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 [16화] 역사의 히스테리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지휘하는 1만 명의 정예병이 카르페타니족 본대의 배후를 습격해 섬멸하자 아야몬테의 주민들은 성문을 열고 카르타고군에게 항복했다.
하밀카르는 전투를 마친 후 사로잡은 전쟁포로들을 카르페타니족 출신과 아야몬테 주민 출신으로 나눈 다음 부관들에게 명령했다.
“아야몬테 출신 포로들은 지니고 있던 무구만 빼앗고 모두 풀어줘라. 카르페타니족 포로는 몸값을 받은 후에 석방할 생각이니 잘 감시하도록 하고.”
최악의 경우 부족민 전원이 노예로 팔려나갈 것까지 각오하고 있었던 아야몬테 주민들은 당시로서는 자비로운 정복자들에게 눈물을 보이며 감사했다.
하밀카르가 아야몬테의 부족민들을 다독이는 동안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전리품을 챙기고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둘째 매형과 함께 수만 구의 시신이 방치 되어있는 전장을 정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밀카르는 한창 전투 중일 때 보다 전투가 끝난 직후의 전장이 더 참혹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어린 둘째 아들을 시신수습작업에서 뺄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함정이 설치된 위치를 가장 잘 아는 자신이 반드시 작업에 참여해야한다며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뜻을 이루었다.
전후수습 작업을 총지휘 하게 된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부관들과 병사들을 모아놓고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아직 땅속에 묻혀있는 함정이 있을테니 발밑을 조심하면서 쇠뿔과 말뚝을 제거해라. 아야몬테 출신 병사의 시신은 유가족들에게 돌려보내고 아군과 민간인, 그리고 카르페타니족의 시신은 그룹별로 모아 간략한 장례를 치르면서 화장한다. 다만 카르페타니족 전사자 중 고급장교로 보이는 자들의 시신은 정중하게 장례를 치른 뒤 사절을 보내 유가족에게 돌려보내야한다.”
매형의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전생에 한참 역사공부를 하던 대학생 시절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이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에는 항상 로마군 고급장교의 시신을 따로 모아 정중한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을 읽고 이상하게 여겼던 적이 있었다.
한니발은 전쟁포로 중 로마의 동맹국 출신 보조병들은 조건 없이 풀어줬지만 로마시민권자인 군단병 출신 포로는 가혹한 사역을 시키다 행군에 방해가 되면 처형해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게 다 바르카 가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한 거였구나.’
전장 정리 작업이 시작되자 하스드루발이 지휘하는 병사들은 함정지대로 이동해 삽으로 땅을 두드리며 땅속에 묻혀있는 함정을 찾아내 제거하고 전사자들의 시신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가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드넓은 초원은 숨 막히게 조용했다.
검붉은 천으로 짠 수의(壽衣)로 시신을 감싸듯 굳은 피로 뒤덮힌 초원이 하스드루발의 갈색 눈동자에 비쳤다.
지성을 가진 보통사람이라면 이만큼의 죽음을 눈에 담은 후에는 공포와 분노로 가슴이 가득차야 마땅할 것이다.
적어도 며칠 전의 그라면 그렇게 그랬을 것이 분명했다.
하스드루발은 타인의 죽음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자신에게 심한 이질감이 들어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 전투 장면을 봤을 때는 구역질이 나왔는데 이젠 참을만하네. 결국 인간은 환경의 동물인가.’
그 때 병사들이 막 구덩이에서 꺼낸 한 청년의 시신이 하스드루발의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튜닉을 입고 군용이 아닌 너덜너덜한 가죽샌들을 신은 차림새로 볼 때 그는 카르페타니족에게 끌려온 인근 주민임이 분명했다.
말뚝에 가슴을 꿰뚫린 청년은 앞날이 창창한 자신의 죽음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바라보며 초원에 누워있었다.
하스드루발은 청년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이제 갓 스물 정도 됐을까? 내가 여기 오지 않았으면 이 사람은 지금쯤 강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겠지.’
역사는 계획에 없던 하스드루발의 행동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민간인 5천명의 목숨을 제물로 삼아 끔찍한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하스드루발은 죽은 청년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에 눈시울을 붉혔지만 자신의 무능함을 자책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신조차 전능하진 않은 세상이다. 내가 하는 일이 완벽할 수는 없어. 괴롭지만 해야 할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매 순간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해. 자책에 소비할 노력과 시간을 다음에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하는데 쓰자.’
