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 [18화] 새옹지마 (2)
“페라리.”
하스드루발이 말에게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를 이름으로 지어주자 한니발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페라리? 그게 무슨 뜻이지?”
“먼 이국땅의 신화에 나오는 바람보다 빠른 명마의 이름이야.”
“그런 게 있다고? 난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그런 게 있어.”
한니발에게 물음에 대충 대답 한 후 하스드루발은 자신과 같은 이름의 큰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큰형. 저 지금 페라리에 시승 해볼게요. 괜찮죠?”
“그럴래? 그럼 하인에게 안장을 가져오라고 시킬 테니 잠깐 기다려 봐.”
공정한 하스드루발의 지시를 받은 하인이 안장을 가져와 방금 페라리라는 이름이 붙은 말 등위에 얹었다.
하스드루발은 안장에 등자가 달려있지 않아서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당장 페라리에 타보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뭐 별일 있겠어? 등자달린 안장을 가져오려면 시간도 걸리고 어차피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보안 때문에 등자없이 말 타야하니 간만에 좋은 연습하는 셈 치지 뭐.’
하스드루발은 고민을 멈추고 페라리의 등에 올라 고삐를 당겼다.
“이랴!”
페라리는 이름값을 하며 엄청난 속도로 질주했다.
차가운 바람이 빨갛게 상기된 하스드루발의 볼을 상쾌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우왓! 이거 진짜 제로백 2초 나오는 거 아냐?”
하스드루발은 시원스러운 속도감에 몸을 맡기며 잠시 어깨에 짊어진 가족과 나라의 운명이라는 버거운 짐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만끽했다.
그 때 그의 상쾌한 표정을 질투라도 하듯 페라리의 진로에 있던 풀숲에서 갑자기 뱀이 기어 나와 진로에 끼어들었다.
덩치는 크지만 아직 어린데다 훈련이 덜 된 말은 뱀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질주를 멈추고 날뛰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은 로데오를 하는 카우보이처럼 고삐를 움켜쥐고 허벅지에 힘을 주며 버티려했지만 등자도 없는 상태에서 열세 살짜리 소년이 흥분해서 날뛰는 거대한 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으악!”
“저...저런! 하스드루발! 괜찮아?!”
하스드루발이 낙마하는 모습을 보고 놀란 두 형이 바닥에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는 어린 동생에게 소리치며 달려갔다.
형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하스드루발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다시 넘어지면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악! 내 다리!”
거의 10년 동안 전장을 떠돌며 수많은 부상자를 보아온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동생의 상태를 살펴본 후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하스드루발.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니?”
“잘 들려요. 그런데 왼쪽 다리가 너무 아파요!”
“이마에 상처가 있어서 머리를 다친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왼쪽다리는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 뼈가 부러진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일단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 봐야겠어.”
큰형이 다친 하스드루발을 돌보는 사이 한니발은 재빨리 하인들에게 부목과 붕대, 그리고 들것을 가져오게 해 다친 동생의 다리에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아 응급처치를 했다. 하스드루발이 다리가 아픈 와중에도 한니발의 능숙한 솜씨에 놀라며 물었다.
“형. 붕대 엄청 능숙하게 묶네. 의술은 언제 배운 거야?”
“가문의 주치의에게 간단한 응급처치 방법은 미리 배워뒀어. 전장에서 자주 쓰이는 기술이니까. 말 그만하고 안정을 취해라.”
“아얏! 다 좋은데 좀 살살 묶어!”
동생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대한 신속하게 응급처치를 마친 한니발은 고개를 돌려 물건을 가져온 하인들에게 말했다.
“거기 두 명. 하스드루발을 들것에 실어서 데려가 자기방의 침대에 눕혀라.”
“알겠습니다.”
하인들에게 지시를 마친 한니발은 이번에는 공정한 하스드루발을 돌아보며 말했다.
