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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0화 (10/201)

[ 10 ] [9화] 다짐

“다행히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찌르지는 않았군요. 그렇지만 타박상이 꽤 심하니 상처가 덧나지 않게 주의하셔야 합니다. 방패나 갑옷이 조금만 얇았어도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의사가 침상 위에 누워있는 하밀카르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진단하며 말했다. 하밀카르는 조금 전 켈트족 대표와의 결투에서 간신히 이겼지만 자신도 갈비뼈 두 대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의사는 하밀카르의 상처에 약을 바른 다음 붕대를 감았다. 하밀카르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엄살을 부렸다.

“아악! 이보게! 붕대 좀 살살 묶게! 어떻게 그 덩치 큰 녀석이 휘두른 대들보만한 망치에 맞았을 때보다 더 아플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자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엄살을 부리는 장인을 째려보면서 말했다.

“더 세게, 더 아프게 꽉꽉 묶도록 하게. 그래야 또 이 사단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 몇 년 후면 오십 줄에 들어서시는 분이 아직도 당신께서 청춘이신 줄 아시니 이거야 원.”

사위의 핀잔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섭섭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꾸를 했다.

“저저... 장인이 병상에 드러누웠는데 면전에서 잔소리해대는 본새 좀 보소. 네가 내 사위인지 시애미인지 당최 구분이 안 되는구나. 나도 이리 구박을 받는데 병약한 내 딸 살람보는 평소에 얼마나 시달릴까? 딸아! 식 올리기 전에 저놈의 쫀쫀함을 못 알아본 이 못난 아비가 미안하다!”

“아 거기서 안사람 얘기가 왜 나와요! 안 그래도 아픈 사람 두고 전쟁터를 떠도느라 마음이 불편한데!”

묵묵히 할 일을 하던 의사는 두 사람이 희극배우처럼 티격태격 하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다 그만 붕대를 감는 손에 너무 힘을 주고 말았다.

그 바람에 하밀카르는 다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악!”

거의 실신했었던 아버지가 의식을 되찾고 둘째 매형과 말싸움을 할 정도로 몸상태가 좋아지자 막내 마고는 울음을 그치고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조금 전의 아버지가 치른 짧지만 치열했던 결투장면이 아직 뇌리에 선명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 결투에서 하밀카르는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상대방의 목을 향해 팔카타를 내질렀다.

그러자 켈트족 대표는 거구답지 않은 날랜 몸놀림으로 하밀카르의 공격을 피한 뒤 몸을 비틀며 상대방의 옆구리를 향해 망치를 크게 휘둘렀다.

그러나 하밀카르의 무모해 보이는 돌진은 상대를 방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빈틈을 보인 것이었다,

그는 미리 예측한 방향에서 날아오는 망치를 방패로 막으며 켈트족 대표의 가슴을 찔렀다.

문제는 켈트족 대표의 괴력이 하밀카르의 예상을 훨씬 웃돌아 일격에 방패를 박살내 버렸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쓰러졌고 하밀카르만이 간신히 일어났다.

하스드루발은 아버지의 검이 조금만 짧았어도 승자와 패자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역사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면이었지. 억지를 부려서 전장에 나와 보길 잘했다.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내성을 기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어. 한니발 형은 겨우 아홉 살 때부터 이런 참혹한 광경을 수업 듣듯이 보아온 거네. 정신연령이 30대인 나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진짜 대단하구만. 나도 더 분발해야겠다.’

전장에 대한 내성을 기른 것 이외에도 하스드루발은 이번 관전을 통해서 깨달은 점이 있었는데 바로 자신의 역사지식을 완전히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카르타고인들은 조선의 사관들처럼 시시콜콜한 사실까지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이 없었기 때문에 하스드루발이 전생에 공부하는데 사용했던 사료는 거의 로마인이나 그리스인이 남긴 것이었다.

당연히 오늘 일처럼 아예 기록되지 않은 사건도 많았고 아예 사료와 역사적 사실이 달랐던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는 아버지가 매형과 함께 히스파니아로 건너가실 때 우리 삼형제는 여전히 카르타고에 남아서 자랐다고 했었어.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8년 전에 히스파니아로 이주했잖아? 승자 로마가 남긴 패자 카르타고의 역사 따위 그저 참고사항 정도 밖에 안 돼. 큰 흐름정도야 얼추 맞겠지만 그 정도 메리트만 가지고 로마를 이길 수 있을까?’

하스드루발이 자기도 모르게 깊은 고민에 빠져들자 그 모습을 본 하밀카르가 양미간에 팔자주름을 만들며 말했다.

“하스드루발이 또 뭔가 고민거리가 있나보구나. 아니! 잔소리꾼 사위 너 말고 우리 귀여운 둘째아들 말이야.”

하스드루발은 생각을 멈추고 자신을 부르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밀카르는 하스드루발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하스드루발. 오늘 우리가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 않고 이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뭔지 아니?”

“결투 중에 상대방의 발 움직임을 보고 다음 동작을 미리 예측하셨나요?”

“뭐 그것도 있지만 저기 구석에서 입을 댓 발 내밀고 삐져있는 네 매형의 공이 크단다.”

“매형이 결투 중에 도와줬다고요?”