그는 마음속의 후회를 애써 털어버리고 힘껏 던진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함정제거 작업이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바람에 전후수습 작업은 사흘이 지난 뒤에야 마무리 되었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하밀카르는 카르타고군의 고급장교 중 믿을만한 자에게 병사 6천명을 맡겨 아야몬테를 수비하게 하고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과 함께 카르타고군을 이끌고 카르타헤나 귀환 길에 올랐다.
그러나 긴 행군 끝에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환대가 아닌 비보(悲報)였다.
“하밀카르 총독님. 한 달 전 둘째 따님인 살람보 마님이 지병으로 신들의 곁으로 떠났습니다. 막내이신 마고 도련님이 상주를 맡아 이미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은 바르카 가문 3형제의 둘째 누나이자 공정한 하스드루발의 아내인 살람보가 세상을 떠났다는 저택 집사장의 보고를 듣고 눈시울을 붉혔다.
애처가였던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뜻밖의 비보에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너무 놀라 잠시 아무 말도 못하던 하밀카르가 정신을 차리고 집사장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런 큰 일이 벌어졌으면 당장 파발을 띄워 나에게 알렸어야 할 거 아니냐! 넌 우리가 전쟁터에 나가서 목숨 걸고 싸우는 동안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냐!”
집사장은 대노한 주인에게 침통한 표정으로 파피루스 한 장을 건네주며 대답했다.
“살람보님은 돌아가시기 전 제게 이번 원정이 끝날 때까지 전쟁터에 계신 가족분들에게 절대로 당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였습니다. 이건 그 내용이 담긴 살람보님께서 남긴 유서입니다.”
하밀카르는 집사장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낚아채 펼쳐보았다. 분노로 일그러졌던 하밀카르의 표정이 이내 슬픔으로 물들었다.
“내 딸 살람보의 친필이 분명하구나. 녀석. 목숨이 위태로운 와중에도 우리 걱정을 했구나.”
역사 지식 덕에 살람보의 죽음이 머지않았음을 알고 있던 하스드루발도 누나의 죽음에 가슴이 먹먹하긴 매한가지였다.
데릴사위와 결혼한 살람보는 남동생들과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며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둘째 누나를 잃은 바르카 가문 형제들의 슬픔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날짜까지는 알 수 없어도 살람보 누나가 조만간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내가 자기 진로를 틀어버렸다고 역사가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 같아.’
* * *
오랜 원정길에서 돌아온 바르카 가문의 남자 네 명은 당일 하루만 쉬고 다음날 카르타헤나 부근에 마련된 살람보의 묘지에 성묘를 다녀왔다.
성묘에서 돌아오자마자 하밀카르는 둘째 사위와 한니발, 하스드루발을 데리고 카르페타니족에게 군사기밀을 유출한 전 부사령관 아데르바알을 심문하기 위해 감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이 감옥에 도착했을 때 아데르바알은 쇠창살 안에서 손과 발에 족쇄를 찬 채로 주저앉아 있었다.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아데르바알을 보자마자 흥분하며 소리쳤다.
“매국노 자식! 너 때문에 예정에 없던 큰 전투가 벌어져 우리 병사와 애꿎은 민간인이 수천 명이나 죽었다! 그 전투 때문에 난 아내의 장례식에도 참석 못했고 말이지! 장인어른! 놈이 친필로 적고 인장까지 찍어 카르페타니족에게 보내던 서신을 이미 입수 했습니다. 증거도 충분하니 본국 눈치 볼 것없이 그냥 지금 목을 베어버리시죠!”
그러자 아데르바알은 그런 공정한 하스드루발의 말을 한쪽 입꼬리를 있는 힘껏 치켜 올리고 비웃으면서 비아냥거렸다.
“그래! 죽여라! 바르카 가문의 위선자 놈들아! 너희들은 나를 매국노라고 부르지만 너희야말로 카르타고를 망하게 할 놈들이다! 네놈들은 천한 빈민들에게 인기를 얻어 공화제를 폐지하고 왕족이 되려는 속셈이겠지! 그러나 네놈들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그 전에 강대한 로마의 심기를 거슬러 카르타고가 망해버릴 거라고! 거지들의 왕 하밀카르를 죽이지 못한 게 그저 억울할 뿐이다!”
