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 [29화] 뜻밖의 대박
하스드루발의 조치로 경매장 내의 분위기는 일단 진정되었지만 고대의 상위 1%들은 경매에서 라이벌들을 압도할 것을 다짐하며 경쟁심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필로파토르 왕자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왕자는 히스파니아의 불을 독차지해 라이벌들의 긴 여행을 헛걸음으로 만들 생각으로 가득했다.
필로파트로 왕자의 경우 조금 전 삼프라티 왕자 때문에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해서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었지만 안티오코스 왕자는 조상이 마우리아 제국에게 당한 굴욕을 되갚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수십 년 전 셀레우코스 제국은 마우리아 제국과 전쟁을 벌이다 정전협정을 맺게 되었다.
그 내용은 셀레우코스 제국이 마우리아 제국에 인더스 강 유역의 영토 대부분을 넘기고 자국의 공주를 마우리아 제국의 왕 찬드라굽타에게 시집을 보내는 대신 코끼리 500마리를 받고 전쟁을 멈추는 것이었다.
올해 13살인 안티오코스 왕자는 이 협약이 셀레우코스 제국에게 너무 불리한 것이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조상과 찬드라굽타가 서로를 인정하고 의기투합했기 때문이에이런 협약을 맺었다고 배워왔지만 사실 마우리아 제국에게 힘에서 밀려 부당한 협정을 맺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늘 품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자주색 히스파니아의 불 50개가 매물로 나오자 경매장의 분위기는 끓어오르는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왕자님! 100 달란트!”
경매를 진행하는 아훈의 우렁찬 목소리가 대리석으로 만든 건물 안을 가득 채우자 경매장 안 의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주색 히스파니아의 불 50개의 경매 시작가는 8달란트 였지만 경매가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응찰가가 벌써 12배 이상 뛰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평범한 노예 한 명의 가격이 500 드라크마였는데 현대로 치면 대략 중형차 한 대 가격과 비슷한 액수였다.
1달란트는 6천 드라크마이니 아주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불꽃놀이용 화공품 50개의 가격이 중형차 약 1,200대 가격까지 치솟은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고객 수백명이 모인 자리에서 기뻐 날뛰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대박! 초대박이다! 아직 경쟁이 치열할 때 응찰가를 좀 더 올려봐야겠어!’
그는 아훈에게 미리 약속한 손짓으로 응찰가를 조금 더 올려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훈은 그런 고용주의 지시를 눈치 채고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고귀하신 왕족과 귀족여러분! 여러분의 불같은 성원으로 경매장의 열기가 정말 뜨겁습니다! 그런데 응찰가가 너무 낮아서인지 이번 상품의 경매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여러분께서 동의하신다면 빠른 진행을 위해 한 번 응찰 하실 때마다 오르는 가격을 500드라크마에서 10달란트로 바꿀까 합니다! 혹시 반대하시는 분계십니까?”
하스드루발과 대부분의 고객들은 아훈의 애드립에 너무 놀란 나머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아훈! 그건 선 넘었지! 10달란트가 무슨 애들 용돈인 줄 알아? 그 돈이면 전함 한척 만들고도 잔돈이 남는다고! 고객들의 항의가 빗발칠 거라고!’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살인적인 응찰가에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오히려 마우리아 제국의 삼프라티 왕자는 아훈의 말에 맞장구를 치기까지 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안 그래도 먼 길을 오느라 빨리 여독을 풀고 싶으니 그렇게 진행 하세.”
한 나라의 경제력은 그 나라의 국방력을 측정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 중 하나이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자국에서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타국의 권력자들 앞에서 궁상을 떨다 얕잡아 보이는 것을 꺼렸다.
살인적인 응찰가에도 치열한 경쟁이 30 분 가까이 계속 된 끝에 히스파니아의 불은 믿을 수 없이 높은 가격에 낙찰되었다.
“마우리아 제국의 삼프라티 왕자님! 530 달란트! 530달란트! 530 달란트!”
응찰가를 세 번 외친 아훈이 낙찰을 알리기 위해 낙찰봉을 휘두르자 경쾌한 소리가 경매장 안에 울려 퍼졌다.
- 탕!
* * *
“오백 하고도 30 달란트라니! 게다가 위탁판매 수수료로 받은 200달란트도 있고! 명품이라는 게 원래 없어도 사는데 지장 없는 물건을 엄청 비싸게 사서 자랑하라고 있는 거지만 이렇게 비싸게 팔릴 줄은 꿈에도 몰랐어!”
경매를 마친 하스드루발은 한니발과 함께 연회장에서 식사를 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카르타고가 1차 포에니전쟁에서 패배한 후 로마에게 지불한 전쟁배상금 3,200달란트의 5분의 1이 넘는 거액을 하루 만에 벌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한니발은 여느 떄처럼 침착했다.
