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 [28화] 고대 상위 1%들의 신경전
하스드루발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축제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바르카 가문이 카르타고의 비벌리힐스 쯤 되는 비르사 언덕위에 지은 경매장과 연회장을 겸한 거대한 5층 건물이 드디어 문을 연 것이다.
새로 지은 건물은 최고급 시칠리아산 대리석을 아끼지 않고 써서 만든 외벽에 그리스에서 데려온 일류 화가들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둔 덕분에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하인들을 시켜 미리 경매장 회원권을 얻은 그리스인 고객들이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탄성을 자아냈다.
“제우스께서 거처로 삼으셔도 될 훌륭한 건물이군!”
하스드루발은 자랑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국내파 관계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자리에서 그리스어를 할 줄 아는 티를 낼 수 없었기 때문에 간신히 참아냈다.
‘당연히 신전 같겠지! 진짜로 신전을 지을 때 쓰려고 쟁여뒀던 최고급 재료들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으니까.’
건물 안에 고객들이 들어서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단정한 옷을 입은 바르카 가문의 하인들이 그들을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건물 1층은 경매장 이었고 나머지 층에는 연회장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누워서 식사를 하는 그리스 귀족들과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페니키아인이 서로 다른 층을 쓸 수 있게 한 구조였다.
고객들이 연회장에 들어서자 연회장 각층 한가운데서 대기 하고 있던 아름다운 소년 소녀 수십 명이 리라를 켜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하인들은 온갖 진귀한 음식을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지중해 각지에서 모여든 왕족과 귀족들이 비르사 언덕위에서 공작새 구이나 백조의 육즙으로 만든 젤리 같은 최고급 요리를 즐기는 동안 시민광장에서도 축제가 벌어졌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많은 인파로 북적이던 시민광장은 신분이 높은 주인을 카르타고로 데려온 수행원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시민광장의 상인들도 술과 음식, 유리 장신구 따위의 상품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되자 기쁜 탄식을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재고를 더 많이 쟁여둘걸! 물건이 없어서 못 파는 게 대체 몇 년 만이냐!”
연회장의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자 하스드루발은 그리스어 통역을 맡을 아훈과 함께 직접 각층을 돌아다니며 공지사항을 알렸다.
“전 지중해에서 카르타고를 찾아주신 왕족과 귀족여러분! 잠시 후 여러분께서 기대하시던 불꽃놀이가 시작됩니다! 전망이 좋은 건물 5층 테라스에서 감상하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하인의 말에 거의 모든 고객들이 5층 테라스로 몰려왔다.
고객들이 5층에 모인 걸 확인한 하스드루발은 미리 카르타헤나에서 불러온 기술자들에게 신호를 보내 히스파니아의 불을 발사하도록 했다.
- 피유우우웅! 파앙!
카르타고 시내의 수십만 명의 시민과 관광객들이 넋을 놓고 갖가지 색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특히 연회장에 모인 고객들은 자주색 불꽃이 터질 때마다 탄성을 질러댔다.
“생전에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너무나 아름답구나!”
“카르타고인들이 헤파이스토스 신의 불꽃을 훔쳐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도저히 인간의 솜씨로 만든 물건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군!”
하스드루발은 고객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다! 마지막 제품 홍보도 성공적이야! 구매욕구 최고일 때 빨리 본게임을 시작하자!’
경매는 바르카 가문이 경매에 나온 물건의 종류와 추정가를 적은 파피루스로 만든 도록(都錄)을 고객들이 미리 나눠준 후에 시작되었다.
지중해 세계의 상위 1%들이 모인 자리이니만큼 신분에 따라 미리 지정석을 배치했는데 디아도코이 왕국의 왕자들은 당연히 맨 앞줄에 앉게 되었다.
하스드루발은 이번 경매에 그리스의 화폐단위인 드라크마를 쓰기로 했고 현대의 미술품 경매처럼 더 높은 가격으로 물건을 입찰하고 싶은 고객이 자신의 코를 만져서 경매진행자에게 상위입찰 의사를 알리는 방식을 도입했다.