아데르바알의 망언에 하밀카르는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네놈의 소원이 그렇다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정상적인 장례를 치르고 조상님들의 곁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마라.”
그 때 하스드루발이 아버지를 말렸다.
“아버지! 그러시면 안 됩니다 !”
“왜 안 된다는 말이냐? 나는 히스파니아 속주의 총독이다. 군사기밀을 적에게 유출한 저놈을 처형할 권한이 있단 말이다! 너는 이 아비와 네 형을 죽이려든 저놈에게 자비를 베풀란 말이냐?”
“그게 아니에요. 이렇게 죽이는 건 저 매국노에게 너무 관대한 처분입니다.”
하밀카르가 둘째 아들의 말에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이 재빨리 간수에게 명령했다.
“간수. 지금 당장 저 매국노에게 재갈을 물려라.”
간수가 하밀카르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자 하스드루발은 다시 한 번 다그쳤다.
“빨리!”
둘째 아들의 의도가 궁금해진 하밀카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간수는 감옥 문을 열고 들어가 아데르바알에게 재갈을 물렸다. 그러자 하스드루발이 아데르바알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 녀석이 저지른 일 때문에 카르타고의 청년장교 수십 명이 외지에서 죽었다. 우리는 살람보 누나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말이지. 여기서 너를 죽이면 네 가족들도 네 임종을 지키지 못할 거야.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 네 죄목을 카르타고 시민들에게 알린 다음 너를 본국으로 송환하시라고 건의할 생각이다.”
하스드루발의 말을 듣고 겁을 먹은 아데르바알은 눈을 크게 뜨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으읍! 으으읍!”
아데르바알이 본국에 소환되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운명은 단 하나. 반역자나 패장이 받게 되는 카르타고의 전통적인 형벌인 십자가형이었다.
카르타고에서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죄인은 시민광장 한복판에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린 다음 분노한 시민들이 던진 돌을 맞으며 카르타고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하스드르발은 이미 공포에 질려 얼굴이 도화지처럼 창백해진 아데르바알을 계속 몰아붙였다.
“행여 혀를 깨물어 자살하거나 굶어죽을 생각은 하지마라. 카르타고에 도착할 때까지 재갈을 물리고 식사를 거부해도 재갈에 구멍을 뚫어 깔때기를 꽂아 죽을 쏟아 넣을 테니까. 그러니 얌전히 조국에 돌아가서 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십자가에 매달려 시민들이 던지는 돌을 맞도록 해라.”
아데르바알은 이제 모든 걸 포기한 듯 하염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하밀카르는 그 모습을 보고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은 후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순간이나마 내가 저놈에게 동정심을 가질 줄이야. 하스드루발 네가 대 한노가 아니라 내 아들이라 참 다행스럽구나.”
* * *
하밀카르는 하스두루발의 건의를 받아들여 아데르바알을 본국 카르타고로 보내버렸다.
하스드루발은 그저 아버지를 죽이려한 매국노를 엄벌에 처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지만 역사는 이번에도 히스테리를 부렸다. 다만 이번 희생자는 바르카 가문이나 애꿎은 민간인이 아닌 카르타고의 국내파였다.
카르타고 시민들은 하스드루발의 예상보다 더 하밀카르를 아꼈고 그만큼 매국노 아데르바알과 그를 부사령관으로 추천한 국내파에게 분노했다.
거의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인 시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대 한노는 꼬리 자르기를 위해 아데르바알은 물론 그의 오른팔인 국내파의 2인자 아히나뎁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기세를 탄 해외파가 히스파니아 속주에 친 바르카 가문의 인물을 부사령관으로 보내는 것을 그저 멀뚱멀뚱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대 한노는 비르사 언덕 위에 있는 자신의 저택 발코니에서 가장 아끼던 측근 두 명이 십자가에 매달려 시민들이 던진 돌을 맞는 장면을 보며 소리쳤다.
“제기랄! 위험한 가시를 미리 뽑으려다 오히려 제대로 손톱 밑을 찔리고 말았구나! 바르카 가문의 위선자 놈들! 오늘의 치욕은 언젠가 반드시 갚아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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