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 [25화] 9년만의 귀향
“카르타고가 보인다! 모두 입항 준비!”
바닷바람에 춤추듯 펄럭이는 튜닉 자락을 추스르며 뱃머리에 서있던 선장이 승무원들에게 소리쳤다.
배 멀미를 견뎌내려고 선실 안 침대에 누워 쉬고 있던 하스드루발은 선장의 외침을 듣고 갑판위로 뛰어나와 난간을 붙잡고 육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통나무처럼 굵은 쇠줄을 쳐 카르타고 무역항의 입구를 지키는 거대한 수문이 들어왔다.
비록 경매와 축제준비를 위해 몇 달 머무는 것뿐이긴 하지만 하스드루발은 네 살 때 히스파니아로 이주한 이후 9년 만에 고향땅을 밟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몇 개월 전만해도 다시는 카르타고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하스드루발이 고향을 보고 감동에 빠져 있을 때 해군 사령부를 지키고 있던 카르타고의 해군장교이자 하밀카르의 첫째 사위인 보밀카르가 당직을 서고 있었다.
그는 카르타고의 상징인 바알 함몬의 손과 솔방울 조각으로 뱃머리를 장식한 육중한 5단노선이 수문 근처에 다다른 것을 확인하고 연락병을 불렀다.
“오늘쯤이면 셋째 처남이 탄 배가 도착할 때가 됐는데 저 배에 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입항신청을 기다리지 말고 수문을 개방해라.”
병사는 보밀카르의 명령을 받자마자 수문에서 대기 중인 탄탄한 근육질의 리비아 출신 노예들에게 쇠줄을 걷어 올리도록 지시했다.
수문이 열리고 배가 흰 대리석 기둥 두 개를 세워 표시한 정박구역 앞에 서자 선원들이 배에서 내리기 위해 선체 옆면에 사다리를 걸쳐놓았다. 고향 땅을 밟을 생각에 들떠있던 하스드루발이 승객 중 가장 먼저 사다리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오자 마중을 나온 보밀카르가 활짝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하스드루발 처남 맞지? 처남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이제 막 걸음마를 하고 있었는데 벌써 열세 살이 되어버렸네. 내가 자네 매형 보밀카르야.”
보밀카르는 30대 중반이었지만 카르타고에서 윤택한 생활을 한 덕분인지 원래 나이보다 10년은 더 젊어보였다.
하스드루발은 전장에서 다져진 근육을 자랑하는 아버지와 형들과는 달리 선이 가늘고 곱상한 매형을 보고 납득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군인보다는 정치인에 더 어울릴 인상이네. 하긴 해군장교는 커리어 쌓느라 잠깐 하는 부업이고 본업은 원로원 의원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역사대로라면 몇 년 안에 수페트(카르타고의 집정관격인 공직)에도 당선되겠지?’
하스드루발은 보밀카르가 내민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매형. 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멜리타 누나도 잘 있죠?”
“그럼 잘 지내지. 아내는 2주 전에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느라 외출을 삼가는 중이야. 타니트 여신께서 돌봐주신 덕에 둘 다 건강해.”
“정말요? 축하해요 매형!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이름은 뭐고요.”
“타니트 여신께서 우리 부부에게 이번에도 건강한 아들을 선물해주셨어. 이름은 처남하고 같아. 바알께서 카르타고와 우리 해외파를 도와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하스드루발이라고 지었지.”
하스드루발은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복받쳐 오르는 짜증을 간신히 억눌렀다.
‘아오... 또 하스드루발이냐? 이젠 아주 지긋지긋하다. 큰형도 하스드루발, 나중에 한니발 형하고 함께 알프스를 넘을 기병대장도 하스드루발. 카르타고는 다 괜찮은데 인신공양 풍습하고 작명법이 진짜 맘에 안 들어. 사람 이름이 무슨 대형마트의 카트도 아니고 왜 돌려 쓰냐고! 후우... 참자. 첫째 조카처럼 한노가 아닌 게 어디냐.’
그런 하스드루발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보밀카르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처남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처남.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먹는 게 어때? 아내가 오랜만에 남동생 얼굴이 보고 싶대.”
“좋지요. 멜리타 누나를 못 본지 정말 오래됐네요.”
“그럼 가병(家兵) 두 명을 호위로 붙여줄게. 나는 아직 근무 중이라 저녁식사 때쯤에야 퇴근할 수 있거든.”
“호위요? 아직 낮인데요?”
처남의 말에 보밀카르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9년 전하고는 사정이 달라. 요즘 시내 분위기가 꽤나 흉흉해.”
하스드루발은 호위병과 함께 항구를 벗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 매형의 걱정이 유난스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점포 셋 중 하나는 문을 닫았네? 게다가 걸인은 또 왜 이리 많아!’
그가 고향을 떠날 때만해도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과 상품을 나르는 인부들로 늘 북적이던 카르타고의 구도심(舊都心)은 오가는 사람이 줄어 예전 같은 생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때 낡은 6층 건물에 등을 기대고 쭈그려 앉아있던 바싹 마른 늙은 노인이 하스드루발을 향해 두 손을 내밀며 구걸했다.
“도련님. 이 불쌍한 늙은이에게 한 푼만 주십시오! 벌써 사흘 째 빵 한 조각 먹지 못했습니다!”
동정심에 가슴이 먹먹해진 하스드루발이 노인에게 다가가며 품속에서 1세겔짜리 은화 한 개를 꺼내려는데 두 호위 중 고참병이 그를 말렸다.
“그만두시는 편이 좋습니다. 도련님.”
“왜 말리지?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굶주린 노인을 그냥 두고 보란 말이냐?”
