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 [20화] 비누는 이제 그만! 명품이 답이다! (2)
“우리도 명품 팔아서 돈 좀 만져보자!”
하스드루발은 조금 전 떠오른 아이디어로 돈을 벌 생각에 벌써 들떠있었다.
그 아이디어의 정체는 자주색 불꽃을 하늘에 쏘아 올리는 연화(煙火: 불꽃놀이용 화공품)를 만들어 판다는 계획이었다.
“그 때 수강신청에 성공했으면 이런 발상은 아예 못했을 텐데 말이지. 인생 참 재밌어.”
그는 전생에 서울대에 다니던 시절 2학년 1학기 수강신청에 실패하는 바람에 내키지 않는 교양과목을 몇 개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화학과 문명’이었다.
그 과목을 담당한 교수는 ‘문명’보다는 ‘화학’에 방점을 찍고 수업을 진행하면서 학점은 짜게 주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이름대신 ‘C 뿌리는 교수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괴짜였다.
덕분에 하스드루발은 ‘역사 속의 불꽃놀이’라는 주제로 거의 졸업논문 수준의 중간고사 대체 레포트를 작성했었고 심지어 화공품 생산업체에 직접 찾아가 연화 생산 작업을 견학해야만 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지금까지도 연화의 구조와 흑색화약의 성분, 그리고 특정 물질이 불꽃에 닿았을 때 불꽃의 색이 변하는 불꽃반응에 대해 꽤 자세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 화학과 문명이 의외로 A+ 나온 덕분에 과탑먹고 전장(전액장학금) 탔었는데. 그 지식을 다시 써먹을 기회가 생기다니 신기하구만. 지금 시대는 야금술 수준이 낮고 초석을 대량생산하기도 어려워서 화약무기 개발은 말도 안 돼. 그렇지만 불꽃놀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흑색화약은 배합비율만 알면 초딩도 만들 수 있고 연화는 현대에도 거의 100% 사람 손으로 만드니까 말이야. 일단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부터 찬찬히 생각해보자.’
그는 숙면을 취해 뇌를 재부팅한 후 눈을 뜨자마자 책상에 앉았다. 그런 다음 깃털 끝에 잉크를 묻혀 연화 개발을 위해 해결해야할 과제를 생각나는 대로 파피루스에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1. 칼륨 확보
- 칼륨의 불꽃반응색은 티리언 퍼플과 비슷한 보라색. 연화제작에 필수!
- 칼륨은 유리제작에 필요한 재료. 고대의 유리공예품 장인들은 식물을 태운 재에서 칼륨을 얻었음. 유리공예 장인에게 문의할 것.
2. 흑색화약 및 연화 개발
- 황 10%, 숯 15%, 염초 75%에서 시작해 적정 배합비율을 찾아야함.
- 염초 생산필요. 일단 오래된 담장 밑이나 분뇨가 쌓인 곳의 흙부터 채취해야함.
- 나 혼자서는 도저히 무리. 사람을 뽑자!
3. 기술자 모집
- 현재의 화학발전 정도: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 수준.
- 화학지식이 없더라도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의 발상과 노하우는 도움이 될 것임.
- 화학물질을 다루는 직군의 기술자 모집 필요 (의술, 유리공예, 염료제작 등)
4. 아버지를 설득해 인적·물적 지원을 받아낼 것.
- 메소드 연기 필요. 아들바보 성향을 활용해야 함. 최대한 귀여운 척! 불쌍한 척!
대략적인 계획을 세운 하스드루발은 일단 아버지부터 설득해 지원을 얻어내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는 점령지 시찰 준비로 요즘 많이 바쁘시지. 괜히 한참 일하실 때 찾아가서 부탁하면 역효과만 난다. 저녁 드시고 방에서 와인 한잔 하실 때를 노리자.’
하스드루발은 저녁식사를 마친 후 연화제작의 첫 단추를 꿰기 위해 목발을 짚고 하밀카르를 찾아갔다. 그는 아버지의 방에 들어서기 전에 자기암시를 걸었다.