“그게 아니고 저 녀석 덕분에 결투가 성사될 수 있었거든. 네 둘째 매형은 히스파니아 서해안에서 일어난 이베리아족의 반란을 진압한 다음 내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잽싸게 군수품을 챙겨서 여기까지 달려왔지. 그리고 켈트족은 네 매형이 데려온 난생 처음 보는 코끼리에 겁을 먹고 전투를 포기했단다. 덕분에 오늘 전투대신 결투가 벌어졌고 수천 명의 목숨을 아낄 수 있었지. 전투는 내가 좀 낫지만 병참관리는 네 매형을 따라갈 수가 없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지?”

하스드루발은 잠시 고민을 한 후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뭐든지 혼자 다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그렇지! 바알 함몬께서 한니발과 너에게 많은 재능을 내리신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너희 둘은 뭐든지 혼자 해내려고 하는 경향이 좀 있어.”

하밀카르는 침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은 후 맏아들 한니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니발. 난 네가 태어난 날 이후로 네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 한없이 진지하고 강인한 성품은 네 천재성 만큼이나 큰 장점이지만 단점이기도 하다. 몇 년 후면 군인으로서나 전사로서나 로마군에서 너를 이길 자는 거의 없을 거야. 그러나 우리의 적은 고향 카르타고에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카르타고에 있는 적들을 상대하려면 장군으로서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상인으로서 상대의 욕망을 파악할 줄 알아야한다. 넌 사적인 욕망이 희박한 구석이 있어서 그런 일이 버거울 때가 있을 거다. 그럴 때는 네 동생 하스드루발과 꼭 상의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이번에는 하스드루발의 차례였다. 하밀카르는 둘째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하스드루발. 네 불같은 열정과 창의성을 항상 잘 다스려야한다. 한니발의 진지함과 강인함이 장점이자 단점이듯 너의 열정과 창의성도 양날의 검이다. 너는 이곳 히스파니아에서도 카르타고의 평민들을 관찰자로 활용해 본국 정계의 상황을 파악한다는 생각을 해냈지. 아주 장한 일이다. 나는 물론이고 본국의 해외파 의원들까지 너의 열정과 수완에 크게 감탄했단다. 그렇지만 가끔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감정이 이성을 마비시키는 경우가 종종 보이는구나. 네 열정을 항상 이성으로 잘 통제해서 큰 실수를 하는 경우가 없도록 해라.”

“명심 할게요 아버지.”

마지막으로 하밀카르는 막내아들 마고를 바라보았다.

“마고야. 확실히 네 위의 두 형은 태어날 때 신들께 많은 은총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눅들 필요는 없다. 너도 분명히 바르카 가문의 남자다. 내가 보기에는 범인(凡人)이상의 재능은 타고났어. 로마와 결전을 벌일 때 분명 너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할 거다. 그러니 공부 열심히 하고 승마나 검술훈련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네 아버지.”

하밀카르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집게를 만들어 마고의 통통한 볼을 한번 꼬집고는 아들들과 사위에게 말했다.

“내 계획은 이렇다. 내가 둘째 사위하고 좀 더 힘내서 앞으로 10년 안에 히스파니아의 에브로강 이남을 우리 바르카 가문이 완전히 접수한다. 원래 점령보다 점령지를 안정화시키는 게 더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니까 앞으로 몇 년간은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반란이 일어날게다. 그 때 위기를 기회로 삼아서 너희 삼형제는 착실하게 군무경험을 쌓아라. 그러다가 바알 함몬께서 때를 알려주시면...”

하밀카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한니발이 한 20대 중후반 쯤 됐을 때 하스드루발과 함께 정예병을 이끌고 로마 놈들을 공격하는 거야! 그리고 나는 둘째 사위하고 히스파니아를 지키면서 기회를 보다가 한니발에게 보급품과 지원 병력을 보내는 거지! 마고는 카르타고로 가서 본국을 지키다가 또 기회를 봐서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이렇게만 되면 우리의 꿈은 언제가 현실이 될 거다! 로마의 위협에서 카르타고를 지켜내는 거지!”

그렇게 하밀카르가 기운차게 앞으로의 계획을 밝히자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추임새를 넣었다.

“장인어른.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이탈리아 반도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시려면 건강 조심하셔야죠. 그러니까 제발 오늘 같은 무모한 일은 더 벌이시면 안 됩니다.”

“그래. 이제 하라고 해도 못하겠다. 몸이 예전 같았으면 그 정도 공격은 방패로 막을 것도 없이 피했을 텐데. 앞으로 결투 같은 건 어지간하면 하지 말아야겠어.”

“잘 생각하셨어요 장인어른! 이제 좀 마음이 놓이네요. 우리는 로마군에 비해 유능한 장수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장인어른께서는 늙은 목숨 하나에 이 지역 정도 얻으면 남는 장사라고 하셨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저나 장인어른이나 앞으로 20년은 현역으로 남아야 한다고요!”

“그래. 움직일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건 다 해둬야지.”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이 의기투합하면서 막사 안은 희망찬 분위기로 가득 찼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확실히 괜찮은 계획이야. 10년 뒤에도 우리 가족들이 모두 무사하다면 말이지.’

역사대로라면 하밀카르는 약 1년 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고 공정한 하스드루발도 9년 후 아직 젊은 나이에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그 후 한니발은 26세 젊은 나이에 히스파니아 총독이 되어 29세에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 막내 마고도 한니발과 함께 가지만 마고는 형과 겨우 3년 정도를 함께하다 히스파니아를 지키기 위해 돌아가고 한니발은 혼자 이탈리아에 남아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분투하다 결국 로마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래. 전쟁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야.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하스드루발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역사를 바꾸기로 다짐했다.

‘먼저 아버지의 죽음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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