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 [10화] 하밀카르를 구하라! (1)
하밀카르는 켈트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바르카 가문 사람들과 군대를 이끌고 겨울을 나기위해 히스파니아 반도의 동남부 해안지역에 있는 본거지로 돌아갔다.
히스파니아 남부해안지역은 기후가 온화해 가끔 동장군이 히스테리를 부리는 날을 제외하면 한겨울에도 기온이 영상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덕분에 동절기 동안에도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은 타도 로마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할 수 있었다.
하밀카르는 지난 결투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하면서 내년 봄이 오면 어느 지역을 먼저 공략할지를 구상했고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바르카 가문의 새로운 본거지가 될 해안도시 카르타고 노바 건설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한니발과 마고는 아버지의 치열한 결투를 본 이후로 더욱 열심히 마상무예와 검술을 연마하고 병법을 공부했다.
그리고 하스드루발은 꾀병을 부려 자기 방에 틀어박힌 뒤 머리를 쥐어뜯으며 아버지와 매형의 죽음을 막을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매형 같은 경우는 아직 시간도 8년 넘게 남았고 사인(死因)도 분명하니까 별로 문제될 건 없어. 휘하의 켈트족 노예나 부관이 암살을 시도할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충분히 예방할 수 있지. 문제는 아버지인데.’
역사대로라면 하밀카르는 내년에 죽을 운명이다. 문제는 사망 날짜를 특정할 수 없는 데다 후세의 역사책에 기록된 하밀카르의 죽음에 대한 정보는 모두 ‘카더라’수준의 일화라는 것이다.
‘일단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일화들 중 아버지가 자연사 했다고 나온 건 하나도 없었어. 제일 그럴싸해 보이는 건 켈트족이나 이베리아족과의 전투 중에 전사하신다는 설하고 로마 암살설, 그리고 국내파 암살설인데.’
하스드루발은 하밀카르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일화들 중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을 가려내려고 애써왔지만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가 뇌세포 구석구석에 박혀있는 역사지식을 끄집어내면서 혼자 끙끙거리기 시작한지 일주일이 되던 날 여전히 머리를 싸매고 있던 하스드루발은 문득 전생에 사촌동생과 2차 포에니 전쟁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던 기억을 떠올렸다.
답 없는 한니발 덕후였던 사촌동생은 로마가 ‘운빨’로 2차포에니 전쟁에서 이겼다고 주장하고는 했는데 그럴 때마다 들었던 근거는 늘 한결 같았다.
“한니발이 칸나에 전투에서 압승하고 나서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가 한니발한테 동맹 맺자고 하잖아. 그런데 한니발한테 OK사인 받고 집에 가던 마케도니아 사절이 재수 없이 로마군한테 잡혀버렸잖아? 그 협공작전만 운 나쁘게 뽀록나지 않았으면 양쪽에서 두들겨서 로마 그냥 점령하는 건데!”
역사학도였던 전생의 하스드루발은 어차피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그 때마다 사촌동생의 주장에서 잘못된 점을 짚어 알려주었다.
“그게 아냐 이놈아. 로마가 바보냐? 로마인들이 원래 서로 불편한 사이였던 마케도니아가 한니발하고 동맹 맺으려 들 수도 있다는 걸 예상 못했을 리가 없잖아. 로마군도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갈수록 마케도니아 국경 부근에 더 촘촘히 감시망을 쳤겠지. 사절이나 간첩을 잡고 마케도니아 군의 움직임을 감시하려고 말이야.”
그 때 우연히 떠올렸던 전생의 추억에서 하스드루발은 아버지를 살릴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그래! 지금처럼 단서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어차피 아버지가 어떤 위험에 처하시게 될지 알수있는 방법이 없어. 일단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사고사나 병사라면 어차피 못 막아. 지금은 겨울이니까 전쟁터에 나가실 일도 없으니 암살 예방에만 집중하자. 마케도니아 사절을 붙잡은 로마군처럼 아버지 주변에 감시망을 촘촘히 쳐야겠어.’
일단 판단을 내린 하스드루발은 번개처럼 신속하게 움직였다. 일주일 만에 책상머리를 떠나 가장 먼저 한일은 아직 침상에 누워 상처를 치료중인 아버지 하밀카르에게 찾아가는 일이었다.
하밀카르는 일주일 째 병상에 앓아누운 줄 알았던 둘째 아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오자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앉은 후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하스드루발! 몸살은 이제 거의 다 나았나보구나. 그래도 아직 무리하면 안 된다. 너무 돌아다니지 말고 좀 더 쉬도록 하려무나.”
“이제 완전히 나았어요 아버지. 제 건강은 이제 걱정 안하셔도 돼요. 하지만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어요.”
하스드루발의 말에 환하던 하밀카르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번에 카르타고에서 온 소식통이 뭔가 안 좋은 정보라도 가져왔느냐?”
“국내파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수상하다네요. 아버지께서 편찮으실 때 자객이라도 보내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아버지의 신변 경호를 강화하고 정보원을 더 풀어서 만약을 대비할 필요가 있겠어요.”
카르타고에서 정치인이 상대 계파의 정적(政敵)을 암살하는 경우는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않았지만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었다. 또한 하스드루발은 열두 살 어린나이에도 바르카 가문의 정보통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밀카르는 군말 없이 둘 째 아들의 의견에 따랐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카르타고 출신 부관들 중 충성심 강한 정예 몇 명을 뽑아 항상 내 신변을 지키도록 하마. 정보원 역할을 할 병사도 좀 더 뽑고 말이야.”
