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 [11화] 하밀카르를 구하라! (2)
“로마와의 전쟁을 반대해 오신 대 한노 의원님께서 정식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인 하밀카르의 군대와 로마군이 싸우는 상황을 원하시지는 않을 테고... 설마 암살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자신의 질문에 대 한노가 악마처럼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히나뎁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대 한노 의원님. 이 늙은이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하밀카르는 저번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경호원을 늘려 빈틈없이 신변을 보호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괜히 암살자가 서투르게 거사를 진행하다 바르카 가문에게 붙잡혀 배후를 밝히기라도 하면 하밀카르가 죽기 전에 우리가 먼저 카르타고 시민들이 던진 돌을 맞고 죽게 될 겁니다.”
“암살자를 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독은 독으로 제압해야죠. 히스파니아의 켈트족 중에서도 대부족으로 유명한 카르페타니족이 하밀카르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더군요.”
대 한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아히나뎁은 거기까지만 듣고도 그의 생각을 예상할 수 있었기에 표정이 굳어버렸지만 다른 국내파 의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그 자들에게 하밀카르의 다음 원정 장소와 날짜를 알려주고 로마는 튜닉차림에 작은 방패만 들고 싸우기도 하는 가난한 야만인들에게 질 좋은 무기와 갑옷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무구 제작비를 내주길 바라고 있긴 하지만요.”
대 한노의 말을 들은 국내파 의원들은 하나같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면서 마른 침을 삼켰다.
카르페타니족에게 군사기밀이 유출돼 카르타고군이 불의의 습격을 받게 된다면 하밀카르 휘하의 자국의 젊은 장교 수백 명도 함께 죽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의 육군은 대부분 타국에서 고용한 용병과 속주민 징집병으로 구성되어있긴 했지만 애국심 넘치는 청년들이 병사로 자원입대를 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고급장교들은 전부 카르타고의 귀족으로 구성되었다.
만찬회의에 참석한 다른 국내파 의원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그 자리에서 가장 어린 보다쉬타르트가 대 한노에게 말했다.
“대 한노 의원님 제가 아직 나이가 어리고 경험도 부족해 미숙하다보니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어디 말씀해 보세요.”
“하밀카르는 분명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지만 그가 정복한 히스파니아에서 들어오는 금과 은이 국가재정에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분명 바르카 가문을 견제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히스파니아 원정이 좀 더 진행 된 후로 거사를 미루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보다쉬타르트가 말을 마치자 대 한노가 입구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노예들을 바라보며 손뼉을 두 번 치자 노예들이 은쟁반 위에 놓인 레몬즙을 뿌린 성게와 산쥐벌꿀구이가 가져와 대리석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테이블 세팅이 끝난 후 대 한노가 성게요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예를 들어 설명해드리지요 보다쉬타르트 의원. 하밀카르가 히스파니아에서 가져오는 재물은 우리에게 이 성게요리와 같습니다. 우리 카르타고에서 성게는 바다의 보물이라고도 불리지요.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급 식재료입니다. 하지만 성게를 잡다보면 언제가 한번쯤은 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수밖에 없어요.”
대 한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은수저로 성게가시를 툭툭 치다 그만두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밀카르의 공격적인 정복활동에 자극받은 강대국 로마가 우리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할 수도 있겠죠. 또 그 인간의 알량한 전공을 과대평가한 빈민들이 바르카 가문을 지지하며 우리에게 반항해 댈 수도 있어요. 심지어 요즘은 귀족들 중에서도 우리 카르타고 시민들에게 세금을 걷어 국방예산에 보태자는 자들이 늘고 있다더군요. 우리가 무슨 천한 리비아 속주민입니까? 세금 같은걸 내게. 그런 가시에 손톱 밑을 찔리면 약간 따끔한 정도로는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대 한노가 이번에는 산쥐구이를 소시지처럼 굵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벌꿀에 절여 구운 산쥐를 보세요. 분명히 그다지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죠. 우리 카르타고에서 최고로 치는 성게요리에 비하면 고급요리 축에도 못 끼지만 그래도 맛있답니다. 게다가 산에서 야생산쥐 몇 마리를 잡아 양식용 항아리에 넣고 먹이만 조금 주면 저희들끼리 번식해서 수도 늘고 통통하게 살이 오르지요. 별로 힘도 안들이고 언제든지 구워먹을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마치 농사를 지어 우리에게 세금을 바치는 리비아 속주민들처럼 말이죠.”
