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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25화 (25/201)

[ 25 ] [24화] 조기교육

히스파니아의 불을 홍보하기 위해 카르타헤나를 떠난 실레노스와 마고는 배를 타고 3주 정도를 여행한 끝에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올림피아에 도착했다.

“우와!”

마고는 실레노스와 함께 올림피아를 다스리는 도시국가 엘리스의 지도자들을 만나러 가던 도중 제우스 신전을 보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주춧돌 없이 굵은 기둥을 기단(基壇) 위에 바로 세운 도리아 양식의 기둥 수십 개가 거대한 석판과 지붕을 받치고 있는 신전은 간결하면서도 위엄 있는 모습으로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워낙 경제관념이 투철해 언제나 ‘가성비’에서 자유롭지 못한 카르타고인이 지은 신전이 공공시설에 가까운 느낌이라면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국고에서 마지막 은화 한 개까지 끌어다 최고의 예술가들을 고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걸작 예술품이었다.

마고는 눈빛을 반짝이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실레노스에게 말했다.

“실레노스! 우리 저기 잠시 들렀다 가면 안 될까?”

실레노스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올림피아 관광을 하고 싶었지만 하밀카르가 맡긴 중요한 임무를 뒷전으로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고 도련님. 저도 그러고 싶지만 올림픽 개막식까지 며칠 안 남았습니다. 엘리스는 한두 명의 지도자를 뽑는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와 달리 소규모 지역공동체 연합이 통치하고 있지요. 그들이 듣도 보도 못한 정체불명의 물건을 신성한 올림픽 개막식에 사용하게 하려면 남은 일주일 동안 여러 지도자들을 만나 열심히 설득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그런 걱정과는 달리 엘리스의 지도자들은 실레노스가 시험 삼아 연화 하나에 불을 붙여 불꽃을 보여주자 올림픽 개막식에 불꽃놀이를 하는 것을 흔쾌히 승낙했다.

중세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은 불꽃놀이를 자신의 부와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좋은 수단으로 여겨왔는데 고대 그리스의 귀족들도 후손들과 생각이 비슷한 덕분이었다.

몇몇 엘리스의 지도자들이 크게 기뻐하며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푼 바르카 가문에 감사를 표했다.

“돈만 밝히는 바르바로이(야만인)에게도 올림픽의 명성이 전해졌다니 놀랍구먼. 그 중에서도 자네가 모시는 페니키아인은 위대하신 제우스께 경의를 표할 정도로 문명화 되었나보군. 아마 그리스인인 자네의 교육 덕분이겠지. 자네 주인에게 돌아가 우리가 고마워하더라고 전해주게.”

그리스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마고는 감사인지 모욕인지 헷갈리는 엘리스 지도자의 말에 울컥했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접견이 끝나고 실레노스는 열두 살답지 않은 인내심을 보여준 어린 제자를 칭찬했다.

“잘 참으셨습니다 마고 도련님. 카르타고인은 대부분 그리스어를 할 줄 모르니 도련님도 알아듣지 못할 줄 알고 한 말이었겠지만 참 무례하네요.”

마고는 스승의 칭찬에 우쭐해하는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진짜 상인은 진상고객 앞에서도 웃을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

실레노스는 열두 살 답지 않게 의젓한 마고를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사흘 후 올림피아의 제우스 제단에서 고대 올림픽의 개막식인 제우스 기념제가 열렸다.

높이 6m가 넘는 타원형 석재 제단위에 마련된 장작이 헤라 신전에서 채화한 성화로 불타오르자 신관들이 우람한 소 수십 마리를 잡아 제우스에게 제물로 바치며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온 종교의식을 진행했다. 모든 의식을 마치자 신관 한명이 제단위에 서서 관객들에게 외쳤다.

“지금부터 위대하신 번개의 신 제우스의 이름으로 제 137회 올림픽의 개최를 선언한다!”

신관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히스파니아의 불 열 두개가 차례로 불을 뿜었다. 순식간에 구름 몇 점 밖에 없던 하늘이 형형색색의 불꽃으로 가득차자 그 자리에 있던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하기 시작했다.

“저게 대체 뭐지?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제우스께서 선수들에게 축복을 내리신다!”

