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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28화 (28/201)

[ 28 ] [27화] 카르타고에 온 한니발

“제 지인 중 아훈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도련님께서 찾으시는 인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스드루발은 이토바알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이름이 아훈이면 카르타고 시민일 텐데 그리스어를 배웠다고?”

“아훈은 리비-페니키아인입니다. 아시다시피 리비-페니키아인은 카르타고 시민권이 없어서 그리스어를 배울 수 있지요. 원래는 장사와 그리스어 통역을 병행했었던 친구인데 불황이 계속되면서 요즘은 공식 통역사 일만 하고 있습니다.”

카르타고의 지배구조는 고대 중동지역에서 북아프리카로 이주해온 소수의 페니키아인인 지배계층과 다수의 피정복 부족민 피지배계층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주로 카르타고 귀족과 리비아인 첩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인 리비-페니키아인들은 카르타고 사회에서 피정복 부족민인 속주민들 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았지만 카르타고 시민들과는 달리 전쟁이 일어나면 육군으로 징집되었고 참정권이 없었다.

하스드루발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훈을 만나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아훈에게 내 큰매형이신 보밀카르 의원님 댁으로 찾아오라고 전해주게. 비르사 언덕 위에 있는 아쉬타르 신전 근처에서 제일 큰 저택이니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걸세.”

* * *

하스드루발은 시내 나들이를 마치고 큰누나의 집에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훈을 만날 수 있었다.

아훈은 키는 크지 않았지만 통역사나 상인보다는 군인이 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건장한 체격을 가진 30대 중년 남자였다.

“하스드루발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대장장이 이토바알에게 도련님께서 저를 찾으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뵙습니다.”

“그리스어를 할 줄 아는 경매사가 필요한 참에 이토바알이 자네를 추천했다네.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할 테니 한번 해보겠나?”

아훈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 감사하지요! 안 그래도 요즘 경기가 너무 안 좋아 통역일도 많이 줄어서 죽을 맛이었습니다! 제가 장사하던 시절에 인건비를 아끼느라 직접 경매를 진행해 본 적이 많아서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매는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해야 해서 새로 배워야 할 게 많을 텐데 잘 할 수 있겠나?”

하스드루발의 말에 아훈은 더 의욕적으로 자기 PR을 하기 시작했다.

“대충 짐작은 갑니다. 몇 달 전부터 항구 근처에 있는 보밀카르 의원님의 창고에 귀중품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더군요. 그 많은 물건을 다 사셨을 것 같지는 않고, 부자들의 물건을 대신 팔아주고 수수료를 받으시려는 거 아닙니까??”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계획을 한눈에 꿰뚫어 본 아훈의 통찰력에 내심 놀라고 말았다.

‘이 친구 보통은 넘는구만. 시민권만 없지 100% 카르타고 상인이네.’

카르타고 상인들은 뛰어난 경제관념을 바탕으로 민간차원에서 상업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런 상인들의 노력 덕분에 카르타고에는 기원전 3세기에 이미 무역선의 해상사고에 대한 보험제도가 널리 시행될 정도로 앞선 경제시스템을 구축되어 있었다.

카르타고 상인들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하스드루발은 눈치 빠른 아훈에게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럼 자네를 믿어보겠네. 앞으로 몇 달 동안 잘 부탁하네.”

* * *

하스드루발이 의욕적인 경매사를 뽑은 후 행사준비가 원활하게 진행되면서 어느덧 4개월이 흘러 기원전 227년의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바르카 가문이 주최하는 행사가 시작되려면 아직 닷새나 남았지만 카르타고에는 이미 불꽃축제를 구경하거나 경매에 참여하려는 외국인들로 북적였다.

고대의 항해는 태풍이나 해적 등의 변수가 많았기 때문에 일정을 넉넉하게 잡고 출발한 외국의 배들이 속속 카르타고로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당시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카르타고의 무역항은 일찌감치 해외에서 몰려온 상선과 여객선으로 가득 차버리고 말았다.

무역항에 입항하지 못한 외국인들은 우티카 등 주변의 다른 페니키아계 도시국가에 배를 정박한 후 육로로 카르타고로 갈 수밖에 없었다.

시내에서 행사준비상태를 점검하고 있던 하스드루발은 불과 며칠전만해도 사람이 없어 썰렁했던 시민광장이 쇼핑을 하는 외국인 관광객과 갑자기 정신없이 바빠진 상인들로 북적이는 것을 보고 오랜만에 나이에 어울리는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무역항이 꽉 찰 정도로 외국 배가 몰려올 줄이야! 기원전 3세기에 주차대란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어! 아, 차가 아니라 배니까 정박대란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일단 홍보는 성공이다!'

시내에서의 용무를 마친 하스드루발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큰누나의 집으로 돌아와 임시로 마련한 집무실 책상위에 놓여있는 파피루스를 집어 들었다.

하스브루발은 축제는 모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기획했지만 경매는 카르타고와 외국의 왕족과 귀족만 참여할 수 있도록 회원제로 운영하기로 했는데 그가 손에 든 파피루스가 바로 경매장 회원의 명단이었다.

“신분 차별하는 건 좀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행사의 격이 높아져야 물건도 비싸게 팔릴 테니까 말이야. 한국에서도 회원제 호텔 헬스클럽은 쓸데없이 비싸잖아. 동네 헬스장보다 시설이 아주 좋은 것도 아닌데.”

하스드루발은 회원 명단을 펼치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마케도니아의 왕자 필리포스가 온다고? 게다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왕자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필로파토르 왕자까지? 역사대로라면 다 몇 년 후에 왕이 될 사람들이잖아? 이거 무슨 디아도코이 동호회도 아니고. 자칫하면 경매장 분위기 대박 살벌해지겠네.”

