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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24화 (24/201)

[ 24 ] [23화] 가족회의

하밀카르는 히스파니아의 불을 경매에 붙이기 전에 불꽃축제를 열고 싶다는 아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옳거니! 올림픽에서의 홍보로 입소문을 탄 불꽃놀이를 직접 볼 수 있다고 알리면 많은 관광객들이 카르타고로 몰려들겠구나! 당연히 관광을 하는 김에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도 많아지겠지!”

“맞아요! 그리고 기왕 경매를 하는 김에 다른 상품도 내놓는 게 좋겠어요.”

아들의 말에 하밀카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히스파니아의 불 말고 경매에 내놓을만한 다른 물건이 있는 게냐?”

“그런 건 아니고요. 기왕 경매장을 만드는 김에 우리 상품만 팔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물건도 대신 팔아주면 어떨까 싶어요. 재산은 많지만 상거래 경험이 적은 사람은 물건을 사다 바가지를 쓰거나 좋은 물건을 헐값에 팔게 되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바르카 가문이 명품 거래 중개자 역할을 해주는 거에요. 판매위탁자는 좋은 물건을 제값 받고 팔고 구매자는 품질을 보증 받은 상품을 안심하고 사는 거죠. 대신 물건이 팔릴 때마다 양쪽 모두에게 수수료를 받고요.”

경매는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래방식이지만 보통 판매자가 자신의 물건을 팔기위해 직접 경매를 하거나 하인을 시켜 경매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대에도 다른 사람에게 보수를 받고 남의 물건을 경매해주는 주는 전문경매사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판매자에게 고용돼 대신 물건을 팔 뿐 구매자에게 상품의 품질을 보증하지는 않았다.

열세 살짜리 아들이 새로운 거래방식을 고안해내자 하밀카르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상품이 아니라 상인으로서의 능력을 파는 셈이로군! 물건이 팔리지 않아도 우리는 금전적 손실을 입지는 않겠구나. 확실히 불꽃놀이를 보러 카르타고에 오는 김에 자기 물건을 몇 개 팔려는 수집가들이 제법 많겠어. 어떻게 그런 기발한 생각을 다 해냈느냐?”

하스드루발은 아버지의 질문에 절반의 사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말씀을 듣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에요.”

하스드루발이 아버지의 말을 듣고 올림픽처럼 사람을 많이 모을 수 있는 이벤트를 생각하다 불꽃축제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미술품 경매와 비슷한 방식으로 경매장을 운영할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그와 전생의 마지막 날 함께 소주를 마시고 삽겹살을 굽던 금수저 친구 태영의 덕분이었다.

현대의 한국에서는 내국인 생존작가가 만든 작품이나 작고한 내국인 미술작가의 유작 중 한 점 가격이 6천만 원 이하인 작품은 타인에게 양도해도 양도세가 면제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대한민국의 상류층들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한 수단으로 미술품을 애용하는데 중견기업 회장인 태영의 아버지도 투자와 절세를 목적으로 미술품을 자주 사들였고 그 일을 종종 태영에게 맡겼다.

태영은 미술품 보다는 자동차나 시계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시킬 때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미술품 경매장에 다녀오곤 했는데 전생의 하스드루발은 고대와 현대의 경매제도의 차이를 비교하는 연구를 하느라 태영에게 부탁해 회원제로 운영되는 경매장에 함께 갔던 적이 있었다.

그 덕에 하스드루발은 현대의 미술품 경매제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계획이 생각대로 실현 됐을 때 바르카 가문이 얻을 이득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그저 히스파니아의 불을 팔아서 알프스를 넘을 때 병사들에게 입힐 방한장비나 마련할 수 있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잘하면 기원전 3세기의 소더비 경매회사를 차릴 수도 있겠다!’

하밀카르는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 한다는 말을 온 몸으로 실천하려는 듯 하스드루발과 함께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아들들과 바르카 가문의 가정교사 실레노스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회의를 열었다.

