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 [30화] 인재영입 1호는 천재 수학자
한니발은 안티오코스와 친분을 다진 후 곧바로 히스파니아로 돌아갔지만 하스드루발은 축제가 끝날 때까지 카르타고에 남아있기로 했다.
마침내 모든 행사가 끝난 후 그는 가장 먼저 함께 카르타고에 온 히스파니아의 불을 개발한 기술자들과 아훈에게 보수를 지급했다.
하스드루발은 사전에 계약했던 대로 기술자들과 아훈에게 각각 히스파니아의 불 판매순익의 0.1%를 주었다.
기술자들은 3천 세겔(약 32년치 연봉)이 넘는 거금을 받자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글썽였다.
“하스드루발 도련님! 정말 감사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이토록 큰돈을 만져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전에는 그저 먹고사느라 급급했는데 도련님 덕분에 이제 좀더 재산을 불리면 귀족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닙니다!”
대부분 농업국가인 다른 고대국가들에서는 조상대대로 내려온 토지소유권과 혈통에 의해 귀족과 평민의 신분이 구분되었다.
그러나 상업국가인 카르타고에서는 전통적으로 재산이 많은 시민이 곧 귀족이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도 공화국인 카르타고에서 수페트(카르타고의 집정관)나 100인회 의원 등 중요한 선출직 관직은 모두 무급이었기 때문에 남들이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시간에 정치를 할 수 있는 부자들만 정치인이 될 수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기뻐하는 기술자들에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야말로 고맙네. 자네들 덕분에 바르카 가문은 이번에 많은 이윤을 남기고 여러 강대국들과 우호관계를 맺게 됐다네. 앞으로 자네들이 꼭 귀족이 되어서 바르카 가문과 해외파에 힘을 보태주길 바라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아훈의 표정은 그저 밝지만은 않았다.
그는 카르타고 시민과 리비아 속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리비-페니키아인이기 때문에 기껏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귀족이 되기는커녕 카르타고 시민권을 얻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아훈의 마음을 짐작하고 그를 격려했다.
“아훈. 자네가 없었으면 이번 경매의 매출은 지금의 5분의 1도 안됐겠지. 정말 고맙네. 앞으로 자네 같은 카르타고인들도 시민권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하스드루발 도련님. 도련님 덕분에 통역을 그만두고 다시 장사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빈말이 아니네. 내 언젠가 반드시 전쟁이 날 때마다 카르타고를 위해 싸워온 리비-페니키아인들과 모든 속주민들에게 시민권을 주고 말겠네.”
그제서야 아훈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바르카 가문의 하스드루발 도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믿어야지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도련님!”
* * *
하스드루발은 임금 지불을 마치고 히스파니아로 서신을 보내 아버지의 허락을 맡은 다음 로마와 로마의 동맹국인 시라쿠사에 선물을 보내기로 했다.
그 이유가 궁금했던 바르카 가문의 첫째 사위 보밀카르가 로마와 시라쿠사에 보낼 선물을 챙기느라 아직 자신의 집에 묵고 있던 하스드루발에게 물었다.
“처남. 장인어른께서는 장차 로마를 정벌할 생각이시지 않았어? 왜 갑자기 로마에 선물을 보내시지?”
“바르카 가문이 갑자기 떼돈을 벌었으니 안 그래도 우리를 못마땅해 하는 로마놈들의 신경이 더 날카로워질 것 같아서 제가 선물을 보내자고 건의 드렸어요. 놈들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보여서 경계심을 좀 풀어보려고요.”
보밀카르는 아직 14살 밖에 안 된 처남의 말에 감탄하면서 말했다.
“충분히 힘을 기를 때까지 적을 방심시킬 생각이구만! 대체 그런 전략은 어디서 배운 거야 처남? 스파르타인 가정교사 실레노스에게 배웠나?”
하스드루발은 큰매형의 질문에 멋쩍은 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월맹군의 화전양면전술에서 배웠다고 말하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기는 하네.’
하스드루발은 로마에 보낼 선물은 바르카 가문의 가신 중 한명을 뽑아 보내기로 했지만 시라쿠사에는 자신이 직접가기로 마음먹었다.
굳이 수많은 로마의 동맹국 중 하나에 불과한 시라쿠사에 선물을 보내는 이유는 그 곳에 사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천재 를 영입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무기개발에 쓸 추가자금도 예상보다 훨씬 많이 확보했으니 수준 높은 엔지니어가 필요하겠네. 어디 한번 전설의 공돌이를 영입하러 가볼까?’