“형님. 하인들이 저 녀석을 침대에 눕힐 때까지 잠시 돌봐주시겠어요? 그사이에 저는 주치의를 데려오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여긴 걱정 말고 얼른 다녀와.”
그렇게 공정한 하스드루발의 지시를 받으며 하인들이 하스드루발을 저택으로 옮겨 그의 방 침대에 눕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니발이 가문의 주치의를 데리고 왔다.
의사는 침대에 누워 끙끙 앓고 있는 하스드루발을 진찰한 후 말했다.
“다행히 낙마한 장소가 지면이 부드러운 풀밭이라 생각보다 부상이 심하지는 않네요.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정강이뼈에 금이 조금 갔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 퉁퉁 붓기 시작할 겁니다. 수술은 필요 없지만 최소 세 달은 무리하게 몸을 쓰면 안 됩니다. 이마의 상처는 그저 가벼운 찰과상입니다만 상처에 이물질이 묻어서 좋을 건 없으니 일단 붕대는 감아두겠습니다.”
말을 마친 의사가 하스드루발의 이마에 붕대를 감기 시작한 그 때 갑자기 방문이 ‘쾅!’하고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방에 있던 네 사람이 깜짝 놀라 방문 쪽을 바라보니 하밀카르가 온몸이 땀에 젖은 채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처럼 숨을 가쁘게 헐떡거리며 서있었다.
하밀카르는 침대에 누워있는 하스드루발에게 의사가 머리에 붕대를 감겨주고 있는 것을 보고 눈시울을 붉히며 소리쳤다.
“하스드루발!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머리를 다친 거냐? 이보게! 애 상태가 좀 어떤가?”
“이마는 가벼운 찰과상입니다. 다리도 골절상을 입긴 했지만 석 달 정도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 질 겁니다.”
“확실한 거겠지?”
“환자가 무리하지 않고 안정을 취하면 문제없이 완치 될 겁니다. 저희 학파의 시조이신 히포크라테스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요.”
하스드루발의 부상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걸 알자 하밀카르의 걱정은 곧 노여움으로 바뀌었다.
“네 이놈 하스드루발! 마구간지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들었다. 아직 훈련도 충분히 되지 않은 말을 타고 그렇게 빨리 달리다니 정신이 나간 게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 벌로 상처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근신해라. 부상이 완치될 때 까지는 공부도 일도 금지야!”
“아버지! 그렇지만...”
“내 말대로 해라. 네가 하던 정보수집 업무는 당분간 네 큰형에게 맡길 거다. 마침 녀석이 맡고 있던 카르타고 노바 건설도 완성됐고 신부감을 고르려면 한동안 여기 남아있어야 하니까.”
하밀카르의 말에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대답했다.
“맡겨주세요 아버지. 동생도 나한테 잠시 맡기고 치료도 업무라고 생각하고 낫는 데만 전념해.”
하스드루발은 풀이 죽어 큰형에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러나 하밀카르의 노여움은 아직도 그칠 줄 몰랐다.
“그리고 그 말! 내 아들 다리를 분질러 먹은 빌어먹을 짐승을 살려둘 수는 없지. 밖에 누구 없느냐? 당장 하스드루발을 바닥에 내팽개친 건방진 말의 목을 쳐라!”
전혀 예상치 못한 하밀카르의 말에 방안에 있던 세 형제는 너무 놀라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맏이인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하밀카르를 말렸다.
“아버지. 일단 고정하시고 내일 다시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고정은 얼어 죽을! 내 오늘 그 동안 고생한 병사들이 신선한 말고기를 굽는 모습을 보아야 고정할 수 있을 거 같다! 말릴 생각하지 마!”
평소 아버지의 말을 잘 따르는 한니발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침착하게 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 말은 이베리아족 중에서도 세력이 강한 산악부족이 보낸 선물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그 말을 받자마자 잡아먹은 사실을 알면 상당히 섭섭해 할 겁니다.”
