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9화 (9/201)

[ 9 ] [8화] 위대한 삼류(三流) [3]

‘전쟁이 장사의 연장선 위에 있다니. 옛날에 한니발 형도 그렇고 이 시대의 가족들은 나를 자주 놀라게 하는구나.’

하스드루발은 전생에 앞부분만 잠깐 읽다 너무 지루해서 덮었던 책.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쓴 전쟁론에서 읽었던 한 문장을 떠올렸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 위에 있다.’

아버지 하밀카르의 말은 19세기의 프로이센에서 태어나 뛰어난 전략가이자 서양 최초의 군사사상가로 불린 남자의 주장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이거 내가 이다음에 역사서 한권 쓰면 우리 아버지가 서양최초의 군사사상가 되시는 거 아냐?’

하밀카르는 흐뭇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나는 오늘의 전투에서 승리 이외에도 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단다. 얼마 전 우리가 정복한 이베리아족이 바르카 가문을 신뢰하고 존경하게끔 만들고 싶었지.”

그제서야 하스드루발은 아버지가 위험을 무릎 쓰고 최전선에서 싸웠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베리아족은 켈트족과 마찬가치로 강한 전사를 존경하는 경향이 강하다. 대부분 귀족출신인 이베리아족 기병들은 이번 전투가 끝나고 각자 자기 부족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후 그들은 뛰어난 무력을 과시하며 자신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 하밀카르와 바르카 가문에 대한 호감을 가슴에 품고 부족내의 유력자로 성장할 것이었다.

하스드루발이 아버지 하밀카르에게 말했다.

“확실히 이베리아족의 젊은 기병들은 바르카 가문의 지휘관이 용맹하길 원했겠지요. 켈트족처럼 그들도 강한 무력(武力)을 동경하는 자들이고 자기들이 나약한 겁쟁이에게 굴복했다고 생각하기 싫었을 테니까요. 이베리아족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 주신거로군요. 아버지의 목숨을 그 과정에서의 담보물로 삼고요.”

하밀카르는 오른손을 뻗어 둘째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네 말이 맞다. 분명 군인이라면 해선 안 되는 일이지. 그렇지만 우린 스파르타인이 아니라 카르타고인이다. 무역선이 태풍을 만나는 걸 두려워하면 어디 상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게 무서우면 대 한노처럼 땅만 파먹으면서 살아야지. 물건을 팔아서 금전적 이득을 남기는 것만이 장사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내어준다. 나는 그게 장사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단다. 양쪽 모두가 이로워야 장사인 것이지.”

“그럼 우리가 이베리아족을 정복하고 히스파니아에서 은을 캐가지만 그들에게 발전된 농법(農法)을 가르치고 이 땅의 평민들에게 정복 이전보다 적은 세금만 걷는 것도 일종의 장사라고 보시는 거군요.”

“그렇단다.”

하스드루발은 이제야 카르타고인의, 페니키아인의 본질이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역사대로라면 앞으로 11년 뒤 한니발은 군대를 이끌고 겨울철에 알프스를 넘었고 그 과정에서 약 5만 명의 병사들 중 절반정도가 죽고 만다.

전생에서 책으로 역사를 배울 때는 명장 한니발이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산맥을 넘던 병사들은 산악부족의 공격으로 죽기도 했지만 매서운 추위에 동사하거나 좁은 산길을 걷다 실족사를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한니발도 얼마든지 그렇게 죽어간 병사들 중 한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인이 아닌 상인이라서 가능한 모험이었구나.’

그래도 하스드루발은 아직 아버지의 말에서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 남아있었다.

“아버지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상인으로서 삼류(三流)입니다.”

아직 어린 둘째 아들의 말에 깜작 놀란 하밀카르는 하스드루발의 머리를 쓰다듬던 오른손을 거두었다.

하스드루발은 착잡함과 대견함이 섞인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에게 계속 말했다.

“전쟁이 장사수단 중 하나라면 우리는 삼류입니다.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섭이죠. 상대방을 지혜로 설득하는 일부터 시작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힘으로 히스파니아를 정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고 있는 일은 힘으로 남의 집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 물건을 강매하는 잡상인과 다를 게 없잖아요. 다행히 강매를 당한 손님들은 물건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만 그건 어디까지 결과론일 뿐입니다.”

하밀카르는 한 숨을 푹 쉰 다음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부터 그런 민족은 아니었지. 사실 우리 페니키아인들은 폭력을 싫어하는 민족이었다. 선조님들의 역사를 잘 아는 너라면 잘 알겠지?”

“페니키아인 최초의 도시 티레를 세우신 선조님들께서는 페르시아 같은 동방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대신 매년 공물을 바치고 수백 년 간 평화를 누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그 일을 두고 그리스인들은 지금까지도 우리 페니키아인을 비겁한 민족이라며 욕한단다. 그렇지만 우리는 군인인 스파르타인도 아니고 철학자인 아테네인도 아니다. 상인이 돈을 주고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또 강력한 제국을 상대로 돈을 대가로 평화를 얻기 위한 교섭을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많은 지혜와 큰 담력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지. 그 어려운 일을 선조들께서는 수백 년 동안이나 해내셨다.”

하밀카르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카르타고를 세우신 엘리사 여왕께서도 마찬가지셨다. 신하들을 이끌고 티레에서 망명하신 여왕께 누미디아의 왕은 소 한 마리의 가죽으로 덮을 수 있는 땅만 내어주겠다고 했지만 여왕께서는 쇠가죽을 실처럼 가늘게 잘라 비르사 언덕을 둘러 그 곳에 카르타고를 건국하셨지. 그렇게 우리는 오래전부터 지혜로운 교섭을 통해서 번영해왔었다.”