“하스드루발.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당연하지. 이제 지금쯤 풀죽어 있을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자를 만나러 가자. 오늘 당장 동맹을 맺지는 못하겠지만 일단 안면은 터놔야지.”
그 때 아훈이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온 아훈이 다급한 표정으로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하스드루발 도련님!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마우리아 제국의 삼프라티 왕자님께서 도련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
“아니 왜? 설마 이제 와서 깎아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아직 어리신 도련님께서 이번 행사책임자라는 것을 알고 흥미가 생기신 모양입니다.”
하스드루발은 미심쩍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VIP 고객인 삼프라티 왕자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형 난 아무래도 삼프라티 왕자에게 가봐야 할 거 같아.”
한니발은 동생이 세계최대강대국의 왕자를 만나러 가는 동생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래. 안티오코스 왕자는 나 혼자서 만나고 올게. 너무 긴장하지 말고 잘하고 와.”
* * *
하스드루발과 삼프라티 왕자는 조용한 장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왕자의 뜻에 따라 비르사 언덕 아래에 있는 바르카 가문의 옛 저택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하밀카르가 해외파 의원들과 긴밀한 의논을 할 때 사용했었던 밀실의 원형 탁자 앞에 앉았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나이는 대충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정도인가? 대제국의 왕자답지 않게 차림새가 수수하네. 자이나교 신자라서 그런가?’
하스드루발이 눈앞의 상대를 파악하려고 애쓸 때 삼프라티 왕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스드루발님. 그리스어를 할 줄 아시지 않소? 카르타고인은 그리스어를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까 경매장에서 필로파토르 왕자님과 저의 대화를 알아들으시는 것 같았소. 제 말이 맞다면 주변의 시종들을 물리치고 단 둘이 말씀을 나누고 싶소만.”
하스드루발은 삼프라티 왕자의 말을 듣고 바짝 긴장했다.
‘생긴 거하고는 다르게 진짜 눈치 빠르네. 지금 카르타고 시민이 그리스어 배우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은근히 기선제압 하는 거 맞지? 대체 나한테 뭘 원해서 이러는 거지?’
하스드루발은 마음의 동요를 애써 숨기고 미소를 지으며 삼프라티 왕자에게 그리스어로 대답했다.
“제가 그리스어를 못하는 척 한 것이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삼프라티 왕자님. 국법이 그리스어를 배우는 걸 금지하고 있어 되도록 티를 내지 않으려다보니 본의 아니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왕자님의 말씀대로 통역을 내보내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하스드루발이 아훈을 내보내자 삼프라티 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운 좋게도 카르타고에 막 들어섰을 때 불꽃놀이를 구경할 수 있었소. 그 때 매년 마우리아 제국에서 불꽃놀이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소.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온 나라에 알리는 데 이보다 좋은 수단은 없을 것이오.”
마우리아 제국이 현재 세계최강대국의 반열에 오른 것은 전대의 왕인 아소카 대왕 덕이다.
무려 49년 동안 제국을 다스린 아소카 대왕은 ‘적당히’를 모르는 희대의 먼치킨 군주였다.
그는 재위 초반에 정복전쟁을 벌여 제국의 영토를 인도 역사상 최대 판도로 넓힌 후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해 백성들에게 선정을 펼쳐 마우리아 제국의 태평성대를 열었다.
한마디로 아소카 대왕은 한국의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합쳐놓은 것 같은 명군 중의 명군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소카 대왕이 5년 전 세상을 떠난 후 왕위를 물려 받은 다사라타 왕은 아버지만큼 유능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우리아 제국의 왕실은 하루가 다르게 지방토호들의 존경을 잃어가고 있었다.
역사에 해박한 하스드루발은 삼프라티 왕자의 말을 듣고 그의 의도를 대충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왕실의 권위가 아직 건재하다는 걸 토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 수단으로 불꽃놀이를 하려는 거구만.’
삼프라티 왕자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마우리아 제국에서 이 곳 카르타고까지 오는 길이 너무 멀어 매년 경매에 참가하는 건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 카르타고의 상인들이 상품을 제국까지 가져오면 왕실이 전량 사들이는 조건으로 구매계약을 맺으면 어떻겠습니까? 대신 가격은 오늘 낙찰가보다 좀 저렴했으면 좋겠군요.”
하스드루발은 삼프라티 왕자의 말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와서 사가기 귀찮은데 가격은 후려치고 싶은 거군. 운송비라는 게 있다고!’
그는 일단 삼프라티 왕자의 제안을 적당한 이유를 들어 거절하기로 했다.
“왕자님의 제안에 감사드립니다만 카르타고 상인들이 마우리아 제국에 가려면 이집트 를 지나가야합니다. 그 땅을 지배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카르타고인이 자국의 영토에 발을 들이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해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는 요즘 사이가 아주 좋은 편이니까요.”
