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 [26화] 경매사 모집
하스드루발은 몇 시간 전에 배에서 내린 탓에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지만 한참동안 조카 한노에게 아버지와 형들, 그리고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카가 귀여워서 이기도 했지만 한노가 2차 포에니전쟁에서 활약할 수 있는 장교로 자라나길 원했기 때문이다.
‘역사대로라면 한노는 10년 뒤에 한니발 형과 함께 알프스를 넘지만 별로 활약을 하지는 못하지. 자극을 주면 열심히 훈련해서 조금이라도 더 유능한 장수로 성장하지 않을까?’
그런 하스드루발의 속내를 알리가 없는 멜리타는 그저 비슷한 또래인 두 사람이 금세 친해진 것으로만 여기고 기뻐했다.
“둘이 네 살 밖에 차이가 안 나서 그런지 꼭 형제 같아 보이네. 하스드루발, 옛날 집도 그립겠지만 카르타고에 있는 동안 우리 집에 있지 않을래?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우리가 이렇게 만나겠니?”
“저야 좋지요. 그럼 몇 달간 잘 부탁해요 큰누나!”
그렇지 않아도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에 머무는 동안 큰누나 멜리타의 집에서 묵고 싶었던 참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누나가 반가운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경매와 축제 준비를 하려면 거물 해외파 정치인인 큰매형 보밀카르와 상의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세 사람이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덧 해가 지고 근무를 마친 보밀카르가 집으로 돌아 왔다.
멜리타는 남편이 오자마자 저택의 하인들에게 저녁식사를 준비시킨 후 가족들을 불렀다.
하스드루발은 오랜만에 고향의 음식을 맛볼 생각에 들떠 식당으로 달려갔지만 그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하인들이 그에게 가져온 음식은 병아리콩을 넣고 끓인 스프와 빵 한 덩이, 그리고 작은 치즈 한조각과 석류 한 개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카르타고의 명문 귀족가문보다 갤리선의 노를 젓는 선원을 가장으로 둔 평민가족의 식탁에 더 어울리는 소박한 메뉴였다.
보밀카르가 시무룩한 표정을 애써 숨기는 처남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왔는데 이런 것 밖에 대접하지 못해서 미안해 처남. 2주 전에 해외파 100인회 의원들이 바알 함몬 신전에 모여서 앞으로 한 달간 소박한 식사를 하기로 맹세 했거든. 카르타고 시민들이 경제위기를 잘 넘길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말이야.”
하스드루발은 매형과 해외파 정치인들이 카르타고 시민을 아끼는 마음에 감동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시민들을 아끼는 정치인이 생각보다는 많은 모양이네.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효과적인 빈민 구제대책을 내놓기 어렵겠지,’
카르타고 정부는 수백년 전부터 가난한 시민들을 해군으로 채용하여 평민들에게 안정적이고 보수가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왔다.
그러나 1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카르타고 군함이 지중해 밑으로 가라앉거나 로마군에게 나포되는 바람에 300척이 넘는 전함을 보유했던 카르타고 해군은 물에 넣은 소금 포대자루처럼 순식간에 규모가 줄어 지금은 겨우 전함 50척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카르타고 시민들과 해외파 정치인들은 지중해 최강 해양대국의 위상을 되찾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기위해 다시 해군을 강화하고 싶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해군력이 다시 강해져서 로마와의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우려한 국내파 정치인들은 예산부족을 핑계로 신규전함 건조를 극구 반대했다.
그 바람에 전쟁이 끝난 지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카르타고 해군은 지중해 최강함대의 위용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자신에게 진수성찬을 대접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매형에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매형의 기도가 꼭 바알 함몬께 전해졌으면 좋겠네요. 낮에 구도심을 지나는데 확실히 요즘 평민들 살림살이가 아주 어려워 보이더라고요.”
“그러게. 일거리가 없는 가난한 시민들은 요즘 선거철만 바라보고 있어. 선거후보자들이 표를 사기위해 나눠주는 빵을 기대하면서 말이야. 처남이 기획한 행사가 잘 치러져서 시민들 살림살이에 좀 보탬이 됐으면 좋으련만.”
“매형과 해외파 의원님들께서 도와주시기로 했으니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아, 매형. 혹시 제가 한달 전에 서신을 보내서 부탁드렸던 것은 잘 준비되고 있나요?”
