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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5화 (15/201)

[ 15 ] [14화] 하밀카르를 구하라! (5)

하스두루발은 요새로 다가오는 적 본대 맨 앞줄의 병사들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이 로마군의 철제 사슬갑옷인 로리카 하마타(Lorica Hamata)와 청동 투구를 착용하고 있었고 양손에는 로마 군단병의 상징인 거대한 방패 스큐툼(Scutum)과 도신이 넓은 검 글라디우스(Gladius)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군 차림의 적군은 카르타고의 국내파가 낸 돈으로 로마가 만든 무구를 걸친 카르페타니족 병사들이었지만 하스드루발은 그런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로마군으로 위장한 카르페타니족 병사들을 본 카르타고군 병사들 중 1차 포에니전쟁에 참여했었던 고참병들이 가장 먼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로마와 카르페타니족이 연합했다! 곧 엄청난 대군이 몰려올 거야! 이젠 다 끝났어!”

로마와 카르페타니족의 의도대로 카르타고군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하밀카르는 부관들과 함께 말을 타고 요새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야 이놈들아! 체면 따지는 로마놈들이 선전포고도 안하고 기습 같은걸 하겠냐? 정신 차려라! 이놈들아!”

하밀카르가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지만 예상치 못한 강적을 눈앞에 둔 병사들은 눈에 띄게 전의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적군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카르페타니족 본대의 병사들은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카르타고군을 비웃기 시작했다.

그 중 본대의 좌익을 지키고 있던 로마군 복장의 기병 네 명이 요새의 목책 바로 앞까지 달려오더니 의기양양하게 검으로 방패를 두들겨대며 카르타고군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요새 남문 근처의 망루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한니발은 말없이 망루에서 내려와 투구를 쓰고 재블린이라고 불리는 투척용 짧은 창 세 개를 챙긴 후 말위에 오른 뒤 남문을 지키고 있는 리비아 병사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열어라.”

“한니발님. 아시다시피 하밀카르 총독님께서 명령하시기 전까지는 출진하실 수 없습니다...”

한니발은 병사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소리치며 명령했다.

“열어라!!”

리비아 병사들은 한니발의 기세에 압도당해 부리나케 요새 남문을 열고 해자 위에 가교를 내렸다.

문이 열리자 한니발은 왼손에 재블린 세 자루를 들고 오른손으로 만 고삐를 잡은 채 카르타고군을 조롱하는 적 기병들을 향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나갔다.

로마군 복장의 적 기병들도 근육 무늬가 새겨진 그리스식 청동흉갑과 투구를 착용한 기병 한기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고함을 지르며 한니발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적 기병들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고삐를 놓고 왼손에 쥐고 있던 재블린 하나를 오른손으로 잡은 후 맨 앞에서 달려오는 적에게 힘껏 던졌다.

“으억!”

아직 투창의 사정거리 밖이라고 생각해 방심하고 있던 적 기병은 갑자기 날아온 재블린에 목을 꿰뚫린 채 낙마하고 말았다.

동료가 죽는 것을 보고나서야 방패를 들어 몸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직선으로 달려오는 적의 오른편으로 선회하면서 마치 누미디아 기병처럼 몸을 뒤틀어 적 기병의 말에게 남은 재블린 두개를 던졌다.

-히히힝!

전속력으로 달리던 도중 번개처럼 날아온 재블린에 각각 목과 가슴을 꿰뚫린 말 두 마리가 기수와 함께 땅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동료 셋이 쓰러지자 남은 기병 한기는 말머리를 돌려 카르페타니족 본대로 부리나케 도망쳤다.

“와아아아!!”

한니발은 도망치는 적을 굳이 추적하지 않고 말에서 내려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어 낙마하면서 목이 부러져 죽은 로마군 차림의 적 기병 한명의 목을 벴다. 그런 다음 적병의 머리를 말안장에 매단 후 다시 말 등에 올라 유유히 요새로 돌아왔다.