‘나는 열세 살짜리 소년이다. 영혼을 갉아 먹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부모에게 생떼를 쓰러온 초딩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후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에 아버지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저 하스드루발이에요.”
그러자 방안에서 하밀카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스드루발? 어서 들어오너라.”
하스드루발이 방문을 열자 하밀카르가 방문 앞까지 나와서 아들을 맞았다.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이 아비를 찾느냐?”
“그냥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왔지요.”
“귀여운 녀석. 마침 술안주 삼으려고 아몬드를 좀 가져왔는데 좀 먹어보렴. 이번에 들여온 물건은 특히 품질이 좋구나.”
“아몬드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먹겠습니다 아버지!”
하스드루발은 주안상이 차려져있는 탁자 앞에 앉아 아몬드를 먹기 시작했다. 하밀카르는 다람쥐처럼 아몬드를 오독오독 깨물어 먹는 아들을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요즘 다리는 좀 많이 나았느냐?”
“많이 좋아졌어요. 통증보다는 심심한 게 더 괴로울 정도라니까요? 그래서 말인 데요 아버지...”
그 때 하밀카르가 갑자기 도끼눈을 부릅뜨며 다짜고짜 아들의 말을 잘랐다.
“안 돼!”
당황한 하스드루발은 놀란 얼굴로 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 대체 뭐가 안된다는 말씀이신가요?”
“내가 네 속을 모르겠냐? 분명 또 뭔가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 꿍꿍이겠지. 너 아직 다리 다친 지 일주일 밖에 안 됐다. 의사가 세 달 동안은 무조건 안정을 취하랬어. 뭔지 몰라도 다 낫기 전에는 절대로 안 돼!”
하스드루발은 아버지에 말에 속으로 뜨끔했지만 간신히 겉으로는 당황하는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역시 우리 아버지. 한 계파의 수장답게 눈치가 보통이 아니시네. 그렇지만 아직은 예상범위 안이다.’
그는 아버지를 찾아가기 전에 미리 청동거울을 보며 연습한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하밀카르에게 말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요즘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려니까 너무 심심해서 장남감을 좀 만들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장난감?”
예상치 못한 아들의 대답에 하밀카르의 엄한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 하스드루발은 울먹거리는 시늉까지 하며 계속 부정(父精)을 자극했다.
“그동안은 항상 바쁘게 지내느라 별로 놀아보지도 못했잖아요. 그래서 이럴 때라도 신나게 놀아보고 싶어서 장남감을 만들어줄 직공과 재료를 부탁드리려던 건데...”
원래 카르타고의 아이들은 가업을 잇기 위한 교육을 받느라 바쁜 게 보통이었지만 ‘타도 로마’가 가훈인 바르카 가문의 아들들은 다른 카르타고의 아이들에 비해서도 더욱 혹독한 교육을 받아야만했다.
평소 어린 아들들에게 놀 시간도 줄 수없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온 하밀카르는 그만 아들의 거짓된 눈물에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이 애비가 미안하구나 하스드루발! 네가 너무 총명하고 어른스러워 아직 한참 놀고 싶은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래! 요양하는 동안은 맘껏 놀아라! 나는 며칠 후에 집을 비우지만 집사장에게 네가 장난감 만드는데 필요한건 다 구해주라고 얘기해두마!”
아버지에게 원하는 답을 얻어내자 하스드루발은 활짝 웃으며 하밀카르를 끌어안았다.
“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아버지가 최고에요!”
원하는 것을 얻어낸 하스드루발은 기쁨에 들뜬 13세 소년의 모습을 연기해 아빠마음을 감동으로 촉촉이 적신 후 방문을 나서자마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애교. 성공적.”
* * *
닷새 후 하밀카르가 점령지를 시찰하기 위해 카르타헤나를 떠나자 하스드루발은 본격적으로 연화 개발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맨 먼저 하스드루발은 집사장을 불러 필요한 인원과 설비를 준비하게 했다.
“솜씨 좋은 유리장인하고 염료장인, 약을 잘 만드는 의사를 최대한 여러 명 모아주게. 손재주 좋은 조각가 서너 명하고 잡일을 한 일꾼도 한 50명쯤 필요하네. 그리고 창고를 하나 비워서 일꾼을 제외한 다른 인원이 모두 들어갈 수 있는 작업장도 하나 마련해주게.”