아비지가 선선히 자신의 청을 들어주자 하스드루발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얼른 상처를 털고 일어나셔야 해요!”
하스드루발은 침상에 걸터앉으며 아버지와 가볍게 포옹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인사를 하고 방문을 나서려는 둘째 아들을 하밀카르가 불렀다.
“하스드루발.”
하스드루발은 고개를 돌려 뒤 돌아보며 대답했다.
“왜요 아버지?”
하밀카르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고맙다.”
하스드루발은 아버지의 감사에 대답대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 * *
한편 하스드루발이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카르타고의 대 한노는 하밀카르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도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저녁 만찬을 준비해 국내파 100인회 의원들 중 최측근 여덟 명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초대장을 받고 서둘러 바알 함몬의 신전만큼이나 으리으리한 대 한노의 저택 앞으로 모여든 국내파 100인회 의원들은 시중을 드는 노예의 안내를 받고 만찬회장에 들어섰다.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청동문을 열고 들어서는 국내파의원들을 대 한노가 맞이했다.
“존경하는 100인회 의원님들. 어서 들어오십시오. 초대장을 받으신 분 중 한분도 빠지시지 않고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시니 영광입니다.”
만찬회장에 들어선 국내파 의원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대 한노를 바라보았다.
대 한노가 카르타고의 전통대로 식탁 의자에 앉아 손님을 맞이하는 대신 로마인의 전통예복 토가를 입고 마치 세 개의 큰 침대를 붙여놓은 듯한 ㄷ자 모양의 생소한 의자 위에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만찬회에 초대받은 여덟 명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아히나뎁이 대 한노의 기묘한 환대에 답했다.
“저희야 말로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대 한노 의원님. 그런데 이 곳은 저희가 아는 만찬회장과는 많이 다르군요.”
“그러시겠지요. 저도 이런 식의 만찬은 처음이니까요. 아시다시피 우리 국내파가 얼마 전에 로마의 원로원과 교류를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두 나라간의 우호와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오늘은 로마식 만찬을 준비해 봤습니다.”
카르타고의 국내파는 하밀카르가 이끄는 바르카 가문이 히스파니아 원정에서 승승장구하며 시민들에게 더 큰 지지를 얻자 초조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 한노는 정적(政敵)인 바르카 가문과 해외파를 견제하기 위해 아직도 불패의 장군 하밀카르를 두려워하는 로마의 원로원과 국내파 사이의 은밀한 동맹을 주도했고 거의 모든 국내파 의원들은 이에 찬성했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공화국 카르타고에서 사실상 최고 권력자인 대 한노가 연 만찬회는 마치 임진왜란이 끝난 지 고작 10여년 만에 조선의 임금이 대신들을 다다미가 깔린 방으로 불러 초밥을 대접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해괴한 자리였다.
그야말로 카르타고의 선조(宣祖)가 카르타고의 이완용으로 진화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친로마 노선에 찬성한 국내파 의원들로서도 꽤나 떨떠름한 상황이었지만 그들 중 아무도 카르타고 최고의 권력자이자 자산가인 대 한노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때 그 자리에서 가장 서열이 낮은 국내파 의원인 보다쉬타르트가 대 한노에게 아부를 해댔다.
“이국적인 정취가 가득한 훌륭한 만찬회장 이로군요 대 한노 의원님! 다만 제가 무지하여 저 독특한 모양의 의자에서 어디가 상석인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부디 저희가 로마의 예법에 맞는 자리에 누울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러자 대 한노는 앞사람에게 목젖이 보일 정도로 껄껄대며 웃은 후 보다쉬타르트에게 대답했다.
“이거 참 제가 실례했군요. 제 노예들이 곧 여러분을 안내할 겁니다.”
말을 마친 대 한노가 손뼉을 두 번 치자 만찬회장 밖에서 대기 중이던 노예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손님들의 손을 씻기고 튜닉 위에 토가를 입힌 후 로마인들이 트리크리니움이라고 부르는 만찬용 의자로 안내했다.
국내파 의원들은 노예의 안내에 따라 ㄷ자 모양 의자 한가운데의 빈 공간에 놓여있는 대리석 탁자를 둘러싸듯 각자의 서열에 알맞은 자리에 누웠다. 손님들이 모두 자리에 착석 한 것을 확인한 노예들이 식전주로 허브가 들어있는 와인을 가져왔다.
모든 손님들의 잔에 와인이 가득 찬 후 대 한노가 잔을 들고 국내파 의원들에게 만찬회를 연 이유를 밝혔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히스파니아에서 발정 난 당나귀마냥 날뛰는 하밀카르에 대하여 상의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그러자 국내파 의원 중 한 명인 보밀카르가 와인이 든 은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듣자하니 하밀카르는 우락부락한 야만인에게 호되게 얻어맞고도 멀쩡하다더군요. 그 인간은 온몸이 청동으로 되어있기라도 한 모양입니다.”
보밀카르의 말에 대 한노가 식전주 다음으로 노예가 가져온 올리브유를 뿌린 삶은 달걀에 은수저를 가져다 대면서 대답했다.
“참 애석한 일이지요. 로마의 원로원도 그 일을 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새로운 동맹과 공동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할 계획입니다.”
대 한노의 말에 만찬회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손님들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아히나뎁이 무거운 입술을 억지로 열어 대 한노에게 물었다.
“로마와의 전쟁을 반대해 오신 대 한노 의원님께서 정식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인 하밀카르의 군대와 로마군이 싸우는 상황을 원하시지는 않을 테고... 설마 암살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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