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 [7화] 위대한 삼류(三流) [2]
“저런 미친! 저거 우리 아버지잖아!”
하스드루발의 외침에 한니발과 막내 동생 마고, 그리고 삼형제를 호위하고 있던 기병들의 시선이 하밀카르에게 쏠렸다.
기병들은 물론 늘 침착하던 한니발조차 놀란 눈치였다. 아직 11살인 마고는 갑옷에 피를 묻힌 채 마상에서 적의 목에 창을 찔러 넣는 아버지를 보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은 마치 하급장교처럼 최전선에서 싸우는 아버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대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지중해 인근 여러 나라들의 군사조직이 체계화 되고 병사들도 비교적 질 좋은 무장을 갖춘 기원전 3세기이다.
이미 장수 개인의 무력이 중요시 되던 시대는 끝나고 우수한 전술과 지휘관의 통솔력이 전투의 승패를 가르기 시작한지 오래였다.
이 시대에 카르타고나 로마 같은 ‘문명국’ 군대의 총사령관이 최전선에서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경우는 아군이 적에게 포위되어 전멸하기 직전에나 벌어지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지금의 하밀카르는 단순한 군사지휘관이 아닌 본국 카르타고 정부가 정식으로 임명한 히스파니아 속주의 총독이다.
그 때 어디선가 날아온 투창이 하밀카르의 가슴을 스쳤다. 다행히 투창은 단단한 청동흉갑을 뚫지 못하고 먼발치에 떨어졌다.
하스드루발은 형제들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게 뭔 일이야? 이건 완전 포스타가 달랑 K2소총 하나 들고선 적진으로 돌격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아버지는 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그렇게 하밀카르가 이베리아족 기병들과 함께 분투하며 켈트족 기병들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을 때 다른 부대들의 전황은 한쪽이 다른 쪽을 압도하는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본대인 리비아 창병들은 이들을 지원하는 이베리아족 경보병들과 함께 방패벽을 유지하려 애쓰며 분투했다. 하지만 사기가 오른 데다 수적으로도 우세한 켈트족 보병들의 기세에 밀려 전체의 4분의 1정도가 이미 전사했고 전선도 꾸준히 뒤로 밀리고 있었다.
반면 우익에서는 누미디아 기병이 켈트족 기병들을 압도했다. 누미디아 기병들은 철저하게 근접전을 피하면서 유목민족 특유의 스웜(Swam)전술을 펼쳤다.
누미디아 기병들은 일사불란하게 벌떼처럼 움직이며 투창의 사정거리까지 켈트족 기병들에게 접근한 후 창을 던지고 도망쳤다가 다시 되돌아와 또 창을 던지기를 반복했다.
켈트족 기병들은 대부분 질 좋은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들이 탄 말에는 마갑(馬甲)이 없었다. 그 점을 잘 아는 누미디아 기병들은 집요하게 적군의 말에게 창을 던졌다.
화가 난 켈트족 기병들이 전속력으로 누미디아 기병을 쫒았다. 하지만 무거운 갑옷을 입은 중기병들이 달랑 천으로 만든 튜닉 한 장만 입고 안장도 없는 말을 탄 누미디아 기병들의 번개 같은 기동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을 추격하다 도망가는 와중에도 곡예에 가까운 승마술을 뽐내며 몸을 뒤틀어 창을 던지는 누미디아 기병들의 사냥감이 될 뿐이었다.
애초에 숫자에서도 우세했던 누미디아 기병들은 압도적인 승마술과 뛰어난 전술로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우익의 켈트족 기병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수가 적고 무장이 가벼운 누미디아 기병만으로는 아직도 2만 명이 넘는 켈트족 본대의 후방에 포위망을 구축할 수가 없었다.
