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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8화 (18/201)

[ 18 ] [17화] 새옹지마 (1)

아야몬테 공방전이 끝난 후 카르타고군이 대부족인 카르페타니족에게 포위당하고도 오히려 큰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이 거센 바람을 등에 업은 들불처럼 전 히스파니아에 번져나갔다.

덕분에 하밀카르가 이끄는 바르카 가문과 전쟁을 벌이는 대신 우호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부족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히스파니아 원정사업은 원래의 역사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당연히 바르카 가문으로서는 마냥 기쁜 일이었지만 너무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내오는 히스파니아의 부족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된 사람도 있었다.

“하아... 준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받자마자 팔아버릴 수도 없고. 이 많은 물건들을 다 어디다 두지?”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자기 방 한 켠에 잔뜩 쌓여있는 선물더미를 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하밀카르는 둘째 딸 살람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딸의 유언에 따라 둘째 사위인 공정한 하스드루발을 양자로 삼았다.

살람보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남편이 바르카 가문의 남자로 남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게 바르카 가문에 갑자기 20대 후반의 홀아비 장남이 나타나자 거의 모든 이베리아족 부족의 왕들이 딸을 공정한 하스드루발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엄청난 양의 선물을 보내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매형이었던 맏형이 행복한 고민을 하는 것을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여기가 무슨 남자 아이돌 숙소도 아니고 팬한테 받은 선물 양이 진짜 장난 아니네. 팬이 소녀가 아니라 소녀의 아버지들이라는 게 함정이지만.’

하스드루발이 거대한 선물더미를 바라보며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큰형에게 말했다.

“매형은... 아니 이제 큰형이지 참. 비싼 물건 공짜로 받으면 좋지 왜 그렇게 고민을 하고 그러세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결혼할 예비신부한테 받은 거면 지참금으로 치면 되지만 내가 여러 여자랑 결혼 할 수는 없잖아? 카르타고인은 일부일처제의 전통을 지켜야 하니까 말이야. 결국 신부의 부족을 제외한 다른 부족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해야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말을 하다말고 또 땅이 꺼져라 한 숨을 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아직 재혼하기 싫다고. 부인도 참 너무하지. 추모할 시간도 안주고 이베리아족과 혼인하라니. 누가 바르카 가문 사람 아니랄까봐.”

살람보가 병약했던 탓에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은 없었지만 공정한 하스드루발과 살람보는 금슬 좋은 부부였다.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죽은 아내를 추모할 시간을 충분히 갖고 싶었지만 그런 남편의 마음을 잘 아는 살람보는 유언장에 남편에게 최대한 빨리 이베리아족 공주와 혼인하라는 부탁을 남겼던 것이다.

맏형이 홀아비의 우울함에 빠져들려는 낌새를 보이자 하스드루발이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큰형. 저는 왜 부르셨어요?”

“아 맞다. 한니발하고 네가 저번 전투에서 활약을 많이 했잖아? 그래서 선물을 주려고 불렀지.”

“오! 정말요? 뭔데요??”

“이번에 이베리아족에게 받은 선물 중 좋은 말 몇 마리가 있거든. 한니발도 병법 수업이 끝나면 바로 마구간으로 온다는구나. 우리도 슬슬 그쪽으로 출발하자.”

“아... 말...”

“어? 별로 안내키는 모양이지?”

“에이 전혀 안 그래요! 완전 기대되는데요? 얼마나 명마일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네요! 얼른 마구간으로 출발해요.”

자기도 모르게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던 하스드루발은 정곡을 찌른 큰형의 말에 허둥대며 대답했다.

사실 전생에 덕업일치를 위해 서양사학과에 진학할 정도로 역사 덕후인 하스드루발이 기병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지 않을 리 없었다.

‘고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전쟁사는 기병을 빼놓으면 얘기가 안 되지. 전쟁영화나 역사 다큐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적에게 용맹하게 돌진하는 모습도 멋있었고.’

하스드루발은 자신과 이름이 같은 큰형과 마구간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손에 땀을 쥐며 역사책에서 기병의 활약상을 읽던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함께 적 보병의 양익과 배후를 효율적으로 공격하며 보병은 보병끼리만, 기병은 기병끼리만 싸운다는 고대 전투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꾼 ‘왕의 친구’라는 뜻의 마케도니아의 정예 기병대 헤타이로이.

한니발이 로마의 8만 대군을 상대로 칸나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때 크게 활약한 누미디아 기병과 갈리아 기병.

그리고 등자가 유럽에 전해지면서 등장한 전신에 빛나는 갑주를 두르고 용맹하게 적진으로 돌격하는 중세의 기사들.

문제는 여러 역사 다큐와 영화를 보아온 하스드루발의 로망 속 기병은 하나같이 덩치 큰 늠름한 말을 타고 있다는 점이었다.

‘말이라... 이 시대의 말은 무슨 조랑말 같아서 폼이 전혀 안 난단 말이지. 선물은 역시 현찰이 최고인대. 말 대신 두둑한 은화주머니를 받으면 얼마나 좋아? 쇼 미 더 머니!!!’

기원전 3세기 지중해 세계의 말은 아직 품종 개량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아 현대나 중세의 말에 비해 대부분 몸집이 작고 근력과 지구력이 약해 하스드루발의 눈에는 영 성에 차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화나 올림픽 승마경기에서 보던 말들은 축구로 치면 드록바 같은 녀석들 이었나봐. 근육질에 덩치 큰 현대의 말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다 고대의 말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EPL 경기 보다가 조기축구회원들이 막걸리 한 잔 마시고 뛰는 시합을 보는듯한 느낌이랄까?’

바르카 가문의 마구간은 저택의 담장 안에 있었기 때문에 두 하스드루발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형님 오셨습니까. 하스드루발도 같이 왔구나.”