하스드루발은 다시 두뇌를 풀가동해 대응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아버지께서 나를 이용하려드는 사람이 생기면 오히려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뭐 좋은 방법 없을까? 아! 기똥찬 생각이 났다.’
하스드루발은 삼프라티 왕자의 제안에 또 다른 제안으로 답했다.
“상품을 파는 것도 좋지만 허락하신다면 내년부터는 매년 마우리아 제국에 사신을 보내 히스파니아의 불을 포함한 카르타고의 특산품을 제국의 왕실에 조공으로써 바치고 싶습니다.”
하스드루발의 말에 삼프라티 왕자는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무료로 주시겠다는 말인가요? 저야 기쁜 일이지만 이유가 뭡니까?”
“무료로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은화 대신 다른 것을 하사품으로서 받고 싶은 것이지요.”
하스드루발은 삼프라티 왕자에게 일종의 조공무역을 제안했다.
애초에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불꽃놀이를 하려했던 왕자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지중해의 해양대국인 카르타고에서 온 사절단이 마우리아 제국에 조공을 바친다면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겠군요. 그러면 하사품으로 받고자 하는 물건은 무엇입니까?”
“제국의 남부에서 나는 질 좋은 철과 저희가 초석이라고 부르는 흰 가루, 그리고 사탕수수를 하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마우리아 제국에서는 땅만 파도 저희가 비료로 쓰는 초석을 쉽게 구할 수 있다고 무역상들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도는 천연자원이 매우 풍부했는데 특히 화약을 만드는데 쓰이는 원료인 초석은 대충 땅만 파도 채취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이 매장되어 있었다.
또 마우리아 제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츠 강철이라고 불리는 질 좋은 철과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하스드루발은 이 것들을 카르타고 노바에 가져와 새로운 수입원과 질 좋은 무기를 만들 생각이었다.
삼프라티 왕자는 잠시 오른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다 하스드루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초석이라는 물건이 말씀대로 구하기 쉬운 물건이라면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이군요. 하스드루발님의 지혜 덕분에 마우리아 제국과 바르카 가문의 함께 번영할 수 있겠습니다.”
* * *
하스드루발이 삼프라티 왕자를 만나고 있을 때 한니발은 자신의 숙소에서 쉬고 있던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왕자를 찾아갔다.
안티오코스 왕자가 선약 없이 자신을 찾아온 한니발에게 물었다.
“바르카 가문의 사람이 여긴 무슨 일이오? 마우리아 제국에게 원하는 물건을 빼앗긴 걸 비웃으러 온 것이오?”
한니발은 동생 마고와 동갑인 어린 왕자에게 함께 온 하인들이 가져온 선물을 건네주면서 그리스어로 대답했다.
“진정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께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선물은 바로 이럴 때를 대비해 하스드루발이 미리 챙겨둔 자주색 히스파니아의 불 열 개였다.
빈손으로 귀국할 생각에 마음이 어두웠던 안티오코스 왕자는 그제서야 어린애답게 활짝 웃었다.
“이렇게 귀한 선물을 그냥 주신단 말이오? 덕분에 고개를 들고 조국에 돌아갈 수 있겠군요!”
안티오코스 왕자는 한니발을 자신의 숙소에 초대해 다과상을 대접했다.
한니발은 어려서부터 실레노스에게 그리스 문화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술을 배워왔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대왕 덕후인 안티오코스 왕자와 금세 친해졌다.
한니발의 군사적 재능과 매력에 흠뻑 빠진 안티오코스 왕자는 본래의 역사보다 30여년 일찍 한니발을 영입하려 했다.
“한니발! 자네 정말 대단한 인재로군! 나와 함께 셀레우코스 제국에 가지 않겠나? 내가 왕이 되면 자네를 오른팔로 삼아주겠네.”
“죄송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왕자님.”
“역시 그렇겠지. 언젠가 자네와 검을 맞대야하다니 안타깝네. 자네 정도의 인물이라면 분명히 언젠가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지중해를 제패하려들 테니 말이야.”
한니발은 뜻밖의 말을 하는 안티오코스 왕자와 눈을 마주쳤다.
왕자는 아직 13살이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이미 셀레우코스 제국 최고의 정복군주다운 패기가 깃들어 있었다.
한니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안티오코스에게 대답했다.
“저는 왕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안티오코스 왕자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한니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아직 어리다고 속일 생각 말게! 그럼 무엇 때문에 그토록 뛰어난 군략을 익혔단 말인가?”
한니발은 창문 너머에서 축제를 즐기고 있는 시민들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저는 그저 위대하신 바알 함몬의 손에 쥐어진 검이 되어 카르타고 시민들을 지키고 싶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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