“한 번 적선을 하시면 주변의 거지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어 도련님 주변을 에워쌀 겁니다. 저희 두 사람만으로는 그 혼잡한 틈을 노려 작정하고 도련님의 주머니를 털려고 달려드는 소매치기들을 다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하스드루발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과연 곳곳에서 몇몇 빈민들이 먹잇감이 다가오길 기다리며 풀숲에 엎드린 삵처럼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호위병들은 허리춤의 검에 오른손을 댄 채 주변의 빈민들을 위협하며 하스드루발을 데리고 구도심을 벗어났다.
하스드루발은 주변에 자신에게 곁눈질을 보내는 건달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고참병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고맙네. 자네가 말려주지 않았으면 곤란한 일을 겪을 뻔했어. 그나저나 지난 9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엘리사 여왕께서 세우신 도시에 저렇게 걸인이 넘쳐나다니.”
바르카 가문의 도련님의 말에 고참병이 대답했다.
“경기가 너무 안 좋아져서 그렇습니다. 도련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카르타고의 평민들은 거의 소상공인이나 선원 아니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인부이지 않습니까? 수출이 계속 줄어드니까 시내의 가게들은 줄줄이 망해나가고 일거리도 줄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감이 없는 날은 부업으로 구걸이나 소매치기를 하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스드루발은 고참병의 말과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시칠리아에 사르데냐와 코르시카까지 로마에 뺏기면서 기존의 국가 무역정책이 완전히 박살났으니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이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네. 역시 책상머리에서 자료를 읽는 것하고 현장을 직접 보는 건 많이 다르구나.’
하스드루발은 큰누나의 집으로 가는 동안 죽음을 앞둔 노인의 몸에 검버섯이 번져나가듯 도시 곳곳이 빈민가로 변해가는 카르타고의 현실을 보고 점점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는 비르사 언덕을 감싼 성벽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자신이 기억하는 고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르사 언덕 위는 여전히 화려하네. 사람 사는 건물이 하나같이 신전 같아.”
“그러게 말이에요.”
하스드루발의 혼잣말에 그를 호위하던 하급병이 자신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맞장구를 치자 고참병이 그런 후임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스드루발은 후임병이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과 고참병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피식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자네 기분 이해하네. 나도 귀족이 아니었으면 분명 신들께서 카르타고에 내린 시련을 귀족들만 비켜간다고 여러 번 푸념 했을 거야. 치사하게 매형에게 ‘매형이 붙여주신 가병이 참 건방지던 데요?’하면서 고자질하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게.”
“감사합니다 도련님. 바르카 가문 분들은 모두 관대하시다는 말씀이 사실이었네요. 멜카르트 신(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께서 바르카 가문을 지켜주시길!”
두 호위병은 카르타고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귀족 가문의 어린 도련님이 말실수를 빌미로 갑질을 하는 대신 농담까지 해가며 자신들의 긴장을 풀어주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그 후 그들은 더욱 성심성의껏 하스드루발을 호위하여 보밀카르의 집으로 안내했다.
보밀카르의 집 앞에 도착한 후 하스드루발이 대문에 노크를 하자 그의 큰누나 멜리타가 직접 문을 열고 동생을 맞이했다.
“하스드루발! 이게 얼마만이야! 그 조그만 꼬맹이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오랜만이에요 누나! 그런데 누나 벌써 그렇게 움직여도 괜찮아요? 매형이 2주전에 조카가 태어났다고 하셨는데?”
“그럼. 바르카 가문은 멜카르트 신의 혈통인 엘리사 여왕의 후손이잖아? 남자도 여자도 몸이 튼튼한 게 당연하지.”
사실 두 남매가 한 지붕 아래에서 산 기간은 고작 3년 정도였지만 멜리타는 시집을 가기 전에 자기보다 열두 살 어린 동생 하스드루발을 병약한 어머니대신 자주 돌봤기 때문에 두 사람은 여전히 우애가 깊었다.
9년 만에 만난 두 남매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덧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어 승마수업을 마친 한노가 집으로 돌아왔다. 멜리타는 장남 한노를 하스드루발에게 소개했다.
“한노야. 인사드리렴. 네 셋째 외숙부 하스드루발이야.”
“어? 정말 하스드루발 외숙부님이세요? 우와아아아아!”
하스드루발은 오늘 처음만난 아홉 살 짜리 조카가 갑자기 좋아하는 아이돌을 길에서 우연히 만난 초등학생처럼 열광하기 시작하자 깜짝 놀라 조금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어... 나도 반가워. 누나 한노가 붙임성이 아주 좋네요.”
멜리타는 당혹스러워하는 동생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놀랐지? 네가 몇 달 전에 루시타니아에서 보여준 활약이 카르타고에 알려지면서 애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거든. 한노도 요즘 자기보다 겨우 네 살 많은 외숙부가 전공(戰功)을 세운 얘기에 푹 빠져있어.”
하스드루발은 누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조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그 때 상황이 워낙 긴박해서 나도 전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뿐이에요. 사실 전선에서 적과 검을 맞대고 싸운 건 아버지와 형들이라 너무 추켜세우면 좀 쑥스러운데.”
“매국노의 흉계를 미리 알아채고 전장에 달려가 미리 위험을 알린 것도 대단한 공이지. 애들 말고 부모들 사이에서도 난리야. 나한테 동생이 대체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총명할 수가 있냐면서 묻는 주부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니? 네 덕분에 요즘 카르타고에서 태어나는 남자애들 중 절반은 이름이 하스드루발일걸?”
누나의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이런 나비효과 싫다. 이러다 진짜 2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10만 하스드루발 양병설 같은 거 나오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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