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 [12화] 하밀카르를 구하라! (3)
“미치겠네. 장인어른 이번엔 진짜 위험하시겠는데. 카르페타니족은 기병이 많아. 그놈들이 기병만 먼저 보내서 퇴각을 방해하면서 우리 군을 추격하면 원정을 포기하고 도망치시는 것도 힘들겠어.”
둘째 처남에게 부사령관 아데르바알의 이적행위에 대해 전해들은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깊이 탄식했다. 하스드루발은 절망하고 있는 매형에게 원군을 보내자고 재촉해댔다.
“매형! 지금이라도 빨리 아버지께 지원군을 보내야 해요! 아데르바알에게 서신을 받은 탈영병이 지금도 카르페타니족에게 달려가고 있어요! 그놈들이 아버지의 군대를 뒤에서 덮칠 때 아야몬테의 수비병들도 성문을 열고 나와서 덤벼들면 정말 끝장이라고요!”
그러자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흥분하는 둘째 처남에게 대답했다.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여기서 아야몬테 까지의 거리는 2,700스타디온(약 500km)이 넘어. 반면에 카르페타니족의 영역에서 아야몬테 까지는 1,900스타디온(약 351km)도 안 되지. 지금 원군을 보내도 제 때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럼 기병만이라도 먼저 보내요! 카르페타니족에게 매국노 아데르바알의 서신이 도착하려면 최소 닷새는 걸릴 거에요. 오늘 출발하면 카르페타니족 기병보다 최소한 이삼일 정도는 먼저 도착할 수 있어요!”
아직 어린 둘째 처남의 열변에도 공정한 하스드루발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나도 그 생각은 했어. 그런데 우리가 당장 보낼 수 있는 기병은 카르페타니족을 막기엔 턱없이 부족해. 이베리아족 기병 2,500기는 장인어른이 데리고 가셨고 지금 여기 있는 건 누미디아 기병 2천에 작년에 고용한 켈트족 기병 2천기가 전부지, 내가 카르페타니족의 왕이라면 아데르바알의 서신을 받자마자 병사 4만에서 5만 명 정도는 아야몬테로 보낼 텐데 말이야.”
하스드루발은 매형의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전생에 카르페타니족이 주변 부족과 연합해 10만이 넘는 대군을 모아 한니발 형과 싸웠다는 기록을 읽은 적이 있어. 기껏 국내파의 음모를 알아냈는데 손쓸 수 있는 방법은 전부 언 발에 오줌누기 수준밖에 안되다니!’
하스드루발은 절망에 빠져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그 때 그의 눈에 하밀카르의 책상위에 놓여있던 히스파니아 지도가 보였다.
“맞다! 매형! 아야몬테에서 가까운 가데스에 카르타고군 수비병이 좀 있잖아요! 파발을 띄워서 아버지에게 지원군을 좀 보내라고 하면 되겠네요!”
“그렇구나! 그 생각을 못했네! 그래도 가데스에서 보낼 수 있는 병력은 보병 4천에 기병 5백 정도일거야. 가데스에도 최소한의 수비병력은 남아야 하니까 말이야. 내가 보병들을 데리고 아무리 강행군을 해도 카르페타니족보다 일주일은 더 늦게 도착하겠지. 장인어른이 일주일 정도만 버텨주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스드루발은 지도를 손으로 들어 매형에게 보여주면서 대답했다.
“이 정도면 일주일 정도는 버틸 수 있을 수도 있겠어요.”
“승산이 있다고? 뭐 좋은 방법이라도 떠오른 거냐?”
“여기 지도를 보면 아야몬테는 삼면이 구아디아나강의 본류와 지류로 둘러싸여 있어요. 공성전에 배를 동원하지 않는 이상 정면에서 치는 수밖에 없겠죠.”
“그렇지.”
“카르페타니족도 아버지의 뒤를 치려면 한쪽 방향으로만 덮쳐오는 수밖에 없겠죠. 강을 건너다 날아오는 투창을 맞고 싶지 않다면요.”
“그렇겠지.”
“그렇다면 제가 몇 년 전부터 병기를 만드는 직공들에게 만들어두라고 한 물건이 있거든요. 그걸 써먹으면 일주일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에요.”
