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 [15화] 하밀카르를 구하라! (6)
카르페타니족은 끌고 온 인근 지역의 어민과 농민 약 5천명을 줄 세워 세로 변의 길이가 조금 더 긴 직사각형 모양의 진형을 짜도록 강요했다.
진형이 완성되자 화려한 철제찰갑을 입고 말을 탄 카르페타니족의 장군은 나무장대에 송곳 같은 쇳조각만 달아놓은 조잡한 창을 양손에 꼭 쥐고 벌벌 떨고 있는 주민들에게 명령했다.
“돌진하라.”
같은 켈트족이라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주민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때 한 마을의 촌장으로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 말 탄 장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
“저 같은 늙은이는 어찌돼도 괜찮습니다! 제발 아직 수염도 안 난 어린 것들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카르페타니족 장군은 그런 노인을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한번 바라본 후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 먼지를 털어내듯 휘둘렀다.
그러자 장군의 검에 가슴팍을 베인 노인이 상처에서 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장군은 아직 피가 묻어있는 장검으로 카르타고군의 요새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가 살 기회는 등 뒤가 아닌 눈앞에 있다. 앞으로 돌진하다 죽기 전에 요새가 함락되면 살고 그 전에 쓰러지면 명예롭게 신들의 곁으로 가는 거다. 너희 작은 부족의 인간들은 그런 간단한 것도 이해 못하는 것이냐? 지금부터 움직이지 않는 자는 이 노인처럼 명예롭지 못하게 죽을 것이다. 어서 가라!!!”
장군의 고함소리에 주민들은 늑대의 울음소리를 듣고 도망치는 양떼처럼 무작정 앞으로 달려 나갔다. 몸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한 몇몇 주민들은 그 자리에서 카르페타니족 전사들이 휘두른 칼을 맞고 쓰러졌다.
주민들은 날아오는 옆에 동료들이 날카로운 칼날을 밟거나 구덩이에 빠져 말뚝에 찔려도 무작정 요새를 향해 달려 나갔다. 카르페타니족의 궁수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사람이나 다친 동료를 구하려고 그 자리에서 멈춘 사람들에게 화살을 쏘아댔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하밀카르는 곧 적장의 의도를 알아챘다.
“카르페타니족은 민간인들의 시체로 해자를 메울 생각이다! 저들이 해자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라!”
하밀카르의 명령을 듣고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은 요새로 달려오는 주민들에게 슬링으로 달걀만한 납탄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아악!”
“크으으윽!”
주민들은 옆에 서있던 동료들이 정면에서 날아오는 탄환에 머리와 가슴을 맞고 쓰러져가도 정면에서 날아오는 납탄보다 더 많은 카르페타니족 병사들이 등 뒤에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은 두 번째 해자를 넘지 못하고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주민들의 시체를 다리삼아 해자를 넘을 수 있게 되자 카르페타니족의 장군은 본대의 병사들에게 돌격명령을 내렸다.
“어차피 인간의 삶과 죽음은 신들께서 정하신다! 모두 돌격하라! 오늘 해가 지기 전에 하밀카르의 목을 잘라 왕께 바치자!”
장군의 명령에 카르페타니족 병사들은 우렁찬 함성으로 대답하며 요새를 향해 돌격했다.
- 우워어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스드루발은 피가 날정도로 세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죽일 놈들! 저 사람들이 이 전투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분노로 가슴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순간에도 하스드루발의 눈은 카르페타니족 본대의 움직임을 날카롭게 쫒고 있었다.
‘민간인들의 시체로 만들어진 다리는 그렇게 넓지 않아. 저 많은 병사가 저길 지나려들면 분명 병목현상이 생길거야. 그 때를 노리자.’
하스드루발은 발사된 돌덩이가 날아가는 속도와 켈티베리안족 본대 맨 앞 열의 병사들이 달려오는 속도를 계산하며 발사 타이밍을 재며 망루 아래의 오나거를 조종하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남서쪽! 거리 1스타디온(약 185m)! 5! 4! 3! 2! 1! 지금이다! 발사!”
최연소 카르타고군 장교의 구호에 맞춰 병사들은 오나거에 장전한 돌덩이를 일제히 발사했다.
- 터엉!
오나거가 열대가 일제히 둔탁한 소리를 내며 마치 당나귀가 뒷발을 찰 때처럼 덜컹거리자 거대한 돌덩이들이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카르페타니족 병사들은 경험으로 투석기에서 쏘아진 돌덩이가 자신을 향해 날아올 때는 정면으로 달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좁은 공간에 많은 병사가 모여 있었던 데다 시체를 밟고 해자를 건너고 있던 터라 발밑이 불안정해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덕분에 운석처럼 날아오던 열 개의 돌덩이 중 네 개가 앞장서서 해자를 건너던 로마군 차림의 켈트족 병사들을 직격했다.
- 콰앙!!
