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 [13화] 하밀카르를 구하라! (4)
하스드루발은 하밀카르와 한니발에게 쇠뿔을 보여주고 사용법을 알려준 후 그 것을 어디에 설치할 것이며 요새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요새 공략에 기병은 소용이 없으니 카르페타니족은 보병으로 공격해 올겁니다. 그런데 보병은 날아오는 창과 돌을 맞아가며 강을 건너기 어려우니 아마 수적 우위를 앞세워 평야지대 쪽에서 공격을 해올 가능성이 크죠. 그 때 아야몬테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도 분명 성문을 열고 공격해올 거고요.”
하스드루발의 말에 하밀카르가 대답했다.
“그렇겠지.”
“그러니 방어시설을 아야몬테 맞은편과 평야지대 양쪽에 집중적으로 설치해야 해요.”
“거기까지는 나와 생각이 같구나. 그래서 그 쇠뿔이라는 물건은 어디에 설치할 생각이냐?”
“목책 바깥에 해자를 두 겹 두르고 해자와 해자 사이에 설치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바깥 쪽 해자 너머에도 좀 묻어 두고요. 제가 가져온 쇠뿔 1만 2천개로는 수가 좀 부족할 테니 구덩이에 빠지면 뾰족한 말뚝에 찔리도록 하는 함정도 중간 중간 섞을 생각이에요.”
하밀카르는 하스드루발의 말을 듣고 양손으로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하룻밤 쓸 숙영지도 요새처럼 만드는 로마놈들도 무시하지 못할 요새구나! 다만 목책을 세우는데 쓸 목재도 빠듯한 게 좀 아쉽구나. 말뚝 함정은 그렇게 많이 만들지는 못하겠다.”
하밀카르의 말에 하스드루발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는 길에 보니 우리 본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어부들이 사는 촌락이 몇 곳 있었어요.”
하밀카르와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챘다. 어민들의 배와 집을 해체하여 말뚝과 목책을 만드는데 쓸 목재를 얻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이 침울해 하는 이유를 공감할 수 없었다.
“왜 울상을 짓고 있는 거냐? 착각하지 마라 하스드루발, 그 어민들은 카르타고 시민이 아니다. 히스파니아의 어촌 백 개를 불태워서라도 카르타고를 지킬 수 있으면 난 그렇게 할 거야.”
하스드루발은 고개를 들어 한니발을 노려보았다. 한니발은 그런 동생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한니발도 자신을 노려볼 거라고 생각했던 하스드루발은 오히려 그 무심한 표정이 더 섬뜩했다.
‘생각해보니 역사에서 한니발 형은 알프스를 넘은 다음 갈리아 지방을 지날 때 카르타고군에게 협력하기를 거부하는 갈리아인의 마을을 수없이 약탈하고 불태워버렸어. 카르타고 시민 이외의 사람들을 전쟁에 쓸 자원 정도로 보고 있는 거 아냐?’
그 때 하밀카르가 적진 한 가운데서 벌어진 두 아들들의 다툼을 중재했다.
“하스드루발. 전쟁터에서 지휘관이 인정에 약해지면 아군만 다치게 된다. 네 따듯한 마음이 언젠가 네 목을 조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한니발 앞으로 우리가 다스릴 지역에서 강도짓을 하는 것도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다. 정복한 지역을 안정시키는 것은 그 지역을 점령하는 것보다 훨씬 지난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어민의 집과 배를 뜯어 목재를 확보하고 그들에게는 카르타고에서 주조한 질 좋은 은화로 충분한 보상을 할 거다. 둘 다 그리 알거라.”
* * *
한니발이 지휘하는 기병들이 어촌에서 징발한 많은 양의 목재와 가데스에서 보내온 원군 4,500명이 도착하면서 카르타고군은 요새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카르타고군은 하스드루발의 지시에 따라 톱과 망치를 손에 들고 약 2.5m 높이의 목책으로 본진을 둘러싸고 목책 바로 뒤편에 24m 간격으로 병사 세 명이 올라설 수 있는 망루를 하나씩 짓기 시작했다.