디아도코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복군주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스스로 자신의 왕조를 세운 대왕의 부하 장군들과 그 후손을 지칭하는 말이다.

태생부터가 이렇다보니 디아도코이 왕국들은 경쟁의식을 불태우며 오랜 세월 동안 전쟁도 불사하며 서로 대립해왔다.

특히 시리아와 페르시아 지역의 상당부분을 차지한 셀레우코스 제국과 이집트와 에게 해의 일부지역을 차지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두 나라 간에 당장 전면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앙숙이었다.

“대충 각 나온다. 불꽃놀이 홍보효과로 그리스 도시국가의 귀족들이 카르타고에 오니까 디아도코이들이 부와 권위를 과시하려고 경매에 끼기로 했나보네. 디아도코이들은 하나같이 그리스에 영향력을 넓히고 싶어하니까 말이야. 게다가 왕자들은 아직 어리니까 불꽃놀이를 직접 보고싶게도 했겠지. 이 기회에 디아도코이 왕국들과 우호를 다질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로마와 친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제쳐두더라도 바르카 가문이 지중해의 강대국인 마케도니아나 셀레우코스 제국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 향후 로마와 전면전을 벌일 때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 때 하스드루발 등 뒤에 있는 집무실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전히 뭔가를 고민하고 있구나 하스드루발.”

하스드루발이 뒤 돌아보자 형 한니발이 문가에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한니발 형! 언제 카르타고에 온 거야?”

놀란 하스드루발의 질문에 한니발이 대답했다.

“조금 전에 도착했어. 카르타고의 무역항에 자리가 없어서 내가 타고 온 배가 우티카에 정박하는 바람에 말을 타고 오느라 며칠 더 걸려버렸지. 그동안 잘 지냈어?”

“눈코뜰 새없이 바쁘게 지냈지! 그런데 카르타고에는 무슨 일로 온 거야? 형은 이제 기병대장이니까 축제를 구경하러 올만큼 한가하지는 않을 텐데.”

“카르타고에 가고 싶다고 아버지께 부탁드렸어. 몇 주 전에 히스파니아에 온 무역상들에게 디아도코이 왕국의 왕족들이 경매에 참여할 계획이라는 말을 들었거든. 디아도코이 왕국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두면 로마와 전쟁을 벌일 때 도움이 될 거야.”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말을 듣고 자리에 앉은 채로 양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감탄했다.

“역시 한니발 형이야!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행사당일에 귀빈들을 따로 만날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서 고민 중이었어. 그정도 대국의 왕족들과 안면을 트려면 카르타고 쪽에선 최소한 명문 귀족 정도는 나서야하니 가신들에게 맡길 수도 없고 말이야.”

한니발은 동생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나이에 외교까지 염두에 두고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니 역시 대단하구나.”

“뭘. 사실 디아도코이 들이 카르타고에 온다는 것도 방금 알았는걸. 그럼 우리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자 안티오코스하고 친해지는 걸 최우선으로 하자.”

“그 말은 예상 밖인걸? 난 셀레우코스 제국보다는 마케도니아가 우리와 동맹을 맺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는데?”

한니발의 판단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그 당시 로마와 마케도니아는 발칸 반도 서부에 위치한 일리리아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고 공동의 적을 가진 나라들이 동맹을 맺는 경우는 흔했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보다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우호관계를 우선적으로 다지자는 생각은 미래의 역사지식을 가진 하스드루발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역사대로라면 한니발 형이 로마군에게 승승장구 하다보면 마케도니아는 어차피 100% 먼저 동맹을 요청해올 거야. 로마와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셀레우코스 제국을 포에니 전쟁에 참전시키는 쪽이 더 큰 도움이 되겠지.’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에게 자신이 미래의 역사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납득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다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래서야. 마케도니아는 원래 로마랑 사이가 나쁘니까 나중에도 동맹을 맺을 기회가 얼마든지 있어. 하지만 셀레우코스 제국하고 친해질 일이 별로 없잖아? 지금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게다가 형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자 안티오코스하고 말이 잘 통할 거거든.”

“무슨 근거로?”

“디아도코이들은 대부분 그렇지만 안티오코스 왕자는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굉장히 존경한대. 대왕의 얘기만 나오면 밤새도록 말을 멈추질 않는다더라. 꼭 형처럼 말이야. 형이 마고에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략전술을 분석해온 걸 들려주듯이 대화를 시작하면 엄청 좋아할걸?”

안티오코스는 왕자는 훗날 셀레우코스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인 안티오코스 3세가 되어 자신이 존경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모방해 스스로에게 ‘대왕'이라는 호칭을 붙인 인물이다.

본래의 역사에서 안티오코스 3세는 한니발이 2차 포에니전쟁에 패하고 국내파와 로마의 위협을 피해 조국 카르타고를 떠나 망명길에 오른 후 가장 먼저 그를 받아준 인물로 셀레우코스 제국도 결국 로마에게 패배할 때까지 한니발과 10년을 함께하게 한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과 안티오고스의 역사적인 만남을 30년 쯤 앞당겨 강대국 셀레우코스 제국과 동맹을 맺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고 싶었다.

한니발은 자신에게 안티오코스 왕자를 만나라고 권하는 동생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대단하네. 언제 셀레우코스 제국 왕자의 취향까지 조사 한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믿을 수밖에 없지. 네 통찰력이 없었으면 애초에 아버지와 나는 작년에 구아디아나 강변에서 전사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하스드루발은 그런 형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한니발 형하고 내가 이렇게 다시 카르타고에서 만나 웃으면서 얘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이미 역사는 카르타고를 위해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제 절대로 이 흐름이 틀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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