약했지만 병사들이 하나같이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해 개개인의 전투력이 뛰어났고 머릿수가 많아 무시할 수 없는 강적들이었다.
하밀카르가 고원지대에 들어서 진지를 구축하자 인근에 사는 켈트족 부족이 회전(會戰)을 걸어왔다.
장애물이라고는 나무 한 그루도 없는 드넓은 고원. 매복도 기습도 할 수 없는 황량한 땅에서의 전투는 투박하고 격렬한 힘과 힘의 충돌이 될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전술의 대가인 하밀카르는 그들의 도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전장에서 그리 멀지않은 토산(土山)위에서 하스드루발은 형제들과 함께 말을 탄 채로 양쪽 진영을 내려다보고 있다.
올해 12살이 된 하스드루발은 지난 8년간 다가오는 2차 포에니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실력을 쌓고자 부단히 노력해왔다. 병법을 익히고 무술과 승마를 배우고 그 와중에 미래의 역사지식을 갖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들을 강구해온 나날들.
그렇게 여느 때와 같이 검을 들고 훈련을 하던 어느 날 불현 듯 떠오른 생각에 하스드루발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나는 검도가 아닌 검술을 배우고 있다. 21세기에서처럼 정신수련이나 다이어트를 하는 게 아니야. 진짜 사람의 배를 찌르고 목을 베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하스드루발은 네 살 때 카르타고인으로 살아가기로 스스로 결정했다.
12년을 함께 살아온 부모와 형제들은 유전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이미 가족이었고 시민광장에서 함께 웃고 떠들던 카르타고 시민들도 더 이상 남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남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서 남을 죽일 수 있을까? 과연 전쟁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하스드루발은 전생까지 합쳐 40년 넘게 살아오면서 해충 이외의 것을 죽여 본 일이 없었다.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검으로 누군가의 복부를 찌르는 순간을 상상할 수도 없었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최근 몇 주일 동안 슬럼프에 빠져 제대로 훈련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스드루발은 아버지 하밀카르에게 다음에 벌어질 전투를 관전(觀戰)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전쟁이 무엇인지, 자신이 전쟁을 감당해낼 수 있을지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하밀카르는 아직 어린 아들에게 참혹한 전장을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해 거절했었지만 아들의 완강한 요청에 결국 지고 말았다.
그렇게 하스드루발은 관전자로서 전장에 나왔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몰라도 병법은 제법 아는 그는 아버지의 의도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도대체 왜 이런 곳을 전장으로 정하신 거지? 이 근방의 켈트족들은 단순해. 누미디아 기병 500기 정도만 보내서 조금 약 올리면 여기서 멀지않은 산악지역 까지 유인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기에 복병을 숨겨뒀다 협공을 하면 쉽게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
한니발이 하스드루발에게 대답했다.
“네 말대로 저들은 단순하고 우직한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책략을 쓰면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야?”
“히스파니아에 사는 켈트족은 제법 문명화 된 경우가 많지만 이 근방의 켈트족 부족들은 왠지 갈리아에 살던 선조들의 야성적인 전통을 잘 지켜온 모양이야. 튜닉이 아니라 바지를 입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켈트족은 원래 순수한 강함을 경외하는 민족이야. 저들은 이 근방 지리에 익숙한데도 매복이나 기습을 하지 않고 굳이 우리에게 회전을 걸어왔어. 이 주변 부족들 사이에서 리더 격인 큰 부족이 몇몇 군소 부족을 이끌고 나왔지.”
“그럼 이건 결투 같은 거란 말이야?”
“맞아. 책략으로 저들을 이기긴 쉬워. 하지만 그러면 주변의 켈트족 군소부족들은 리더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덤벼올 거야. 저번에는 약해서 진 게 아니라 비열한 술수에 빠져서 진거라고 생각해하면서 말이야.”
하스드루발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짜증나는 상황이네.”
카르타고 군은 총원 약 2만 500명으로 그중 16,000명이 보병이고 4,500명이 기병이었다.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징집한 이베리아족 경무장 보병 2,000명이 본대인 리비아 창병들 앞에서 산개(散開)진형을 유지하며 맨 앞에 섰다.