때문에 경매진행자는 그리스의 화폐단위에 익숙하고 눈썰미와 순발력이 뛰어나야 했다.
하스드루발은 과연 아훈이 그 역할을 잘 해낼수 있을지 잠시 걱정했지만 다양한 나라의 고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본 그는 고용주의 예상보다 훨씬 더 자신의 역할을 잘 해냈다.
“이번 매물은 그리스 최고의 천재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직접 대리석을 쪼아 만든 아프로디테 여신상입니다! 마치 여신께서 직접 이 자리에 현신하신 착각이 들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로군요! 네! 85번 손님! 3,000 드라크마!”
아훈은 휘하의 병사를 지휘하는 베테랑 장교처럼 능숙하게 경매장의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며 모든 매물을 비싼 값에 낙찰 시켜 나갔다.
애초에 싸구려 물건도 비싼 값에 파는데 도가 튼 카르타고 상인에게 지중해 각지에서 모여든 명품을 파는 일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던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지중해 각지의 부호들이 바르카 가문에 판매를 맡긴 위탁매물의 경매가 끝난 후 히스파니아의 불 경매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그는 화장실에서 세뱃돈을 세는 아이처럼 고객들 몰래 그동안 낙찰된 매물에서 바르카 가문이 얻게 될 수수료를 계산해 보았다.
“어? 아직 히스파니아의 불 경매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수입이 거의 200달란트라고? 대박! 대박이다!”
1달란트는 기원전 3세기의 일반적인 임금노동자가 약 16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을 때 벌수 있는 돈이니 바르카 가문은 불과 몇 시간 만에 평민의 3,200년치 연봉을 벌어드린 셈이었다.
“히스파니아의 불은 다른 매물보다 기준가가 높게 책정됐으니 더 기대되네! 한 50달란트 정도 더 벌면 완벽하겠는데!”
휴식시간이 끝나고 히스파니아의 불 경매 시작이 가까워지자 경매장에서 마치 팽팽하게 잡아당긴 고무줄 같은 긴장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디아도코이 왕조의 왕자들이 전 지중해 세계의 호사가들 사이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있는 핫한 상품을 두고 무언의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디아도코이들이 전 지중해의 고위층들이 보는 앞에서 히스파니아의 불을 독점해 라이벌의 자존심을 깔아뭉개려고 독이 바짝 올랐구나.’
그 때 경매장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바르카 가문의 가신 한명이 급히 하스드루발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하스드루발 도련님. 귀한 손님 한분이 지금 이곳에 찾아오셔서 경매에 참여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미리 회원등록은 하신 분인가?”
“아닙니다. 방금 카르타고에 도착하셨다고 하네요.”
가신의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 경우의 대처방법은 미리 알려줬던 거 같은데. 정중히 사과드리고 돌려보내게.”
“저... 그러기에는 그 분이 너무 거물이시라....”
“이 자리에는 디아도코이 왕조의 왕자들이 모여 있네. 지금 전 지중해를 통틀어 그보다 더한 거물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게...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만 마우리아 제국의 삼프라티 왕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가신의 말을 들은 하스드루발의 눈이 접시처럼 커졌다.
‘어? 마우리아 제국? 그 먼데서 여기까지 왔다고?’
마우리아 제국은 인도 역사상 최초로 최남단을 제외한 인도 아대륙을 통일한 대제국이었다.
로마가 카르타고와 셀레우코스 제국을 멸망시키지 못하고 진시황도 아직 중원을 통일하지 못한 기원전 227년 현재에 마우리아 제국은 분명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영토와 수십만 명의 강력한 상비군, 그리고 발달된 문화와 기술을 가진 세계최강대국이었다.
마우리아제국은 수십 년 전부터 자국의 종교 중 하나인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서쪽으로는 그리스에서 동쪽으로는 동남아시아와 중국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절단을 파견해왔다.