하밀카르에게 어린 도련님이 장난감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손재주 좋은 직공 한두 명 정도를 구하면 되겠거니 하고 생각하던 집사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련님 도대체 뭘 만드실 계획이시기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하십니까? 게다가 건물이 필요하시다고요?”
“뭘 만들지는 아직 비밀이네. 아직 세상에 없는 물건을 만들 계획이거든.”
집사장은 어린 도련님의 말에 당황했지만 하밀카르에게 하스드루발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라는 지시를 받았던 터라 군말 없이 모든 요구사항을 들어주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바르카 가문 저택 담 장안에 마련된 작업장에 당장 구할 수 없었던 염초를 제외한 재료를 어느 정도 모은 후 32명의 기술자를 불러들였다.
페니키아인들은 운송비를 줄이기 위해 아예 무역거점에 공장을 세우고 유리공예품 등의 상품을 생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카르타고의 새로운 무역 중추로 떠오른 카르타헤나에도 본국에서 건너온 다양한 직군의 기술자들이 많았다. 그 덕분에 하스드루발은 빠른 시간 안에 솜씨 좋은 기술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
히스파니아 총독이 자신들에게 시킬 일이 있다는 말만 듣고 모인 기술자들은 하밀카르 대신 자신들의 앞에 목발을 짚고 서있는 어린 귀족 도련님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스드루발은 모인 사람의 인원수를 확인한 후 그들에게 말했다.
“모두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네. 나는 히스파니아 총독이신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하스드루발이라고 하네. 오늘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그대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줬으면 하는 물건이 있어서네. 먼저 유리장인들은 손을 들어보도록 하게.”
그의 말에 유리장인 여덟 명이 손을 들자 하스드루발은 그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
“유리를 만들 때 잿가루를 사용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맞는가?”
“맞습니다. 저는 밀짚이나 콩깍지를 태운 재를 우려낸 물을 항아리 담아 증발시키고 남은 흰 가루를 주로 사용하곤 합니다. 저희 같은 유리장인들은 그걸 항아리 잿가루라고 부르지요.”
“혹시 그 항아리 잿가루를 지금 가지고 있나?”
“네. 유리공예품을 만들게 하실 거라고 생각해서 넉넉히 가지고 왔습니다.”
“그거 조금만 써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도련님.”
유리장인은 하스드루발에게 소금처럼 하얀 가루가 가득 들어있는 작은 항아리를 건네주었다.
흰 가루는 화학적으로 순수한 칼륨이 아닌 탄산칼륨에 가까운 물질이었지만 문과출신인 그가 인터넷도 없는 고대에 그런 것까지 알 방도는 없었다.
하스드루발은 미리 준비한 큰 나무국자로 그 안에 든 흰 가루를 가득 펐다.
그러고 나서 그의 옆에 서있던 하인에게 손에 들고 있는 등불을 바닥에 내려놓게 한 후 불꽃 위에 흰 가루를 조심스럽게 부었다.
조금씩 떨어지는 흰 가루가 불꽃에 닿자 불꽃은 순간적으로 티리언 퍼플과 거의 비슷한 보라색으로 변했다.
- 오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대다수가 자기도 모르게 태어나서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감탄했다.
그러나 지중해세계에서 가장 귀한 색으로 변한 불꽃을 눈앞에 두고도 유리장인들의 반응은 담담하기만 했다. 탄산칼륨이 든 항아리를 하스드루발에게 건넨 유리장인이 보라색 불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도련님 저희 유리장이들은 직업상 일을 하다보면 종종 그 보라색 불꽃을 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불꽃에 항아리 잿가루를 계속 뿌리지 않는 한 금방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하스드루발은 유리장인의 말에 대답했다.
“자네 말이 맞네. 보라색 불꽃은 금방 사라지고 말지. 그래서 나는 커다란 불꽃을 하늘로 쏘아 올릴 수 있는 물건 만들 생각이네. 그러면 이 아름다운 불꽃이 사그라지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길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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