그들은 갑옷 없이 투구와 작은 원형 나무방패로 몸을 보호했고 서너 개의 투척용 창과 이베리아족과 히스파니아의 켈트족이 즐겨 쓰는 날이 휜 검 팔카타(Falcata)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베리아족 경무장 보병 뒤에는 바르카 가문이 카르타고에서 데려온 리비아 창병 14,000명이 배치되었다.
그들은 호플리테스라고 불리는 그리스 중장보병들의 밀집대형을 모방하여 커다란 원형 방패와 2m가 넘는 창으로 벽을 만들어 옆의 동료와 자신을 보호했다.
그러나 청동제 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그리스 중장보병과 달리 리비아 창병은 나무에 가죽을 덧대어 만든 방패들 들고 리넨갑옷(아마천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어 무장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기병들은 리비아 창병들의 좌익과 우익에 배치되었다.
우익에는 몇 년 전 마실리 부족의 사절단이 다녀간 뒤로 그 부족에서 징집한 누미디아 경기병 2,500기가 배치되었다.
누미디아 기병들은 안장도 고삐도 없이 말 등위에 올라타 말의 목에 감은 가느다란 밧줄과 작은 채찍만을 써서 말을 조종했다.
그들인 갑옷과 투구도 없이 평상복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튜닉만 입은 채로 오직 작은 원형 나무방패 하나에만 의지해 몸을 보호했고 무장도 한손에 든 투창 서너 개와 허리춤에 찬 짧은 검이 전부라 기동성이 매우 뛰어났다.
좌익에는 바르카 가문이 최근에 정복한 이베리아족에서 징집한 중무장 기병 2,000기가 배치됐다.
그들은 안장에 올라 고삐로 말을 다루었고 철이나 청동으로 만든 투구와 사슬갑옷, 나무를 몇 겹씩 덧대어 만든 튼튼한 원형방패로 몸을 보호했다. 무장은 길이 2~3m 정도의 긴 창과 장검이었다.
그에 비해 켈트족의 군대는 총원 26,000명으로 숫자에서 카르타고군을 압도했다. 다만 보병 23,000명에 기병 3,000명으로 구성되어 기병숫자에서는 카르타고군이 우세했다.
켈트족도 중앙에 보병을 배치하고 좌익과 우익에 기병을 배치했다. 카르타고군과 다른 점은 무장이 통일되어 있지 않고 대열이 들쭉날쭉 하다는 점이었다.
켈트족 보병들 중에도 간혹 갑옷을 입은 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투구와 타원형 나무방패 정도로만 몸을 보호했다. 그 정도의 보호 장비도 없는 병사가 많았는데 심지어 전혀 옷을 입지 않고 알몸에 무기만 들고 있는 병사도 있었다.
무기도 통일성이 없어서 창, 검, 도끼, 철퇴 등 다양한 무기를 든 병사들이 서로 섞여있었다.
켈트족 보병들도 일단 대열을 갖추어 서려고 하긴 했지만 정예병으로 보이는 맨 앞줄의 병사들만 그나마 줄을 맞춰 서있었고 후방의 병사들은 점심을 먹고 난 후 모여 있는 한국 예비군들처럼 오와 열이 들쭉날쭉 했다.
하스드루발이 켈트족 보병들을 보며 말했다.
“진짜 어설픈 진형이네. 저건 그냥 떼거지로 모여 있을 뿐이잖아.”
한니발이 적을 과소평가하는 동생에게 대답했다.
“그래도 얕볼 수 없는 상대들이다. 양손으로 거대한 무기를 든 켈트족 병사들은 방패 째로 적을 두 동강 내기도 한다고 들었어. 조직력이 약해서 지구력이 떨어지지만 짐승 같은 완력과 전투 초반의 폭발력은 무시할 수 없다더라.”
오합지졸 같아 보이는 켈트족 보병에 비해 켈트족 기병들은 규율이 잡혀있고 무장도 서로 비슷한 편이었다.