또한 목책 바깥쪽에는 두 겹의 해자를 판 후 강물을 끌어와 물을 채우고 여기저기에 쇠뿔과 말뚝 함정을 설치했다.
카르페타니족도 카르타고군이 요새를 세우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척후병을 통해 카르타고군이 아야몬테의 남쪽 성문 앞에 요새를 새우고 있다는 사실을 안 카르페타니족은 경기병을 먼저 급파해 요새건설을 방해하려고 하였다.
“북서쪽 약 8스타디온(약 1.5km) 밖에서 적 기병 1,500여기 접근 중!”
목책을 세우던 장소 중 적습에 취약한 북서쪽 부분에 서둘러 만든 망루위에서 망을 보던 이베리아 보병이 외쳤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전생에 켈트족이 경기병을 공격적으로 운용해 적군의 식량수급이나 성벽건설을 방해하는 전술을 자주 사용한다는 기록을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충분한 대비를 한 상태였다.
카르페타니족의 경기병이 목책 공사현장에서 300m 정도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을 때 망루위의 병사가 깃발을 들어 신호를 하자 허리높이 정도까지 파내려간 참호 밑에서 웅크리고 숨어있던 발레아레스 투석병 150명이 일제히 일어나 슬링을 휘둘러 계란만한 납덩이를 날렸다.
발레아레스 제도 출신인 이 투석병들은 몸에 걸친 거라곤 튜닉뿐인 허름한 차림새와는 달리 활의 위력이 약해 원거리 병종이 천대받던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도 일류 용병으로 지중명성이 자자했다.
어린 시절부터 필사적으로 투석연습을 해온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은 가죽이나 나무껍질을 꼬아 만든 슬링(Sling)이라는 무기에 돌이나 납탄, 철탄을 넣고 공중에 원을 그리며 돌리다 원심력을 이용해 적에게 던졌다.
그렇게 슬링에서 쏘아진 탄환은 200m에서 300m나 되는 놀라운 유효사거리를 자랑했고 투구나 갑옷위에 맞혀도 적군의 뼈를 부러뜨리는 중상을 입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당시 유럽에서 사용됐던 활의 유효사거리가 대부분 50m도 안 되는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원거리 공격의 스페셜리스트라 할만 했다.
손쉬운 먹잇감으로 보이는 카르타고군에게 무작정 돌진하던 카르페타니족의 경기병 백여 명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번개 같은 속도로 날아온 납탄에 얼굴과 가슴을 얻어맞고 말 등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남은 카르페타니족 기병들이 날아오는 납탄을 막기 위해 방패를 들어 얼굴을 가리느라 경황이 없는 틈을 타 한니발이 하급장교 마하르발과 함께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이베리아 기병 2,500기를 이끌고 적에게 돌진했다.
“적은 혼란에 빠져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모두 돌격하라!”
한니발과 마하르발은 아군의 사선(射線)을 가로막고 달리다 날아오는 납탄에 뒤통수를 얻어맞지 않기 위해 각자 기병을 반반씩 나눠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의 좌익과 우익에서 출발해 카르페타니족 기병을 향해 돌격했다.
누미디아 기병만큼 솜씨가 좋지는 않았지만 마상 투창이 가능했던 이베리아 기병들이 납탄을 맞고 혼란에 빠진 적에게 접근해 재블린을 던지자 변변한 갑옷도 입고 있지 않던 카르페타니족 경기병들은 날아오는 창에 가슴이나 어깨를 꿰뚫린 채 낙마하고 말았다..
가지고 있던 재블린을 다 쓴 후 이베리아족 기병들은 검을 뽑아들고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했다.
한니발도 이베리아 기병들과 함께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해 마치 땅위에서처럼 자유자재로 창을 휘둘러 카르페타니족 기병을 열 두기나 처치하는 전공을 올렸다.
그 뒤에도 카르페타니족 경기병들은 방해공작을 몇 번 더 시도했지만 전공을 올리기는커녕 한니발의 효과적인 대처로 오히려 2천여기가 전사하고 5백기여기가 포로로 잡혀 전체의 절반이 넘는 병력만 잃고 말았다.