“그래? 하긴 네 지시로 직공들이 특이한 물건을 자주 만들고 있다고 듣긴 했다. 당장 무기고에 가보자!”
두 명의 하스드루발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무기고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무기고에 도착하자 무기고를 관리하는 병사가 두 하스드루발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장군님. 하스드루발 도련님은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게 말이야. 내가 전에 직공들에게 틈틈이 만들어두라고 한 물건을 가지러왔어.”
“어떤 거 말씀인가요? 그런 게 한 두 가지라야 말이지요.”
“이번엔 ‘쇠뿔’.”
“아 그거요? 그거라면 저기 쌓아놨습니다. 자리를 많이 차지해서 보관하느라 힘들었어요.”
하스드루발은 둘째 매형에게 ‘쇠뿔’이라고 부른 무기를 하나 가져와 보여주었다. 처남이 가져온 물건을 보고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걸로 카르페타니족 군대를 막겠다고?”
하스드루발이 가져온 무기는 그저 짧고 굵은 나무말뚝의 옆면에 길이 30cm 정도의 초승달 모양 칼날 두 개를 고정시킨 것뿐인 단순한 물건이었다.
“말뚝 윗면에 칼날 두 개가 삐져나온 게 꼭 이름처럼 뿔난 소 대가리 같은 모양이구나. 설마 말뚝부분을 양손으로 잡고 칼날로 적을 찌르는 건 아니겠지?”
하스드루발은 씨익 웃으며 매형에게 대답했다.
“당연히 아니죠. 적이 지나갈 경로를 미리 예측해서 이걸 땅에 박아둘 거에요. 말뚝 부분은 땅속에 묻어서 안보이게 하고 칼날만 지면 위로 삐죽 나오게요. 긴 풀이 자란 초원 같은데 박아두면 튀어나온 칼날도 잘 안보이니까 적들이 지나가다 밟고 다치는 거죠.”
그제서야 쇠뿔의 사용법을 이해한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이번 전투는 적의 이동경로를 예측하기 쉬우니까 아주 유용하겠어. 아군이 밟지 않게 주의만 잘하면 되겠구나.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해냈는지 모르겠네!”
매형의 칭찬에 하스드루발은 머쓱한 기분이 들어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기에 나온 로마군의 병기를 따라한 것뿐인데. 굳이 매형한테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 카이사르가 태어나려면 아직 백년도 더 남았으니까.’
하스드루발이 만든 쇠뿔은 로마군이 방어전을 치를 때 애용하는 ‘스티머러스’라는 이름의 소형병기를 본떠 만든 것이었다.
갈리아 전기의 기록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기원전 52년에 6만 명의 로마군을 이끌고 8만 명의 병력이 지키고 있는 알레시아라는 도시를 포위했다. 그러나 알레시아를 포위하던 카이사르의 군대는 무려 24만 8천명의 적군에게 등 뒤를 내주고 만다.
어쩔 수없이 카이사르는 눈앞의 알레시아 수비병과 등 뒤에서 몰려오는 적군을 모두 염두에 두고 2중 요새를 건설해 앞뒤에서 몰려오는 적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렇게 알레시아의 식량공급망을 끊고 갈리아인들이 굶주림에 지쳐 항복할 때까지 거센 공격을 막아낸 카이사르와 로마군은 결국 전투에서 승리한다.
그때 로마군은 요새의 성벽과 참호 사이에 마치 지뢰와 비슷한 용도의 함정을 설치해 큰 이득을 보았다.
바로 짧은 말뚝에 칼날을 붙인 ‘스티머러스’와 땅을 파서 구덩이 속에 1m 정도의 긴 말뚝을 박은 뒤 그 위를 나뭇잎 등으로 덮어 구덩이에 빠진 적군이 찔리도록 한 ‘리리움’이었다.
하스드루발은 바로 그 알레시아 공방전을 모방해 카르페타니족과 아야몬테 수비병들의 공세를 막아낼 생각이었다.
‘물론 알레시아 전투의 승리는 로마군 전원이 공병 수준의 금손 들이라 요새를 엄청난 속도로 지어서 가능한 거긴 했지. 그렇지만 매형이 원군을 데리고 올 때까지 일주일 정도 시간을 벌 요새는 아버지의 군대로도 충분히 지을 수 있을 거야.’