이제 전황은 좌익의 하밀카르와 이베리아족 기병들이 켈트족 기병들을 먼저 밀어내고 포위망을 구축하는지, 아니면 본대의 리비아 창병이 켈트족 본대에게 먼저 전멸하는지가 승패를 결정하는 시간 싸움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중 좌익의 켈트족 기병을 이끌고 있던 기병대장이 자신의 말이 다리를 다쳐 잘 걷지 못하자 말에서 내려 보병처럼 장검을 들고 적군의 말 옆구리를 찌르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의 켈트족 기병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얼핏 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말에서 내려 분투하는 것을 보고 이미 지친 말에서 내려 싸우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대장을 따라 하나둘 말에서 내려 장검을 치켜들었다.
하밀카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베리아족 기병들을 지휘하여 말에서 내리느라 자세가 흐트러진 켈트족 기병들을 몰아붙였다.
역사대로라면 훗날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에게도 일어날 행운이 하밀카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에게 일어난 것이다.
본래부터 조금씩 밀리고 있던 좌익의 켈트족 기병들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말에서 내렸던 자들은 창에 찔리거나 검에 베여 쓰러져갔고 아직 말에서 내리지 않았던 자들은 말머리를 돌려 본진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카르타고군은 켈트족을 완전히 포위했다. 후방의 켈트족 보병들은 갑자기 등 뒤에서 적군의 기병들이 들이닥치자 겁을 먹고 무작정 앞에 있는 아군을 밀치며 앞으로 나가려고 발버둥 쳤고 맨 앞 열의 병사들은 뒤에서 밀려오는 아군 때문에 자세가 흐트러져 버렸다.
멀지않은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스드루발은 마른 침을 삼켰다. 아군이 이기고 있다고 마냥 좋아하기에는 너무 많은 피가 대지를 적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비아 창병들은 작살로 물고기를 잡는 어부마냥 켈트족 보병들을 마구 찔러댔고 투창을 다 쓴 누미디아 기병들과 이베리아족 기병들은 허리춤의 검을 빼어들고 돼지를 잡는 백정처럼 적의 머리와 어깨를 내리쳤다.
그것은 이미 전투가 아닌 학살이었다.
막내 마고는 그 지옥과도 같은 광경을 견뎌내지 못하고 말에서 내린 뒤 땅에 엎드려 구토를 하고 말았다.
하스드루발도 마고처럼 눈앞의 현실에서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식은땀을 흘리며 묵묵히 눈앞의 참상을 지켜보았다.
삼형제 중 오직 한니발만이 마치 수업을 듣는 학생처럼 침착하게 전투를 관찰하고 있었다.
한동안 카르타고군의 살육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켈트족의 신들이 자신의 신도들의 참상을 두고만 볼 수는 없었는지 켈트족 보병들에게도 살길이 생겼다. 오랜 전투로 체력이 떨어져 움직임이 둔해진 리비아 창병의 방패벽에 빈틈이 생긴 것이다.
켈트족 보병들은 일제히 그 틈새를 공략했고 포위망에 구멍이 뚫렸다. 하밀카르는 아직 켈트족 본진에 남아있는 기병들을 경계하여 도망가는 패잔병들을 그리 오래 쫓지 않고 보내주었다.
그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은 전체 2만 500명의 병사들 중 보병 5,000명에 기병 500명을 잃었고 켈트족은 전체 2만 6천명의 병사들 중 기병과 보병을 합쳐 2만 명인 넘는 병사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카르타고군의 대승이었다.
전투가 끝난 후 하스드루발과 형제들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토산을 내려와 카르타고군의 진지로 말을 몰았다.
높다란 목책으로 둘러싸인 진지 내부는 전투 후 정리해야할 사안들 때문에 부산스러웠다. 하스드루발의 눈에 한쪽에서 리바아인 병사들이 전장에서 거둬들인 전리품을 정리하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칼이나 갑옷 같은 병장기 이외에도 금이나 은으로 만든 목걸이나 팔찌 등이 많이 쌓여 있었는데 켈트족 전사들은 전장에 자신의 재력을 과시할 수 있는 장신구를 차고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이 그 이유였다.