그렇게 한니발의 효과적인 방어와 하스드루발의 탁월한 건설지휘로 카르타고군은 전체길이 5km 정도의 목책과 두 겹의 해자를 두른 요새를 열흘 만에 완성했다.
하밀카르는 완성된 요새를 본 후 손바닥으로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등을 두들기며 기뻐했다.
“이토록 견고한 요새를 겨우 열흘 만에 짓다니! 너희 둘이 잘 해준 덕분이다! 정말 장하구나!”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하밀카르의 칭찬에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3만 8천명의 병사가 이정도 요새를 짓는데 열흘이나 걸리다니. 알레시아 전투에서 로마군 6만 명은 전체길이 15km인 이중요새를 겨우 한 달 만에 완성했어. 그것도 양면에 목책과 토성을 쌓고 3중 해자까지 둘러가면서 말이지. 로마를 이기려면 갈 길이 아직 멀겠네.’
요새를 완성하고 나서 급한 일을 마친 카르타고군 병사들은 요새 주변에 흩어져있는 카르페타니족 기병의 시체에서 전리품을 회수해오기 시작했다. 갑옷도 제대로 안 입은 경기병들이지만 그들이 지니고 있던 검이나 창은 쓸 만했기 때문이다.
그 때 하스드루발은 병사들이 회수해온 전리품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 이건 로마군 기병이 쓰는 스파타(Spatha)잖아? 이걸 왜 카르페타니족이 가지고 있었지?”
스파타는 로마군 기병이 주력무기로 사용하는 장검으로 로마군 보병이 사용하는 글라디우스보다 도신이 10cm~20cm 정도 더 길고 가는 것이 특징인 무기이다.
갈리아 지방에 사는 켈트족인 갈리아인들 같은 경우에는 로마군과 자주 충돌하였기 때문에 전리품으로 획득한 스파타를 가지고 있어도 그리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로마가 히스파니아에 세력을 뻗치기 전인 기원전 3세기에 아직 로마군과 싸워보기는커녕 구경도 해본 적이 없을 카르페타니족이 로마군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하스드루발은 요새가 완공된 바로 다음날 스파타가 히스파니아의 켈트족 기병 손에 쥐어졌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 * *
“남쪽 약 9스타디온(약 1.65km)거리에 적군 보병 다수 접근 중!”
망루위에서 망을 보던 병사가 카르타고군의 진영을 향해 소리쳐 적습을 알렸다.
하밀카르와 한니발은 갑옷을 갖춰 입고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하밀카르는 말을 타고 요새 안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각자의 위치에서 적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는 병사들을 큰 목소리로 격려했다.
“적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우리와 초원에서 회전을 벌일 생각으로 먼 길을 행군해 왔다! 그러나 신들께서 도우신 덕에 우리는 야비한 적들이 등 뒤를 노리며 다가오고 있는 것을 미리 알고 이 곳에 견고한 요새를 지었다. 지금 내 사위 하스드루발이 수만 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카르타헤나에서 이곳 아야몬테로 오고 있다! 겨우 일주일이다! 일주일만 버티면 승리의 여신은 우리에게 미소 지을 것이다!”
총사령관의 자신감 넘치는 연설에 다양한 국적과 인종으로 구성된 카르타군은 한 덩어리가 되어 환호성으로 대답했다.
하밀카르가 병사들을 고무시키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은 본진 중앙에 세워둔 망루에 올라 새까맣게 몰려오는 카르페타니족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이거 한 5만 명은 되겠는데. 무슨 좀비영화처럼 우르르 몰려오는구나.”
그 때 서서히 요새로 접근 중인 적 본대와 가장 가까운 남문 쪽 망루위의 병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카르타고군 본진을 향해 소리쳤다.
“로마군이다! 로마군이 카르페타니족과 함께 요새로 접근하고 있다!”
하스드루발은 병사의 외침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다가오는 적병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젠장! 정말 적군 중에 로마군이 섞여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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