해자를 건너던 병사 수십 명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머리위로 떨어진 돌덩이에 맞고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주변에 나동그라졌다.
“아자! 좋았어!”
하스드루발은 주먹을 불끈 쥐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다 그런 자신에게 놀라 온몸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내가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기뻐하다니...’
그러나 전장의 급박한 상황은 하스드루발이 감상에 빠질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남쪽! 거리 2 스타디온(약 370m)! 적 오나거 발견!”
요새 남문 쪽 망루위의 병사가 본진을 향해 외쳤다. 하스드루발이 병사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남쪽을 바라보자 카르페타니족이 카르타고군의 것보다 거대한 오나거 세 대를 설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스드루발은 급히 망루 아래의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남쪽! 거리 2스타디온! 발사!”
병사들은 황급히 오나거에 돌덩이를 장전해 발사했다. 그러나 날아간 돌덩이들 중 두개가 적의 오나거 한 대를 파괴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하스드루발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젠장! 역시 오나거의 명중률은 거지같아!”
캐터펄트나 오나거 같은 고대의 투석기는 토션 스프링의 인장력으로 투사체를 발사했기 때문에 발사할 때 반동이 심해서 일정한 탄착군을 형성하기가 어려웠다.
카르타고의 병사들이 다시 오나거에 장전을 하는 틈에 카르페타니족의 오나거 두 대가 요새를 향해 커다란 돌덩어리를 발사했다.
그야말로 날벼락처럼 날아온 돌덩이 두 개가 나무로 만든 요새 남문을 강타해 산산조각 내버리자 카르페타니족 병사들은 우렁찬 함성을 질러댔다. 그 소리를 들은 하스드루발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켈트족 병사들은 전황이 불리하면 금방 사기를 잃고 후퇴하지만 전황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무작정 적을 향해 돌진하는데! 이거 정말 큰일 났네!’
하스드루발의 예상대로 광분한 카르페타니족은 이제 함정을 신경 쓰지 않고 산을 뽑을 기세로 부서진 요새로 달려들었다.
아군 본대의 보병들이 대신 발레아레스 투석병이 던져대는 납탄을 대신 맞는 동안 본대의 좌익과 우익에서 해자를 건넌 카르페타니족 궁병 수천 명이 해자를 넘어 활의 사정거리까지 접근해 망루 위의 병사들에게 화살을 쏘아댔다.
“으윽!”
미쳐 방패 뒤로 숨지 못한 발레아레스 투석병 몇 명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맞고 망루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적군의 사격이 주춤한 틈을 타 카르페타니족 본대의 보병들은 해자와 함정지대를 뚫고 부서진 요새 남문 코앞까지 진격해왔다.
남문 쪽 망루 위를 지키고 있는 발레아레스 투석병과 이베리아 보병들이 납탄과 재블린을 열심히 던져댔지만 압도적인 숫자의 적병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북문 쪽에서 달려온 전령이 하밀카르에게 적습을 알렸다.
“총독님! 아야몬테의 수비병 약 1만 명이 북문을 공격중입니다! 지금 당장 지원이 필요합니다!”
하밀카르는 전령의 말에 깊이 탄식하며 한니발을 불렀다.
“한니발! 마하르발과 함께 이 곳의 병사들을 지휘해 남문을 지켜다오! 나는 서쪽과 동쪽의 강변을 따르 두른 목책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일부 차출해 북문 쪽의 적습에 대응하겠다!”
한니발은 왼손에 든 방패를 움켜쥐며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맡겨주십시오.”
한니발은 마하르발에게 남문 수비군 본대의 양익을 지킬 이베리아 보병의 지휘를 맡기고 자신은 나무에 가죽을 덧씌운 원형방패와 2m 정도 길이의 긴 창으로 무장한 리비아 창병으로 구성된 본대를 이끌고 부서진 남문 바로 앞에 방어진형을 구축했다.
그러나 리비아 창병들은 존경하는 장군 하밀카르가 다른 전장으로 가버린 상황에 적병이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오는 것을 보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니발의 근처에 있던 병사 한명이 무기를 버리고 전선을 이탈하려하자 한니발은 들고 있던 팔카타를 휘둘러 탈영병의 등을 베어버렸다.
탈영병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쓰러져 즉사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병사들을 향해 한니발이 외쳤다.
“방패를 들고 창을 내밀어라! 저들은 사살한 적의 목을 잘라 머리를 자기 집 대문 앞에 장식하는 잔인한 족속들이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한다고 저들이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 거라 생각하지 마라! 살고 싶다면 죽여라!”
한니발의 야성적인 카리스마에 압도당한 카르타고군 병사들은 동요를 멈추고 방패를 높이 들어 임전태세를 갖췄다.
그 때 마침내 카르페타니족 본대가 부서진 요새 남문 밖에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로마군의 장비를 지니고 있던 카르페타니족 병사들이 리비아 창병을 향해 길이가 거의 2m에 가까운 투척용 창을 던져댔다.