망루 위에서 한니발의 활약을 지켜보던 카르타고군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하스드루발도 이번 전투가 첫 출전인 형의 활약을 보고 미소를 띠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말 위에서든 지상에서든 전사로서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는 리비우스의 기록을 읽긴 했었는데! 그냥 비유인줄 알았더니 팩트였네!”

카르타고군 병사들은 요새 문을 지나 본진으로 돌아와 말에서 내린 한니발에게 환호성을 보냈다. 그러나 하밀카르는 도끼눈을 뜨고 한니발에게 다가와 노기를 억누르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디 한번 변명 해봐라.”

하밀카르는 말 한 마디로 하급장교인 한니발이 상관의 허락 없이 요새 문을 열고 단기로 출진한 것을 꾸짖었다. 그러자 한니발이 화가 난 아버지에게 담담하게 대답했다.

“병사들 앞에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니발은 말안장에 매달아 둔 머리를 한손에 들고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든 후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망루 위의 병사들은 이 자가 로마군의 갑옷과 무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봐라! 이 자는 수염을 기르고 있다! 다들 로마인들은 면도를 하기 때문에 어린애처럼 턱이 매끈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자들은 그저 로마군의 무기를 가진 켈트족일 뿐이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아! 너희들은 우리가 작년에도 무찔렀던 켈트족이 두렵나?!”

한니발의 말에 병사들이 ‘아니다!’ 따위의 고함을 지르며 아우성쳤다. 그러자 한니발이 다시 병사들에게 외쳤다.

“그렇다면 각자 자기의 위치로 돌아가 명령을 기다려라! 불패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께서 너희들을 다시 한 번 승리로 이끄실 것이다!”

한니발이 말을 마치자 병사들은 순식간에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임전태세를 갖추었고 당장 군법대로 아들을 처벌할 것 같이 말하던 하밀카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으로 한니발의 등을 두들겨댔다.

“젊은 패기를 억누르지 못해 날 뛴 줄 알았더니 그런 계획이 다 있었구나! 이번만은 상과 벌을 상쇄 시켜주마!”

한편 카르타고군이 동요를 멈추고 임전태세를 갖추자 카르페타니족 본대도 조롱을 멈추고 먹잇감을 노리고 다가오는 맹수처럼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카르타고군의 요새로 한발 한발 다가왔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적군의 모습을 바라보며 앞으로 벌어질 전투의 흐름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로마군이 여기 온 게 아니구나. 로마가 카르페타니족에게 무기를 준 건가? 지금으로서는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로마군이 여기 없는 건 다행이네. 그래도 적병의 절반이상이 우리 병사들보다 좋은 트리아리(로마군 고참병)급 장비를 갖추고 있어. 최대한 많은 적이 함정에 빠지도록 유도해서 목책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해.’

생각을 마친 하스드루발은 망루 위에서 공성병기를 다루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오나거(Onager) 발사 준비!”

오나거는 기원전 3세기부터 지중해 세계에서 사용되던 공성무기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투석기인 캐터펄트(Catapult)를 개량해 생산성을 높인 무기이다.

하밀카르는 공성전을 위해 오나거 열 대를 가져왔는데 그 것을 하스드루발이 카르페타니족을 물리치는데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카르타고군이 가져온 오나거의 최대 사거리는 400m 정도였지만 하스드루발은 침착하게 적의 본대가 하밀카르가 지휘하고 있는 발레아레스 투석병의 사정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카르페나티족의 보병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하밀카르는 신호를 보내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에게 발사명령을 내렸다.

“발사!”

하스드루발의 조언으로 슬링을 잘 휘두를 수 있도록 일부러 상단을 널찍하게 만든 망루위에 서 있던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은 일제히 납탄을 쏘아댔다.