하스드루발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우리 카르타고인들은 힘을 써서 장사 하는데 맛이 들려 있었단다. 리비아와 시칠리아를 침략했고 서 지중해에 다른 나라 무역선이 보이면 침몰시켜버렸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주변 나라들에게 상인으로서의 신뢰를 잃었고 괴물 로마를 건드려 전쟁을 하다 앞마당이었던 서지중해까지 잃어버렸다.”

“그리고 이제 로마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먹어치울 준비를 하고 있고요.”

“그래. 로마는 정전협정을 맺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아서 스스로 협정을 어기면서 더 우리의 영역인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빼앗았다. 아마 갈리아인들이나 일리리아인들과의 전쟁이 끝나고나면 다시 카르타고에 칼끝을 돌리겠지.”

하밀카르는 세 아들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면서 말했다.

“지금 우리 카르타고인은 전 세계의 나라들로부터 상인으로서의 신뢰를 많이 잃었다. 강매를 하지 않으면 거래도 트지 못하는 삼류들이지. 나는 내 대에서 삼류 상인 카르타고의 시대를 끝내고 싶었단다. 하지만 내 나이가 벌써 40대 중반이야.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구나. 그래서 내 욕심이지만 너희가 내 뒤를 이어줬으면 좋겠다. 로마를 무찌르고 조국 카르타고에서 국내파를 몰아내고 시민들의 의식을 일깨워라. 나는 너희가 이 기나긴 삼류 상인 카르타고의 시대를 끝낼 위대한 삼류가 되어줬으면 좋겠다.”

하밀카르는 간곡한 목소리로 아들들에게 꿈을 맡겼다. 바르카 가문의 삼형제는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고 늘 차분하던 한니발조차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끼리 의기투합한 다음날 카르타고군과 켈트족은 포로교환 협상을 시작했다.

하밀카르는 켈트족이 이번 전투만으로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해서 일부러 협상을 질질 끌었다. 둘째 사위인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지원군을 이끌고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협상을 시작하고 사흘이 지났을 때 카르타고군의 진영에 공정한 하스드루발과 지원군이 도착했다.

하밀카르는 켈트족 포로 3천명을 한 사람당 은 150세겔만을 받고 풀어주었다. 아무 재주도 없는 노예 한명 가격보다 훨씬 싼 몸값만 받고 포로를 석방했으니 당시 의 기준으로는 관대한 조치였다.

하밀카르의 선처에도 켈트족은 항복하지 않았지만 지원군이 데려온 전투 코끼리가 두려워서인지 더 이상 회전을 걸어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더 흐른 후 하밀카르의 막사에 켈트족 사절이 도착했다. 켈트어를 할 줄 아는 하밀카르의 부관 하나가 사절의 말을 통역했다.

“켈트족은 양 진영이 대표자를 한 명씩 뽑아 결투를 벌여 신들께서 이번 싸움의 승자를 결정하시게 하자고 합니다.”

카르타고군 입장에서는 전술적으로 전혀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제안이었다. 지원군의 도착으로 병사가 총원 4만 명으로 늘어난 데다 고대의 탱크나 다름없는 코끼리까지 20마리나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켈트족의 군대는 주변의 군소부족들이 겁을 먹는 바람에 증원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밀카르는 켈트족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이 결투에 나서기로 했다. 하밀카르의 결정에 사위와 부관들이 반대했지만 하밀카르의 뜻은 완고했다.

“이번 결투에서 이기면 쓸데없이 피를 흘리지 않고 이 지역을 차지할 수 있다. 켈트족은 강자를 존경하고 명예를 중시하니까 분명히 그렇게 돼. 내가 지더라도 잽싸게 장례식 치른 다음 몇 주 지나고 나서 추모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켈트족을 치면 될 일이다. 늙어가는 내 목숨 하나 지불해서 이 지역을 얻으면 싼 거라고! 이 멍청이들아!”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며칠 전 전투가 벌어졌던 고원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밀카르와 켈트족 대표의 결투를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하밀카르는 2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해온 청동흉갑을 입고 투구를 쓴 채 수만 명의 사람들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그의 왼 손에는 특별히 여러 겹의 나무를 덧대어 붙이고 테두리를 철로 감싼 튼튼한 방패가 들려있었고 오른손에는 이베리아족의 전통무기인 외날 검 팔카타가 들려있었다.

대장이 자신들과 같은 무기를 들고 결투에 나서는 모습을 보고 이베리아족의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켈트족 에서도 대표가 걸어 나왔다.

21세기의 기준으로도 장신인 하밀카르 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몸에는 바지 한 장만 걸친 거한이었다. 장발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켈트족 대표는 분명 강철같이 단련된 근육 덕분에 갑옷을 챙겨 입은 하밀카르 보다도 어깨가 넓어보였다. 양손에는 큰 바위도 일격에 깨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망치를 들려 있었다.

하밀카르는 기골이 장대한 켈트족 대표의 모습을 보고 마른침을 삼킨 후 옆에 있는 둘째 사위 공정한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어이 사위. 이제 나만큼은 하지?”

“무엇을 말씀입니까 장인어른?”

“뭐긴 뭐겠어? 군대 지휘하고 영지관리 말이야.”

장인어른의 말에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그러니깐 나서지 마시라니까요. 요즘 무릎도 별로 안 좋으시면서. 그런 말씀마시고 꼭 살아 돌아오세요.”

하밀카르도 한 숨을 내쉬면서 사위에게 대답했다.

“노력은 해볼게.”

그 말을 마친 뒤 하밀카르는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상대방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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