그들은 모두 사슬갑옷이나 청동흉갑, 미늘갑옷을 입고 있었고 나무를 여러 겹 덧대어 만든 튼튼한 나무 방패를 들고 있었다. 무장은 긴 창과 장검이었다.
켈트족은 그런 중무장 기병들을 보병으로 구성된 본대의 좌익과 우익에 각각 1,500기 씩 배치했다.
하스드루발은 전생에 가끔 봤었던 고대나 중세를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를 떠올렸다.
영화에 나오는 병사들은 하나같이 수백 미터 밖에서부터 전속력으로 적을 향해 돌진했다. 보병은 마치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기병은 경마장에서 경주를 하는 기수들처럼 바람같이 달리면서 적을 향해 돌진하는 장면은 늘 장관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전장은 영화가 아니었다. 대략 500m 거리를 두고 마주보던 두 군대는 서로를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상대의 빈틈을 노리며 한발 한발 다가오는 맹수처럼 두 무리의 병사들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서로간의 거리를 좁혀갔다.
양쪽 보병 본대 간의 거리가 50m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카르타고 군의 본대 앞에 산개해 있던 이베리아족 경보병들이 먼저 켈트족 보병들에게 일제히 투창을 던졌다.
2천개의 창들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일제히 날아가자 미쳐 방패로 막거나 피하지 못한 켈트족 병사 100여명이 배나 가슴에 창이 꽂힌 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켈트족 병사들도 미리 준비해오거나 동족의 시체에서 뽑은 투창을 이베리아족 경보병들을 향해 되던졌다.
이베리아족 경보병 몇몇이 쓰러졌지만 산개진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덕분에 피해는 미미했다.
양쪽 군대가 서로 투창을 주고받은 후 동족의 피를 보고 흥분한 켈트족 보병과 기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성난 황소무리처럼 일제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 우오오오오오!
켈트족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과 발소리가 하늘 메우고 지축을 흔들었다.
카르타고 군 본대의 리비아 창병들이 방패를 더욱 단단히 붙들어 잡고 창을 앞으로 세워 격돌에 대비했다. 그 사이 본대 좌익과 우익의 누미디아 기병과 이베리아족 기병들은 각각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 오는 켈트족 중기병들을 상대하기 위해 출격했다.
이베리아족 경보병들은 미리 연습한 대로 뒤로 켈트족의 돌격을 피해 후퇴하다 좌우로 흩어져 리비아 창병들의 측면과 후면에 자리 잡고는 팔카타를 뽑아들고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맨 앞 열의 켈트족 보병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산을 뽑을 기세로 리비아 창병의 방패 벽에 부딪혔다.
수백 명의 켈트족이 창에 찔려 피를 흘리며 쓰러졌지만 강한 충격에 리비아 창병의 진형이 흐트러지며 방패 벽에 빈틈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사이로 들어온 켈트족 병사들이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둘러 리비아 창병들을 도륙했다.
맨 앞 열의 리비아 창병들은 진형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분투했지만 체격과 완력에서 앞서는 켈트족의 기세에 버티지 못하고 점차 무너져갔다.
‘이게 바로 지옥이구나.’
하스드루발은 전장에서 눈을 돌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냉병기를 들고 격돌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지옥처럼 참혹했다. 병사들은 전장 곳곳에서 배에서 내장을 쏟거나 머리가 깨지면서 쓰러져갔고 아직 살아남은 자들은 적군과 아군의 피를 뒤집어 쓴 채 악귀처럼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았다.
본대 좌우익의 기병대들도 상대방 기병대를 격퇴한 후 아군 보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격돌하기 시작했다.
그 때 한 용맹한 기병대장이 하스드루발의 눈에 띄었다. 기병대장은 본대 좌익의 이베리아족 기병들을 이끌고 난전이 되어버린 전장 맨 앞 열에서 켈트족 기병들을 무찌르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갑옷인데. 어 저 자주색 망토 설마?’
기병대장이 누구인지 알아본 하스드루발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저런 미친! 저거 우리 아버지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