아직 궁병의 사정거리 밖이라고 생각해 느긋하게 전진하던 카르페타니족 병사 수백 명이 시속 140km로 날아온 계란만한 납덩이에 얻어맞고 코뼈가 부러지고 턱이 깨지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으어억!”

얼굴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동료들을 보고 카르페타니족 병사들은 방패를 들어 얼굴과 상체를 가리고 신중하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바로 하스드루발이 노리던 순간이었다.

“오나거 발사!”

하스드루발의 명령에 열대의 오나거가 커다란 돌덩어리를 일제히 공중으로 쏘아 올렸다.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돌덩어리들은 훈련된 병사라면 육안으로 보고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느렸다.

그러나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이 쏘아대는 납탄을 방패로 막느라 높은 각도에서 날아오는 거대한 돌덩어리를 미쳐 피하지 못한 카르페타니족 병사들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망가진 목각인형 같은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최대한 빨리 요새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카르페타니족은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무작정 돌진하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아야몬테를 수비하던 적병들도 성문을 열고 몰려나와 카르타고군의 요새를 덮쳐왔다.

‘예상대로군.’

본진 중앙의 망루위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하스드루발은 고양감과 죄악감이 섞인 복잡한 감정을 가슴속에 품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상대로라면 앞으로 벌어질 광경은 더욱 참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 화난 멧돼지처럼 무작정 앞만 보고 돌진하던 맨 앞 열의 카르페타니족과 아야몬테의 병사들이 갑자기 짚단처럼 힘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하스드루발이 설치한 함정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구아디아나 강변에 발등위로 뚫고나온 쇠뿔의 칼날을 빼내려는 카르페타니족 병사들과 말뚝 함정에 빠진 아야몬테 병사들의 비명과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하스드루발은 말없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함정에 당황한 카르페타니족과 아야몬테의 병사들이 혼란에 빠져 주춤하는 사이 발레아스 투석병과 오나거가 더 열심히 납탄과 돌덩어리를 날려댔다.

결국 그날 카르페타니족은 요새의 근처에 접근해보지도 못하고 8천명이 넘는 사상자만 낸 채 공세를 멈추고 후퇴했다.

그 후 카르페타니족은 다음날 날이 밝아도 오나거의 사정거리 밖에 세운 숙영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하밀카르가 척후병을 보내 적진의 움직임을 알아보게 했다. 말을 타고 나가 반나절이 지난 후 돌아온 척후병이 막사 안으로 들어와 하밀카르에게 보고했다.

“카르페타니족은 인근 어촌(漁村)의 배를 징발해 함정이 적은 강변 쪽에서 요새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군이 먼저 목재를 얻으려고 인근 어촌에서 배를 징발했기 때문에 애를 먹고 있는 모양입니다.”

보고를 들은 하밀카르는 활짝 웃으며 주변의 부관들에게 말했다.

“이제 나도 내 아들들의 기량을 가늠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바알 함몬께서 우리를 돕고 계신거야! 내 새끼들 이지만 정말 이름값 하는 녀석들이라니까!(한니발: 페니키아어로 ‘바알의 은총’ / 하스드루발: 페니키아어로 ‘바알의 도움’)”

한편 카르페나니족은 배를 구하는데 실패하고 아까운 시간만 이틀이나 보내버리자 단단히 약이 올랐다.

악에 바친 카르페타니족은 그들이 아야몬테에 도착한지 나흘 째 되던 날 하스드루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카르타고군의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날이 밝자마자 카르페타니족이 몰려있다는 병사의 외침에 하스드루발은 아침밥 삼아 먹고 있던 말린 육포를 집어던지고 본진 중앙의 망루에 올라 적진을 바라보았다.

“저런 개자식들!”

하스드루발은 먼발치에서 진격해오는 적군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카르페타니족에게 강제로 끌려온 허름한 옷 차림의 인근주민 수천 명이 조잡한 창 한 자루만 들고 적 본대의 맨 앞줄에서 겁에 질려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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