“전반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어. 해외파 의원들이 신전을 짓기 위해 가지고 있었던 건축자재를 쓰기로 한 덕분에 경매장은 앞으로 넉 달이면 완공할 수 있을 거 같아. 축제 준비도 문제없고. 경매사 후보자들도 내일 우리 집에 모일 예정이고 말이야.”
하스드루발은 매형 보밀카르를 신뢰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역시 자기 눈으로 직접 행사준비현황을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매형. 괜찮으시다면 내일 경매장 건설현장을 직접 확인할까 하는데 시내에 나갈 때 호위병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야 행사기획안을 상황에 맞춰 수정해 나갈 수 있을 거 같아요.”
그 말을 듣고 남편과 남동생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멜리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동생 어쩜 저렇게 꼼꼼하게 일을 잘할까? 아직 열세 살 밖에 안됐는데 말이야. 비결이 뭐니? 네 조카들에게도 좀 알려줘.”
“어... 글쎄? 아버지와 실레노스의 교육 덕분이지 뭐.”
하스드루발은 누나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심심하면 사단장이 점심 먹으러 왔다가 1박 2일 쉬다가는 한국군 부대에서 중대장 노릇하다 연병장에 완두콩만한 자갈 한 개 굴러다니는 것만 봐도 기겁하게 돼서 그렇지 뭐. 13년이 지나도 그 때 생각하면 뒷목이 당기네.’
* * *
하스드루발은 큰누나네 가족들과 저녁을 먹은 후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경매장 건설현장에 다녀온 후 다시 큰누나의 집으로 돌아와 축제에 쓸 식자재 구매계약에는 문제가 없는지 따위를 확인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큰매형 말대로 대체로 준비가 잘 되고 있긴 한데... 예상대로 경매사 뽑는 게 제일 골치 아프네.”
하스드루발은 다른 업무를 모두 마친 후 큰매형 보밀카르가 모은 장사를 해본 카르타고 정부가 인정한 그리스인 공식 통역사들 중 경매진행 경험이 있는 자들과 대화를 해봤지만 자신이 원하는 인재를 찾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익숙한 방식 대신 새로운 경매진행 방식을 배워가면서까지 바르카 가문이 주최하는 경매행사를 도울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스드루발은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숙제 때문에 답답해진 기분을 풀기위해서 외출복을 입고 호위병들과 함께 시민광장에 놀러나가기로 했다.
소상공인들의 가게가 모여 있는 시민광장도 9년 전에 비하면 오가는 사람들이 많이 줄긴 했지만 임금노동자가 많이 사는 구시가지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이제야 좀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드네.”
하스드루발은 9년 전 바르카 가문이 히스파니아 이주를 준비할 때 즈음 형 한니발이 시민광장에서 연설을 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다.
그때 누군가 하스드루발을 불렀다.
“혹시 바르카 가문의 하스드루발 도련님 아니십니까?”
하스드루발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자 그의 눈에 3층 건물의 옥상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흰 수염이 난 노인이 보였다.
노인은 하스드루발이 자신을 바라보자 활짝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와 그의 앞에 섰다.
“시내에 바르카 가문의 하스드루발 도련님께서 카르타고에 돌아오셨다는 소문이 돌아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 맞으시군요! 아마 도련님께서는 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9년 전 바르카 가문이 히스파니아 원정을 떠나시기 며칠 전에 여기서 한 번 뵀을 뿐이니까요. 그날 한니발 도련님의 명연설이 아직도 이 늙은이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아! 이제 성인이 되셨을 테니 한니발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하스드루발은 노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9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혹시 자네 대장장이 이토바알이 아닌가?”
“명문 귀족가문의 자제분이 보잘것없는 늙은이를 기억해주셨군요!”
이토바알은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글썽이려하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이토바알을 보고 미소를 띠었다.
“자네가 한니발 형의 연설을 듣고 펑펑 우는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나? 난 그날 시민광장이 자네 눈물로 잠겨버리는 줄 알았다네. 그런데 자네는 뭘 하느라 건물 옥상에서 내려오는 겐가? 아직 한참 장사할 시간일 텐데.”
“옥상에 있는 낡은 투석기를 손보고 내려오는 길입니다. 며칠 전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람에 좀 망가졌거든요.”
하스드루발은 이토바알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투석기? 대장간 건물 옥상에 왜 그런 걸 가져다 놨지?”