개막식이 끝나고 하늘을 메웠던 불꽃이 신의 역사(役事)가 아니라 바르카 가문이 가져온 선물에서 발사된 것임이 알려지자 수많은 그리스의 귀족들이 실레노스와 마고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자네 바르카 가문의 가신이라며? 제발 저 히스파니아의 불인지 뭔지 하는 물건을 내게 팔아주게! 다가오는 우리나라 건국기념일에 꼭 쓰고 싶네!”

“아냐! 나한테 팔게! 드라크마(그리스의 무게 및 화폐단위)라면 원하는 대로 주겠네!”

실레노스는 서로 자신에게 히스파니아의 불을 팔라고 조르는 그리스 귀족들을 간신히 진정시킨 후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은 더 이상 가지고 있는 물건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가올 겨울이 지나가고 내년에 페르세포네께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 데메테르 여신의 품에 안길 즈음 북아프리카의 진주 카르타고에서 바르카 가문이 주최하는 큰 축제와 경매가 열립니다. 그 경매에서 다양한 다른 진귀한 물건들과 함께 히스파니아의 불을 찾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모든 물건은 바르카 가문이 품질을 보증하니 안심하고 사셔도 좋습니다. 뿐만 아니라 물건을 팔고 싶은 분도 약간의 수수료를 받고 바르카 가문이 대신 경매를 진행해 드립니다.”

자신의 설명을 들은 귀족들이 내년을 기약하며 각자의 고향을 향해 흩어지자 실레노스는 긴 문장을 숨 한 번 쉬지 않고 읊느라 지쳤는지 한숨을 쉬었다. 마고가 그런 스승을 바라보며 물었다.

“실레노스. 결국 내년 봄 즈음에 카르타고에서 히스파니아의 불을 판다는 얘기잖아? 간단히 말하면 될 걸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가 있어?”

실레노스는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귀여운 제자에게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그게 바로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의 문화적 차이입니다. 이제 임무를 마쳤으니 느긋하게 올림픽 경기를 관람하면서 그리스 문화를 배워보도록 하죠.”

* * *

한편 실레노스와 마고가 올림피아에서 홍보활동에 여념이 없을 떄 카르타헤나에서는 히스파니아의 불 생산 작업이 한창이었다.

바르카 가문이 광산개발에 투입하던 인력 중 일부를 화약 생산에 투입하기로 한 덕에 화약 생산 속도가 훨씬 빨라진데다 생산 작업지휘도 하밀카르가 맡기로 했기 때문에 하스드루발은 불꽃축제와 경매행사 기획에만 몰두 할 수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대략적인 행사계획을 세운 다음 계획실행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의 수요와 공급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고대의 축제라는 게 결국 음주가무가 빠질 수는 없지만 술자리는 경매 뒤로 미뤄야겠지. 고객들이 5성급 호텔 레스토랑의 만찬을 즐기다 불꽃놀이를 구경하고는 ‘어머 저건 꼭 사야 돼!’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경매를 시작한다는 느낌으로 가야겠어. 경매장을 지을 부지는 해외파 히밀코 의원에게 사기로 했고 나머지 인력과 물자도 대부분 별 탈 없이 수급할 수 있겠네. 문제는 경매진행자인데...”

하스드루발은 현대의 전문 미술품 경매사처럼 자신의 뜻대로 경매장의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며 최대한 많은 매물이 낙찰되도록 고객을 유도할 줄 아는 재치와 순발력을 갖춘 경매진행자를 원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익숙한 미술품 경매방식은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시작됐으니 기원전 3세기에 그런 인재를 구하려면 장사경험이 많은 인재를 선별해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야했다.

게다가 이번 경매를 진행할 사람에게는 또 다른 자질도 필요했다.

“일단 그리스어를 할 줄 알아야 돼. 고대 지중해세계의 상류층들은 대부분 그리스어를 배우니까 경매도 무조건 그리스어로 진행해야지. 하필 카르타고인은 그리스어를 배우는 것 자체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고 그리스인과의 교역은 공식통역사를 통해서만 해야 하니 사람 뽑기 진짜 힘들겠네. 이거 진짜 골치 아픈 문제다.”