리비아 창병들은 어렵지 않게 방패로 날아오는 창을 막았지만 그 것이 바로 카르페타니족이 의도한 바였다.
로마군이 필룸이라고 부르는 무겁고 긴 투척용 창은 적의 방패를 무력화 시키는 것이 주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리비아 창병 몇몇이 한손으로 들고 있던 방패에 2kg이 넘는 무겁고 긴 창이 몇 개 박히자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방패를 놓쳐버리는 바람에 견고했던 방패벽 한 곳에 빈틈이 생겼다.
카르페타니족 병사들이 짧은 양날검 글라디우스를 빼들고 그 빈틈으로 파고들려 하자 한니발은 자신을 호위하는 카르타고 출신 정예병사 몇 명을 이끌고 전선의 맨 앞으로 나서 검을 휘두르는 적병을 막아섰다.
한니발은 카르페타니족 병사가 괴성을 지르며 내지르는 검을 가볍게 방패로 막고 방패위로 팔카타를 도끼처럼 휘둘러 적병의 어깨를 내리쳤다.
“아악!”
1kg이 넘는 철검에 세차게 얻어맞은 적병은 어깨뼈에 금이 가며 앞으로 넘어졌지만 질 좋은 로마군의 사슬갑옷을 입고 있었던 덕에 날에 베이지는 않았다. 한니발은 바닥에 쓰러진 적병의 등을 검으로 찌르며 카르타고군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적은 튼튼한 사슬갑옷을 입고 있다! 베지 말고 찔러라!”
한니발의 지시를 들은 이베리아 병사들은 들고 있던 팔카타로 적을 베는 대신 찌르기 시작했다.
방패를 잃은 리비아 창병들도 마음을 다잡고 창 대신 검을 빼들고 전선을 유지하면서 순식간에 무너질 것만 같았던 남문 쪽 카르타고군의 방어선은 카르페타니족의 거센 공세에 잘 버텨내기 시작했다 .
한니발이 분투하여 요새 안으로 침입하려는 적병을 막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이 지휘하는 오나거 담당 공병들은 끊임없이 적진에 돌덩이를 날려 남은 두 대의 적 오나거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적이 모든 공성무기를 잃은 걸 확인한 하스드루발은 다시 망루 아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이제 당분간 요새의 목책이 무너질 일은 없다! 적 궁병대를 견제해 아군을 엄호하라! 남동쪽! 거리 1스타디온! 발사!”
카르타고군의 오나거가 카르페타니족의 궁병들을 향해 돌덩이 날리자 망루에 소낙비처럼 떨어지던 화살 세례가 많이 잦아들었다.
그 틈을 타 망루위의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이 다시 납탄을 던지기 시작하고 하밀카르가 요새 북문 쪽으로 쳐들어온 아야몬테 병사들을 물리친 후 남문 수비에 합류하면서 카르타고군은 남문이 부서지며 잃었던 사기를 완전히 회복했다.
그러나 카르페타니족도 기세를 잃지 않고 계속 요새로 몰려들면서 하늘이 붉은 석양으로 물들 때까지 팽팽한 공방전이 계속됐다.
양쪽 군대가 모두 지쳐갈 때쯤 요새 망루위에서 적진을 살피던 한 병사가 본진을 향해 외쳤다.
“신원불명의 보병 약 1만 명이 요새로 접근 중! 남동쪽! 거리 5스타디온!”
그 소리를 듣고 하스드루발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다 끝났어! 이 시점에 적의 후발대가 오다니!”
그의 계산으로는 둘째 매형이 이끌고 올 지원군은 아무리 빨라도 내일 저녁쯤에 도착할 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스드루발의 오판이었다.
갑자기 전장에 출현한 1만의 보병대는 약 4만 명의 카르타헤나 주둔군 중에서 추려낸 정예병 들이었다.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최대한 빨리 위기에 처한 장인과 처남들을 구하기 위해 체력이 좋은 정예병을 1만을 추려내 경무장만 갖추게 한 뒤 강행군을 해 시간에 맞춰 아야몬테에 도착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1만 명의 지원군은 약간의 수비 병력만 남아있던 카르페타니족의 본진을 순식간에 휩쓸고 요새를 공격하고 있던 카르페타니족 병사들의 배후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노바 카르타고에서 지원군이 왔다! 살았어! 이제 살았다고!”
지원군이 도착한 사실을 안 요새 안의 카르타고군은 더욱 맹렬하게 창과 검을 휘둘렀고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안 카르페타니족은 전의를 상실하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은 기적처럼 아군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는 온몸에 긴장이 풀려 망루위에 대(大)자로 누워버렸다.
“매형 나이스! 드디어 역사가 바뀌었다! 아버지를 살려냈다고!”
하스드루발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피로 물든 초원처럼 붉은 석양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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