대 한노의 설명을 듣던 보다쉬타르트의 구레나룻 밑에서 배어나온 식은땀 한 방울이 그의 매끈한 턱선을 타고 흘러내리다 아직 그리 풍성하지 못한 턱수염에 스며들었다.
대 한노는 그런 보다쉬타르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러니 보다쉬타르트 의원. 우리 국내파의 일원으로 계속 남고 싶다면 성게요리에는 신경 끄세요. 그보다 이 산쥐벌꿀구이를 좀 맛보시죠. 카르타고에서는 아직 외견이 징그럽다면서 기피하는 음식이지만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없어서 못 먹는 별미랍니다.”
대 한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보다쉬타르트는 허둥지둥 손을 뻗어 바싹 구워진 채 은 쟁반 위에 누워있는 산쥐 한 마리를 자신의 접시로 가져갔다.
대 한노는 그런 보다쉬타르트를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자신도 산쥐 한 마리를 손으로 집어 커다란 구렁이처럼 통째로 입에 넣은 후 뼈째로 씹어 삼켰다.
* * *
철저한 경호 덕분인지 하밀카르는 큰 변고 없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했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자 바르카 가문의 본거지에는 희망찬 분주함이 가득했다.
하밀카르는 히스파니아의 중서부 지역인 루시타니아 지역을 정벌하기 전에 병사들과 군수품의 상태를 점검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공정한 하스드루발의 지도로 카르타고 노바 건설 작업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다른 바르카 가문 사람들이 본국 카르타고와 같은 위엄을 갖춰가는 카르타고 노바의 모습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은 천천히 늪에 가라앉으며 발버둥 치는 듯한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드디어 기원전 228년이 오고 말았다. 역사대로라면 오늘 아버지께서 돌아가신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빨리 뭔가 단서가 잡혀야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분기마다 한번 하스드루발에게 본국 카르타고의 소식을 전하는 화물선의 노잡이 멜카르샤마가 하스드루발의 방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멜카르트샤먀입니다. 카르타고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하스드루발은 방문을 열고 멜카르트샤마를 방안에 들였다.
“수고했어 멜카르트샤마. 자 여기 이번 분기 보수.”
멜카르트샤마는 하스드루발에게 파피루스 뭉치를 건네주고 묵직한 은화주머니를 받은 후 함박웃음을 지었다. 평소처럼 하스드루발에게 인사를 한 후 방문을 나서려던 멜카르트샤마는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는지 뒤 돌아보며 하스두루발에게 말했다.
“참 하스드루발 도련님. 히스파니아에 도착하고 나서 화물선 안에서 좀 묘한 장면을 봤습니다.”
“뭔데?”
“항구에 배를 대고 하선하려는데 처음 보는 신입노잡이가 품속에 두루마리를 숨기고 있더군요. 저처럼 말이에요.”
“이상하군. 나는 노잡이 중에서 새로 정보원을 뽑은 기억이 없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도련님의 심부름을 한지가 벌써 9년째라 바르카 가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알아봅니다. 그런데 그 자는 아예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다른 선원들은 배에서 내려서 대부분 한잔 하러 술집으로 몰려갔는데 그 친구는 하밀카르 총독님 집무실 맞은편에 있는 별채 건물로 들어가더군요.”
멜카르트샤마의 말에 하스드루발은 흠칫 놀라며 안색이 변했다.
‘거기는 부사령관 아데르바알의 집무실인데? 아무래도 국내파가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모양이군.’