켈트족은 농사가 잘 안 되는 해에는 이웃 부족이나 다른 민족들의 촌락을 습격해왔고 그 덕분에 강한 자 일수록 부유했다. 켈트족에게 있어 재력(財力)의 과시는 무력(武力)의 과시 이기도 했던 것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역시 리비아인 병사들이 켈트족 포로들을 포박하면서 장신구를 빼앗고 있었다. 대략 3,000명 정도 되어보였는데 출신 부족에게서 몸값을 받고 풀어줄 예정인지 그다지 심한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하스드루발은 알몸의 켈트족 포로가 리비아인 병사에게 금목걸이를 빼앗기는 장면을 보면서 말했다.
“옷은 안 입어도 목걸이는 꼭 차는구나.”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을 호위하던 기병들이 그 말을 듣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형제들은 진지 한가운데에 세워진 총사령관의 막사에 들어섰다. 막사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하밀카르가 앉아있었고 부관으로 보이는 이베리아족 기병 네 명이 승리에 취해 들뜬 표정으로 하밀카르의 주변에 서있었다.
하밀카르는 왼팔에 살짝 베인 상처가 생긴 것만 제외하면 크게 다치지 않은 듯 했다. 하스드루발은 아버지의 무사한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 승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니발과 마고가 켈트족과의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버지를 축하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무사하셔서 참 다행입니다 총독님.”
하스드루발의 냉소적인 말투에 승리의 기쁨에 취해 화기애애하던 막사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살얼음처럼 얼어붙었다.
한니발은 평소처럼 침착했지만 마고와 부관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놀란 눈으로 하스드루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의외로 하밀카르는 그런 하스드루발을 대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밀카르가 자신에게 냉랭한 눈빛을 보내는 둘째 아들에게 대답했다.
“나를 비난하고 싶은 게로구나. 하스드루발.”
하스드루발은 아버지의 말에 지지 않고 대꾸했다.
“군인답지 않으셨습니다.”
하밀카르는 아직 12살 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의 당당하고도 당돌한 태도에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네가 배운 병법에 따르면 군의 지휘관이 최전선에 서는 것은 용기가 아닌 만용이다. 뭐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게로구나?”
“맞습니다.”
아들의 대답을 듣고 하밀카르는 주변의 부관들 중 한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자식교육을 좀 시켜야할 것 같다. 바르카 가문의 남자가 아닌 사람들은 전부 나가보도록 해라.”
안 그래도 그 자리의 분위기가 불편했던 부관들을 서둘러 막사 밖으로 빠져나갔다.
하스드루발은 아버지가 불호령을 내릴 것이라 생각하며 마음들 다잡고 있었다. 그러나 부관들이 나간 뒤 아버지의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고 내용은 더욱 의외였다.
“하스드루발. 우리는 군인이냐?”
“네?”
하스드루발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질문이 당황스러웠다.
“칼을 차고 전쟁터에 나왔으니 군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히스파니아 땅 여러 곳에 진지와 도시를 세우고 있다. 나나 둘째 사위가 직접 건설감독 역할을 할 때도 많지. 그럼 우리는 건축가인 것이냐?”
하스드루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아들에게 하밀카르가 아들에게 계속 질문을 했다.
“또 우리는 이곳에서 광산을 개발하고 그 과정을 직접 관리하고 있다. 그렇다고 누군가 우리를 ‘광산개발업자’라고 부르면 이상하지 않겠느냐?”
“그럼 우리는 대체 뭐란 말입니까?”
선문답 같은 아버지의 말에 하스드루발이 되물었다. 하밀카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아들에게 의뭉스럽게 대답했다.
“그걸 이제 와서 나한테 묻는 것이냐? 네가 8년 전 비르사 언덕에서 대 한노를 쏘아붙일 때 했다던 말들을 떠올려 보려무나.”
하스드루발은 그제 서야 아버지의 의도를 알아챘다.
“바다의 민족...”
“그래. 우리는 바다의 민족. 해상무역을 업으로 삼고 전통으로 여기는 상인이다. 그게 우리의 본질이지. 군인이니 건축가니 하는 것들은 우리가 계속 상인으로 남기 위해 수행해야할 역할에 불과할 뿐이다.”
하스드루발은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카르타고인에게 있어 전쟁이란 장사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거군요.”
아들의 대답에 하밀카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역시 내 새끼는 똑똑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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