회의참석자가 모두 원형 테이블 앞에 앉은 것을 확인하고 하밀카르가 입을 열었다.

“다들 작은 하스드루발이 만든 물건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바르카 가문 사람들은 하밀카르가 후세의 역사가들이 공정한 하스드루발로 부르는 둘째 사위를 양자로 들이고 난 이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장남을 큰 하스드루발, 삼남을 작은 하스드루발로 부르고 있었다.

하밀카르의 말에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대답했다.

“몇 주 전에 엄청난 소리가 나면서 자주색 불꽃이 하늘을 덮는 걸 보고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바알 함몬께서 자줏빛 천둥벼락으로 우리 가문에 축복을 내리시는 걸로만 알았다니까요?”

장남의 말에 하밀카르가 너털웃음을 터뜨린 후 대답했다.

“나도 설명을 듣지 않고 불꽃놀이를 봤으면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겠구나. 작은 하스드루발이 그 히스파니아의 불이라는 물건을 이용해 새로운 수익원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모두 귀 기울여 들어보도록 해라.”

하스드루발은 가족들과 실레노스에게 아버지에게 들었던 히스파니의 불 홍보 전략과 불꽃축제, 경매장 설립계획을 설명했다. 아직 어려서 형의 말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한 마고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상체를 앞으로 숙여가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동생이 말을 마치자 한니발이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

“홍보나 축제 준비에 어느 정도 지출이 필요한 걸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시도해 볼만합니다. 만약 이번 사업이 성공한다면 로마 원정을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면서 카르타고 시민들의 살림살이에도 도움을 줄 수 있겠지요.”

한니발의 말에 하스드루발은 오랜만에 입은 바지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찾은 어린아이처럼 기쁜 표정을 지었다.

‘맞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고객들이 축제와 경매를 즐기는 동안 그 일행들이 쓸 숙박비와 식비는 모두 카르타고 시민들의 주머니에 들어갈 거야. 본국에서 우리 가문과 해외파 의 입지가 더 단단해지겠지네.’

하밀카르는 한니발의 말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생각과 같구나. 그러니 이번 사업을 꼭 성공시키도록 하자. 이제부터 역할을 분담하겠다. 먼저 큰 하스드루발과 한니발은 히스파니아의 불을 가지고 사절단이 올림피아에 까지 갈 때 타고 갈 배를 준비하도록 해라. 올림픽 개막까지 기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니 시간에 맞춰서 가려면 노련한 선원들을 빨리 모집해야 할 거야.”

“맡겨주세요 아버지.”

“알겠습니다.”

두 아들에게 대답을 들은 다음 하밀카르는 실레노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실레노스. 배가 준비되는 대로 올림피아로 가서 올림픽 주최자들에게 히스파니아의 불을 선물하고 올림픽 개막식이나 폐막식에 불꽃놀이를 하도록 설득해주게. 우리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들은 조상대대로 사이가 좋지 않지. 그런 우리가 아무 대가없이 올림픽 개최를 축하한다면서 정체불명의 선물을 주면 분명히 의심스러워할 것이네. 그렇지만 같은 그리스인인데다 웅변술이 뛰어난 자네라면 잘 설득할 수 있을게야.”

“알겠습니다 총독님.”

“불꽃놀이가 끝나면 관람객들에게 내년 봄에 카르타고에서 불꽃축제와 히스파니아 불 경매가 열린다고 홍보하는 것도 잊지 말고.”

실레노스 다음은 마고 막내의 차례였다.

“마고야. 너는 이번에 실레노스를 따라 견문을 넓히고 오너라.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에 자리 잡은 많은 그리스 식민도시들과 동맹을 맺고 있다. 로마와 전쟁을 벌이면 결국 그들과도 검을 맞대게 되겠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적을 잘 알아야한다. 올림픽을 보러 전 세계의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몰려온 그리스인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배워오도록 해라.”