그러나 한니발의 논리적인 설득도 아버지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나도 섭섭해! 그놈들이 선물이랍시고 보낸 흉폭한 짐승이 금쪽같은 아들의 다리를 똑 부러뜨려서 굉장히 섭섭하다고!”
한니발은 아버지의 억지에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알 수가 없어 그만 입을 닫고 말았다.
하스드루발은 골절된 다리의 통증 때문에 말할 기운도 별로 없었지만 전생의 로망을 자극하는 애마가 잘 익은 고깃덩이가 될 위험에 처하자 온힘을 다해 아버지를 말렸다.
“안 돼요 아버지! 페라리를 죽이지 마세요!”
“그 놈 이름이 페라리냐? 거 누가 야만스런 산악부족의 말 이름 아니랄까봐...”
“제가 지은 이름이에요.”
“아주 이국적이고 독창적인 게 이름 하나는 좋구나.”
“아버지! 페라리를 갖는 건 제 평생의 소원 이었어요! 제발 죽이지 마세요!”
하스드루발의 말에 하밀카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제 열세 살 밖에 안 된 녀석이 평생은 무슨. 그리고 그 말을 언제 본적이 있다고 갖는 게 소원이었다는 거냐?”
갑자기 논리정연해진 아버지의 대답에 허를 찔린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처럼 말문이 막혔다.
‘그 말이 앞으로 2,200년 쯤 뒤에 나올 스포츠카 엠블렘을 닮아서 갖고 싶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나저나 왜 갑자기 저렇게 논리적 이신거야?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바로 여기 계시네.’
그러자 보다 못한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결국 하밀카르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아 장인어른! 아니 아버지! 대체 왜 그러세요? 그 말이 대체 얼마짜리인줄 아시고 그러세요?”
“제깟 말이 잘 쳐줘봐야 은 오백 세겔 정도겠지. 넌 내 아들사랑이 그 정도 값어치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느냐?”
“은 1달란트는 받을 수 있는 녀석이에요.”
장남의 말에 하밀카르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 대답했다.
“거짓말 마라. 카르타고에서 내 친구가 일꾼 70명을 써서 운영하는 방패 공장 1년 매상이 1달란트 정도야. 그 말이 무슨 페가수스라도 되냐? 한 마리에 1달란트나 하게.”
“날개가 달려서 날아다니지는 않지만 그 동안에 봐오신 말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명마에요. 게다가 건강한 쌍둥이로 태어나 이베리아족 사이에서 길한 징조로 여겨지는 희귀한 녀석이지요. 그 덕분에 이베리아족 사이에서는 비싼 값에 거래된다고 하네요.”
그 말에 하밀카르는 헛기침을 하면서 아들들에게 말했다.
“크흠... 내가 좀 흥분했구나. 너희들 말대로 한순간의 분풀이로 외교문제를 일으킬 순 없지. 그나저나 말 한 마리 가격이 1달란트? 대단하구먼.”
한니발의 논리적인 설득과 하스드루발의 생떼에도 수그러들 줄 모르던 하밀카르의 노여움은 ‘달란트’라는 단어 하나에 봄날의 눈처럼 녹아버렸다.
하스드루발은 페라리를 죽이지 않는다는 아버지 말에 일단 안심했지만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이제 아버지 말씀대로 몸 조심할게요.”
“그래 하스드루발. 부상이 완치 될 때까지는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
“명심할게요. 그런데 아버지.”
“응?”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어요.”
“왜?”
“부정(父情)의 가격을 알아버려서요.”
하밀카르는 어린 아들의 당돌한 말에 놀란 마음을 애써 숨기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스드루발.”
“네?”
“내가 전에 우리 페니키아인의 본질이 뭐라고 했지?”
“상인이라고 하셨죠.”
아들의 대답에 하밀카르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돈 싫어하는 상인 본 적 있느냐? 너무 삐지지 말거라.”
능청스러운 아버지의 대답에 하스드루발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능구렁이 같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아버지라니까. 그나저나 앞으로 석달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다. 일단 2차포에니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큰 그림을 짜봐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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