하스드루발의 질문에 이토바알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 80년 전에 반역자 보밀카르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급히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셔서 작은 투석기를 설치하신 다음 반란군들에게 돌을 날리셨습니다. 그렇게 할아버지께서 놈들의 진로를 막는 동안 증조할아버지는 손에 망치를 들고 역도들과 싸우시다 그만 창에 찔려 돌아가셨지요. 저희 집안은 반란이 끝난 뒤에도 투석기를 치워버리지 않고 조상님들의 희생을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보밀카르(하스드루발의 큰매형과 동명이인)의 난은 기원전 308년에 카르타고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밀카르가 나라가 위기에 처한 틈을 타 권력을 잡기위해 일으켰던 쿠데타이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480년 국왕 하밀카르 1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권력이 원로원과 100인회로 넘어가면서 사실상 공화정 국가가 되었고 왕가는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상징적인 왕가와 공화정 지지자들이 공존하며 180년 동안 번영하던 카르타고는 기원전 310년에 큰 위기를 맞게 되는데 지중해 한가운데의 떠있는 큰 섬 시칠리아의 동쪽을 지배하는 시라쿠사의 참주 아가토클레스가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카르타고를 공격해온 것이다.
당시 국왕이자 장군이었던 보밀카르는 동료 장군 한노와 함께 3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카르타고로 몰려오는 시라쿠사 군을 막기 위해 출진했다.
그 후 카르타고군과 시라쿠사 군이 전투를 시작하자마 보밀카르는 자신이 지휘하던 군대를 버리고 최측근 500명과 용병 천 명만을 이끌고 카르타고로 되돌아와 버린다.
외적이 침입해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공화정 지지자들을 죽이고 카르타고를 다시 왕정국가로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지휘관을 잃고 혼란에 빠진 카르타고군이 시라쿠사 군에게 학살당하는 동안 보밀카르는 앞길을 막는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하며 귀족들이 많이 사는 비르사 언덕을 점거하기 위해 전진했다.
현대 한국으로 치면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서울을 포위하려 할 때 조선왕조의 종친인 수도방위사령관이 왕정복고를 외치며 조폭들과 함께 청와대를 공격한 것과 마찬가지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게 나라 안팎의 적들에게 멸망할 위기에 처한 카르타고를 구한 것은 신도 귀족도 아닌 카르타고의 평민들이었다.
보밀카르가 시민광장을 지날 때 카르타고의 평민들은 망치와 부엌칼을 들고 검과 창으로 무장한 반란군과 맞섰고 자기 집 옥상에 작은 투석기를 설치해 좁은 골목을 지나는 반역자들에게 돌을 날려댔다.
그렇게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반란군을 막아낸 평민들 덕분에 카르타고 정부는 보밀카르의 쿠데타를 막아내고 시라쿠사 군을 북아프리카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이토바알의 말을 듣고 9년 전 시민광장에 나왔을 때처럼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IMF가 터지고 부자들이 침대 밑에 달러를 숨길 때 나라를 살려야한다며 아들의 돌반지를 들고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하러 가시던 전생의 부모님.
임진왜란이 터진 후 자신의 목숨이 아까웠던 선조려 할때 백성들을 버리고 압록강을 건널 때 의병을 일으켜 조선을 지켜낸 전생의 조상들.
하스드루발은 시큰거리는 눈물샘을 간신히 진정시킨 후 이토바알에게 말했다.
“자네 조상님들께서 큰일을 해주신 덕에 우리가 아직 노예가 아닌 시민일 수 있는 거겠지. 이번 행사를 잘 치러내야 끼니 걱정하는 시민들이 한숨 돌릴 수 있을 텐데.”
“바르카 가문이 다음 봄에 개최하는 축제하고 경매말씀 하시는 것입니까?”
“자네도 벌써 아는 모양이군.”
“요즘 평민들은 그거하고 선거철만 바라보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요.”
“그리스어를 할 줄 아는 실력 있는 경매사를 구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네. 그저 경매 진행만 빨리 하는 게 아니라 경매장 분위기를 좀 띄울 줄 아는 재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리스인 통역사들은 너무 의욕이 없어서 못쓰겠어.”
하스드루발의 말을 들은 이토바알은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곧 밝은 표정으로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제 지인 중 아훈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도련님께서 찾으시는 인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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