하스드루발은 아버지를 구할 희망이 보이자 매형과 함께 지원군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먼저 하밀카르와 가데스에 파발을 띄워 카르페타니족 대군이 몰려오고 있으니 미리 대비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 후 하스드루발은 부관 몇 명과 함께 기병 4천기를 이끌고 아야몬테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말 등위에 오르는 아직 어린 처남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겠니? 하루 종일 말을 달려도 8일은 걸릴 거리다. 그 쇠뿔인가 하는 물건을 한 사람이 세 개나 가지고 가니 더 걸릴 수도 있어. 이제 겨우 13살 밖에 안 된 네가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뭐 쉽진 안겠지만 해내야죠. 제가 구상한 요새를 만들려면 직접 가야해요. 그리고 이게 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는 말을 탈 때 다리가 덜 아파서 괜찮을 거에요.”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안장에 장착한 등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매형에게 보여주었다.
“그래. 그 보조기구가 꼭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나도 최대한 빨리 병사들을 모아서 뒤 따라가마. 바알 함몬께서 우리 바르카 가문을 지켜주시길.”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매형을 뒤로하고 하스드루발은 아야몬테를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 * *
“아오... 매형 말 대로 진짜 8일이나 걸려버렸네.”
기병 4천명을 이끌고 아야몬테로 출발한 하스드루발은 해가 뜨면 말 등에 올라 달리고 해가 지면 멈추기를 반복하며 8일간 열심히 달려온 끝에 아야몬테 근처에 자리잡은 하밀카르의 본진에 도착했다.
쇠뿔을 지니긴 했지만 가벼운 무장만 갖춘 경기병들만 데려온 터라 내심 더 빨리 도착할거라고 기대했던 하스드루발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생각해보니 고구려 개마무사들은 철갑을 두르고도 하루에 70km이상 행군했다고 인터넷에서 본적이 있는데. 우리는 더 가벼운 차림으로도 하루에 70km를 못 왔네. 국뽕 들이 개마무사에 자부심 느낄만하다 진짜.’
본지에 들어서는 하스드루발을 하밀카르와 한니발이 맞이했다. 말에서 내리는 둘째 아들에게 하밀카르가 말했다.
“고생 많았다 하스드루발. 그렇게 오래 말을 타고 달린 건 이번이 처음이지? 어디 아픈 데는 없니?”
“엉덩이가 안장에 쓸려서 좀 따가운 거 빼고는 괜찮아요. 파발꾼을 먼저 보냈는데 잘 도착했나요?”
“그래. 너랑 사위가 보낸 서신 잘 읽었다. 큰일을 해냈구나 하스드루발. 자칫 잘못하면 꼼짝없이 아무런 대비도 못하고 적에게 뒤를 내줄 뻔했어.”
“다행히 적의 의도는 미리 알아냈지만 아직 방심하기는 이른 것 같아요 아버지.”
“네 말이 맞다. 안 그래도 서신을 받자마자 급히 요새를 짓고 있었단다.”
하스드루발은 고개를 돌려 카르타고군의 본진을 둘러보았다. 본진의 한 쪽 면은 아야몬테의 성벽과 마주보고 있었고 그 반대편은 평평한 초원지대와 맞닿아 있었으며 다른 두면은 강변과 맞닿아 있었다.
병사들은 그런 본진의 주변에 목책을 두르고 해자를 파 직사각형 모양의 요새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목책을 세우는 병사들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나쁘진 않은데 요새라고 하기엔 좀 부족해. 로마군이 한 두시간만에 짓는 숙영지도 이거보다는 견고하겠어. 내가 나서서 요새를 좀 더 손봐야겠는데.’
“아버지. 이번 요새건설에 저도 참여하고 싶습니다.”
하스드루발은 하밀카르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가?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책으로 배운 병법과 전장에서 쌓은 경험을 잘 조화시켜야 한단다. 너는 아직 경험이 너무 부족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책에서 얻은 제 지식을 아버지께서 활용해 주세요.”
하밀카르는 아직 수염도 나지 않은 아들의 당찬 대답에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내 막사로 들어가자. 거기서 네 생각을 한번 찬찬히 설명해봐라.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도 궁금하긴 하구나.”
하밀카르는 부관에게 목책설치 작업의 지휘를 맡긴 뒤 두 아들과 함께 막사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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