아버지의 말에 마고는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아버지!”

하스드루발은 일사분란하게 새로운 사업을 추진해나가는 가족들을 보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버지도 그렇고 형들도 그렇고 확실히 카르타고인들의 추진력과 도전정신은 장난이 아니야. 카르타고인들이 기원전에 이미 아프리카 희망봉까지 항해했다는 설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는데.’

하밀카르는 마지막으로 하스드루발에게 지시를 내렸다.

“작은 하스드루발은 불꽃축제와 경매 개최를 위한 기획을 해 보거라. 그리스 속담에 ‘행운의 여신은 뒷머리가 없다.’는 말이 있지. 행운의 여신이 바람 같은 속도로 달려갈 때 미리 준비를 마친 자들만 그녀의 머리채를 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면밀한 계획을 세워 보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제가 올림피아에 가야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아버지 말씀대로 하는 편이 좋겠네요.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神像)을 못 보게 된 건 안타깝지만요.”

하스드루발이 그 말을 하자마자 화기애애하던 방안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어 살얼음판이 되어버렸다.

하밀카르는 간신히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떨리는 목소리로 셋째 아들에게 말했다.

“뭐가... 보고 싶다고? ‘제우스’라는 단어가 들렸던 거 같은데. 방금 내가 잘못들은 거겠지?”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고 퍼뜩 놀라고 말았다.

‘아차! 아버지는 카르타고 신들에 대한 신앙심이 대단하시지. 헐... 아버지 표정 좀 봐. 아들 방 침대 밑에서 불상을 발견한 교회목사도 저런 표정은 안 짓겠어! 난 그저 세계 7대불가사의 중 하나가 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다른 형제들과 그리스인인 실레노스마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하자 하스드루발은 허둥지둥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아버지! 당연히 번개를 다스리는 신들의 왕은 오직 바알 함몬 뿐이시죠! 전 그저 예술품에 관심이 많을 뿐이에요! 제우스 신상은 그리스 역사상 제일의 거장인 페이디아스가 만들었는데 높이가 무려 26큐빗(약 12m)이 넘는대요! 최고급 목재를 깎아 만든 신상표면에 곱게 빻은 상아를 입히고 온갖 보석과 유리로 치장을 했는데 보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경건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걸작이라고 하더라고요!”

하밀카르는 하스드루발이 보기 드물게 횡성수설하면서도 유창하게 조각상의 모습을 묘사하자 더욱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로마 놈들 주신(主神) 조각상에 대해서 참 자세히도 알고 있구나. 마치 한번 보고 온 사람처럼 말이야.”

“어... 아니 그건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하면...”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보자마자 경건해진다며. 너도 그 조각상 앞에서 경건해지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나보지.”

하스드루발은 아버지의 기적의 논리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하밀카르는 그런 하스드루발의 마음도 모르고 한숨을 한번 푹 쉰 후 실레노스에게 말했다.

“실레노스. 작은 하스드루발에게 아직 자네 교육이 필요해 보이는구먼. 새로운 사업의 일정이 촉박하긴 하지만 자식농사보다 중요한 사업이 어디 있겠나? 자네는 스파르타에서 태어났고 시민권이 없긴 하지만 이제는 누가 봐도 훌륭한 카르타고인이지. 앞으로 사흘간 저 녀석에게 우리 카르타고의 신화와 역사를 가르쳐 이교의 신에게 관심을 끊도록 해주게나. 혹시 꾀를 부리면 사랑의 매를 아끼지 말고.”

“맡겨주십시오 총독님. 저는 카르타고의 신화와 역사도 잘 알지만 멍 안들 게 아픈 곳만 골라 때리는 기술도 전 지중해에서 따를 자가 없습니다.”

실레노스는 벌써 현란한 손목스냅을 뽐내며 회초리를 휘두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자신이 고대 그리스 미술사에 더욱 흥미를 갖게 만든 장본인인 실레노스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실레노스, 너 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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