그러던 중 마침 작년에 올림픽을 맞아 마우리아 제국에서 파견한 사절단이 불꽃놀이를 을 보고 본국으로 돌아와 왕족들에게 자신이 본 광경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 덕분에 히스파니아의 불에 흥미를 느낀 삼프라티 왕자는 카르타고에 가보기로 결심 한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들겨보기 시작했다.
‘마우리아 제국 왕자가 경매에 끼면 분명 경쟁이 더 과열될 거야. 그럼 나야 땡큐지. 낙찰가가 더 오를지도 모르니까. 좀 무리를 해서라도 무조건 삼프라티 왕자를 경매에 참여시켜야겠다.’
그리스어를 할 줄 아는 것을 들키면 안 되는 하스드루발은 아훈을 시켜 고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게 했다.
“고귀하신 왕족과 귀족 여러분. 방금 매우 귀한 손님께서 이 곳을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규정대로라면 미리 회원등록을 하신 분만 경매에 참여하실 수 있지만 여러분께서 양해해 주신다면 그 분께서 이 자리를 빛내주시도록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아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자 필로파토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너희 바르바로이(야만인)들의 무례가 도를 넘는구나! 진귀한 구경거리가 있다고 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진정한 후계자인 나도 너희들이 정한 규정을 군말 없이 지켰는데 예외를 두겠다고? 새로 왔다는 자가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 어디 한번 얼굴이나 보자!”
필로파토르 왕자는 경매장 안에 모인 지중해 세계의 유력자들 앞에서 자신이 진정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임을 주장하기 위해 일부러 더 크게 화를 냈다.
그 때 필로파토르의 등 뒤에서 인도 억양이 섞인 그리스어 가 들려왔다.
“뒤늦게 경매에 참여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죄송합니다 필로파토르 왕자님. 하지만 마우리아 제국의 시조이신 위대하신 찬드라굽타 대왕과 성군 아소카 대왕의 피를 이어받은 저도 왕자님과 자리를 함께할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스인은 다른 민족을 야만인이라며 깔보는 경향이 강했지만 그 자리의 누구도 인도인인 삼프라티 왕자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60만 명의 보병과 10만기의 기병, 9천 마리의 전투코끼리를 상비군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그리스 전역에 소문이 난 대제국의 왕자를 화나게 하고 싶어 하는 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필로파토르는 삼프라티를 보자마자 겁먹은 개처럼 바로 꼬리를 내렸다.
“위대한 마우리아 제국의 삼프라티 왕자님을 카르타고에서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부디 저의 무지와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필로파토르 왕자가 삼프라티 왕자에게 비굴해보일 정도로 정중한 사과를 한 것은 그저 마우리아 제국의 군사력에 겁을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홍해 인근의 항구도시를 발전시켜 인도 아대륙에 위치한 마우리아 제국과 무역을 해 큰 이득을 보고 있었다.
게다가 마우리아제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앙숙인 셀레우코스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지금은 마우리아 제국과 셀레우코스 제국이 서로 사이가 좋지만 언젠가 두 거대한 제국이 다시 서로 반목하여 어부지리를 얻게 되는 순간이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외교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마우리아 제국과 우호관계를 다지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던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왕조의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인 필로파토르 왕자는 미래에 마우리아 제국의 왕이 될지도 모르는 삼프라티 왕자를 깍듯이 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하스드루발은 급히 경매장 맨 앞줄에 자리를 하나 더 마련하고 아훈에게 통역을 시켜 상황을 정리했다.
“이번 행사의 책임자이신 하스드루발 바르카님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을 대표해 마우리아 제국의 삼프라티 왕자님을 환영합니다. 이제 휴식시간을 마치고 잠시 후 경매를 재개하겠습니다. 삼프라티 왕자님. 하인의 안내에 따라 저희가 준비한 자리에 착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신의 재빠른 조치로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간신히 진정되자 하스드루발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어떻게 만든 자리인데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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