먼저 도착해 마구간 앞에서 서서 기다리고 있던 한니발이 두 사람을 보고 인사하자 하스드루발도 대답했다.

“한니발 형 일찍 왔네. 수업이 금방 끝났나봐?”

“중간에 그만두고 나왔어. 이제 병법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더 배울게 없겠어.”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대답에 놀라며 맏형이었던 둘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허세라고는 1도 모르는 진지한 성격이니까 저거 진심이겠지.’

하스드루발이 자라면서 보아온 한니발은 그야말로 군신(軍神)이 되기 위해 태어난 천재중의 천재였다.

한니발은 네 살 때부터 이미 어른처럼 말하고 글을 읽었는데 그 때부터 거의 매일 마케도니아의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술을 꾸준히 연구해왔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이 이제 실전경험만 더 쌓으면 전생에 책에서 읽었던 것처럼 인류역사상 최고의 전술가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워낙 뛰어난 지략에 가려져 역사에 많이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한니발은 아야몬테 공방전에서 보여준 것처럼 무예도 출중하고 내정 능력도 일류였다.

그러나 그토록 완벽에 가까운 천재 한니발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잘 안 가리는 구석이 있어. 원래의 역사에서 로마정벌에 성공했으면 마키아벨리가 아주 좋아라했을 거야. 그런 성격은 휘하의 병사들을 결속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이 다음에 로마연합을 붕괴시키는 데는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뭐 그 정도 단점도 없으면 너무 사기지. 그런데 이렇게 천재적인 형도 결국 로마를 이기지 못한 거잖아? 2차포에니 전쟁의 변수는 나밖에 없다. 빡세게 준비하자.’

한니발의 대답 한마디에 하스드루발이 또 전쟁 준비에 대한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이 미리 지시를 받은 마구간 지기가 형제들에게 말 두 마리를 데리고 왔다. 선물인 말이 도착하자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활짝 웃으며 동생들에게 말했다.

“처남들! 아니지 참. 이제 동생들이지. 아무튼 이 말들 좀 봐라. 저번 전투에서 활약한 너희들에게 정말 어울리는 녀석들 아니냐? 세계최고의 명마는 히스파니아산 말이라던데 이 녀석들은 분명 그중에서 최고일거다.”

큰형의 말에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의 눈에 샴프 광고 모델의 머릿결처럼 윤기 나는 검은색 갈기와 고대에는 보기 드문 거대한 체구를 뽐내는 늠름한 말 두 마리가 들어왔다.

하스드루발은 현대의 말처럼 체격이 좋은 명마를 보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큰형! 이렇게 커다란 말은 처음 봐요! 체고가 4큐빗(약 180cm)은 되겠는데요?”

“그렇지? 더 놀라운 건 이 녀석들 같은 어미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 라더구나. 그동안 많은 말들을 보아왔지만 쌍둥이 말은 듣도 보도 처음이야. 이베리아족은 건강한 말 쌍둥이가 태어나면 길한 징조로 여긴다더라.”

하스두루발은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쌍둥이 말에 대한 지식을 더듬어 보았다.

‘생각해보니 웹 서핑하다 어떤 블로그에서 쌍둥이 말이 건강하게 성체로 자랄 확률은 1만분의 1이라고 적혀있던걸 본 기억이 나네. 수의학이 발달한 21세기에 그 정도면 기원전 3세기에는 거의 로또 수준의 확률이라고 봐야겠지.’

21세기 한국에서는 미신을 일절 믿지 않았던 그였지만 고대에 환생 한 후에는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내다 보니 이베리아족의 말을 믿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넋 놓고 살면 일가족 몰살에 조국 멸망 확정이라 너무 긴장하면서 살아온 탓인가? 길한 징조라는 말을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고 싶네.’

평소 금욕적이고 사치에 관심이 없는 한니발도 형의 선물이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옅은 미소를 보이며 공정한 하스드루발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정말 훌륭한 군마네요 형님. 귀한 선물 감사합니다. 어서 이 말을 타고 로마의 성문 앞에 서고 싶네요.”

“고맙긴 뭘. 아직 어린 동생들이 벌써 전장에서 활약해주니 내가 더 고맙지. 아참. 두 마리 중 더 근육질인 녀석이 형이고 날렵한 녀석이 동생이래. 한니발이 힘 좋아 보이는 놈을 갖고 하스드루발은 날렵해 보이는 놈을 가지면 딱 이겠다. 여기서 아예 말 이름을 지어주지 그래? 이제 서로 십년 넘게 얼굴 볼 사이인대.”

한니발은 별 고민 없이 바로 말의 이름을 지었다.

“부케팔로스.”

한니발의 말에 하스드루발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니발 형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덕후니까 그 이름으로 지을 줄 알았지. 말 주제에 정복왕 주인을 만난 덕에 역사에 이름을 남긴 녀석. 그나저나 이 녀석 이름을 뭐라고 짓지? 이놈 이름도 혹시 역사에 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좀 고민되네?’

하스드루발이 결정장애에 고통 받으며 잠시 끙끙거리는 사이 동생 말이 빨리 이름을 지으라고 재촉이라도 하듯 큰 울음소리를 내며 뒷발로 일어섰다.

- 푸히히힝!

그 모습을 보자마자 하스드루발은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가 번뜩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어? 저거 완전 그거잖아!”

갑작스럽게 소리치는 동생을 두 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하스드루발은 아랑곳하지 않고 추억에 잠겨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에 집중했다.

전생에 그토록 간절히 원했지만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명품.

타보기는커녕 실물을 구경할 기회조차 별로 없었던 그 스포츠카의 엠블렘.

하스드루발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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