프로 경매사가 진행하는 현대 한국의 미술품 경매도 매물 중 70~80%가 낙찰되면 성공으로 쳤고 낙찰률 100%의 경매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스드루발은 바르카 가문이 야심차게 준비한 행사가 사람 한명 잘못 뽑아 적자만 남기고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번 행사는 양날의 검이야. 실패하면 금전적 손해는 둘째 치고 바르카 가문의 위신도 추락하겠지. 행사시작까지 앞으로 다섯 달 정도 남았나? 이 사안은 책상머리에서는 해결 할 수 없을 것 같네. 예정보다 좀 일찍 카르타고에 건너가서 직접 적합한 인재를 찾아봐야겠다.”

고대 지중해세계의 무역중심지인 카르타고에는 돈벌이를 찾아 모여든 상인이나 용병같은 외국인이 많았다. 하스드루발은 그들 중에서 경매사를 뽑기로 마음먹었다.

한번 결정한 일은 바로 실행에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하스드루발은 곧바로 아버지를 찾아가서 사정을 설명했다.

“아버지. 예정보다 한 달 정도 이르지만 내일이라도 당장 카르타고로 출발하겠습니다.”

“대략적인 행사 기획은 이미 마쳤나보구나.”

“네. 세부적인 사항은 행사개최지인 카르타고에서 현장을 보면서 확인해야 하는 이유도 있고 무엇보다 제가 직접 유능한 경매진행자를 뽑고 싶어서요.”

“그래 알았다. 이제 다리의 부상도 거의 나았으니 그래도 괜찮겠구나. 다만 떠나기 전에 한 가지만 명심하렴. 본국에서는 우리 가문사람들은 정치인으로서도 한 사람 몫을 해내야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한다.”

“정치요? 정치는 본국에서 첫째 매형과 해외파 의원님들이 잘하고 계시잖아요? 게다가 전 아직 어려서 피선거권은커녕 투표권도 없어요 아버지.”

하밀카르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에게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당장 정치 일선에 나서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오랜만에 카르타고에 돌아가는 김에 정치인으로서의 감각을 연마할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이지. 하스드루발. 너는 정치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스드루발은 아버지의 뜬금없는 질문에 조금 당화하며 대답했다.

“네? 어... 카르타고는 공화국이니까 시민의 대표자가 시민들을 위해 일하는 거겠죠?”

“네 말도 맞다. 그렇지만 조금 더 기술적으로 접근하면 정치는 정책과 정무의 조화라고 할 수 있겠지.”

“정책과 정무의 조화요?”

“그래. 정책은 한 마디로 나라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시민들의 반발자국 앞을 보는 것이지.”

하스드루발은 곰곰이 생각을 하다 나름의 결론을 낸 후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정치인이 너무 앞서나가면 시민들이 진짜 필요로 하는 부분을 놓치게 되고 너무 뒤쳐져도 무능한 정치인이 된다는 말씀이죠?”

“그래 맞다. 반면 정무는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다른 정치인과 시민들을 설득하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공화국인 이상 정치인에게는 정무능력이 반드시 필요하지. 그럼 정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

“인덕이요?”

“이상적으로 생각하면 그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정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얕보이지 않는 것이란다.”

“얕보이지 않는 것...”

“그 점은 외교에서도 똑같이 작용한단다. 외교도 결국 각 나라의 권력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치판이기 때문이지. 너는 카르타고 명문 바르카 가문의 아들이다. 아직 어린 네가 히스파니아에서 보여준 활약은 이미 본국에도 알려져 있겠지. 본국에 돌아가면 예전과는 달리 많은 시민들과 해외파 동지들, 그리고 어쩌면 국내파의 정적(政敵)들과 외국에서 온 귀빈들도 네 언행을 주시할 지도 모른다.”

하밀카르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들 중에는 언젠가 너를 이용하려는 자들이 반드시 나타날 거란다. 이번 행사를 기회로 너를 이용하려는 자들을 오히려 이용하는 법을 배워라. 정치인뿐만 아니라 전장의 장군에게도 꼭 필요한 자질이니까 말이다.”

하스드루발은 아버지의 말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명심할게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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