아데르바알은 명목상 히스파니아 총독인 하밀카르를 보좌하기 위하여 본국 카르타고에서 파견된 카르타고군의 부사령관이다. 그러나 사실 그의 주된 임무는 하밀카르를 감시하여 모은 정보를 국내파가 장악하고 있는 본국의 100인회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부사령관 제도는 100인회가 정해진 임기 없이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속주의 총독이나 군사령관들을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해 만든 제도였던 것이다.
‘100인회가 부사령관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건 공식적인 루트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게 제대로 된 명령이라면 말이지. 한동안 아데르바알 주변에 감시망을 더 촘촘하게 쳐야겠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하스드루발의 감시를 받아온 아데르바알은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꼬리를 드러냈다. 감시임무를 맡은 병사들이 아데르바알의 집무실에서 나온 거동이 수상한 병사 한명을 체포한 것이다. 병사들은 병사를 포박한 후 하스드루발에게 데려갔다.
“하스드루발님 어제 자정 쯤 아데르바알 부사령관님 집무실을 방문했었던 켈트족 용병 세 명이 이른 새벽에 상관 몰래 말을 타고 탈영을 시도했습니다. 탈영병은 총 세 명이었는데 한명은 현장에서 사살했고 한명은 체포했으며 나머지 한명은 놓쳐버렸습니다.”
“수고했다. 몸수색은 이미 마쳤겠지?”
“네. 품속에서 서신 하나를 찾았습니다.”
하스드루발은 병사에게서 서신을 건네받아 펼쳐보았다. 그러나 서신에는 히스파니아의 켈트족과 이베리아족이 사용하는 이베리아 문자가 적혀있었기 때문에 읽을 수가 없었다.
하스드루발은 이베리아 문자를 읽을 줄 아는 병사 한명을 불러와 내용을 읽게 했다. 그러자 두루마리를 읽은 병사는 얼굴에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놀라며 하스드루발에게 소리쳤다.
“하스드루발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군사기밀이 새어나갔습니다! 여기에는 하밀카르 총독님의 진군 방향과 예상 도착 날짜가 적혀있습니다! 수신인은 켈트족 부족인 카르페타니족의 왕 입니다!”
병사의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자기도 모르게 거의 11년 만에 한국어로 욕을 하고 말았다.
“아오 썅! 진짜 큰일 났네!”
하밀카르는 20일 전 장남 한니발과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루시타니아 지역에 위치한 켈트족의 소도시 아야몬테를 공략하러 떠났다. 그 일급 군사기밀이 히스파니아 중부에 사는 막강한 적대부족 손에 넘어가기 직전인 것이다.
‘일단 진정하고 잘 생각해보자. 아버지랑 형이 공략하러 간 아야몬테는 현대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경지대 쯤에 있어. 구아디아나 강변쯤이니까 카르타헤나에서는 대충 500km 정도 되는 거리지. 20일 전에 떠나셨으니 지금쯤 거의 도착했거나 늦어도 5일 정도면 도착할거야. 도망친 탈영병은 말을 탔다고 했으니 빠르면 5일 정도면 카르페타니족의 영역에 도착할거고.’
그렇게 이마에 힘줄이 잡힐 정도로 고민하던 하스드루발은 갑자기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짝!’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친 후 말했다.
“정신 차리자. 일단 여기 상황정리가 우선이다.”
하스드루발은 탈영병을 체포한 병사들 중 리더 격인 병사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은밀히 움직일 수 있는 병사가 몇 명이지?”
“총 서른 명입니다.”
“좋아. 그 중 스물여덟 명은 당장 아데르바알의 집무실로 가서 그를 체포해라. 죄목은 반역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저 탈영병을 끌고 가 일단 옥에 가둬놔라.”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리고 이베리아족 병사. 자네 이름이 뭐지?”
“알루시오 입니다.”
“알루시오. 자네는 내 둘째 매형인 하스드루발 장군님 밑에서 일하지? 당장 장군님을 총독 집무실로 모시고 와라. 보안이 확보된 장소에서 장군님께 급히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급박한 현장상황을 일사천리로 정리한 하스드루발은 둘째 매형을 만나기 위해 하밀카르의 집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