하스드루발이 영입하려는 인재는 바로 기원전 3세기 최고의 수학자이자 공학자이면서 천문학자이가 철학자이기도 한 아르키메데스였다.
그는 부력의 원리를 알아낸 후 ‘유레카’를 외친 천재적인 수학자로 가장 유명하지만 시대를 앞선 뛰어난 병기를 만들어낸 공학자로서의 명성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하스드루발은 전생에 2차 포에니전쟁이 발발한 후 시라쿠사가 로마와의 동맹을 깨자 보복을 하기 위해 몰려온 로마군을 아르키메데스가 거대한 투석기와 기중기, 그리고 고열의 햇빛을 반사하는 청동거울을 만들어 로마군의 전함을 파괴하고 불태워 물리쳤다는 기록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런 그를 영입한다면 히스파니아 원정과 로마와의 전쟁에 사용할 다양한 무기를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젊은 시절 수학공부를 하려고 이집트까지 유학을 갔었다고 하지. 분명 지적호기심이 대단할거야. 그 점을 잘 이용하면 카르타고 노바로 데려갈 수 있을지도 몰라.’
일단 마음을 정한 하스드루발은 민첩하게 행동했다.
그는 시라쿠사의 늙은 왕 히에론의 환심을 사기위해 카르타고의 특산품인 값비싼 자주색 옷감과 이집트에서 수입한 커다란 진주,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은쟁반 여러 개를 챙긴 후 보밀카르가 붙여준 시종들과 함께 시라쿠사로 가는 배에 올랐다.
시라쿠사는 지중해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커다란 섬 시칠리아의 동부지역에 있는데 날씨만 좋다면 카르타고에서 뱃길로 사흘 거리였다.
시칠리아에 도착한 하스드루발은 바로 왕궁을 찾아가 시라쿠사의 늙은 왕 히에론을 알현했다.
바르카 가문이 동맹국 로마에 사절을 보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데다 값비싼 선물까지 받아 기분이 좋아진 히에론 왕은 하스드루발 일행을 환영했다.
“오랜 세월 서로 검을 맞대온 시라쿠사와 카르타고 사이의 해묵은 악연을 풀고자 먼 길을 온 바르카 가문의 여러분을 환영하오. 그대들의 여독을 풀기위해 곧 환영회를 벌일 예정이니 부디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바라오.”
히에론 왕은 시라쿠사의 유력인사들을 불러 모은 후 좋은 음식과 포도주를 대접하며 환영회를 열었다.
하스드루발은 그 자리에 모인 시라쿠사의 유력인사들과 대화를 나누며 아르키메데스가 참석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혹시 이 자리에 대 수학자이신 아르키메데스 선생님께서도 참석하셨는지요? 그 분을 만나 잠시나마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하스드루발의 말을 들은 시라쿠사 귀족은 양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정신 나간 늙은이를 만나시겠다고요? 그 양반이 대단한 학자인건 잘 알지만 그리 추천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학자 분들 중에 조금 괴팍한 분이 많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조금이 아니에요! 조금이! 아 글쎄 일전에 그 노인네가 목욕을 하다 꽤 대단한 수학적 원리를 깨달은 적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바로 욕조에서 뛰쳐나와서는 시내에서 알몸으로 기뻐 날뛰더라고요!”
그 때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시라쿠사 귀족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정도면 그냥 ‘또 저러는구나.’하고 넘어가면 되죠. 그런데 그 노인네 오만함도 보통이 아니에요. 오늘도 히에론 전하께서 환영회에 초대하셨는데 자기 집에서 뭔가를 연구한다고 지금까지 코빼기도 안 비친다니까요? 왕께서 그를 아끼지 않으셨으면 예전에 시라쿠사에서 추방당했을 겁니다.”
하스드루발은 시라쿠사 귀족들과의 대화로 아르키메데스가 있는 곳을 알아낸 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지금 자기 집에 있단 말이지? 당장 가봐야겠다.’
기회를 엿보다 시종 한 명만 데리고 환영회를 빠져나온 하스드루발은 시라쿠사 시민들에게 길을 물어가며 아르키메데스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르키메데스의 집은 넓은 마당이 있는 제법 큰 저택이었다.
하스드루발의 시종이 대문을 두드리자 저택을 관리하는 아르키메데스의 노예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아르키메데스 주인님께서는 지금 마당에서 수학 연구를 하고 계십니다. 연구 중에 방해를 받으시면 굉장히 짜증을 부리시니 잠시 저택 안에서 기다려주십시오.”
하스드루발이 노예의 안내를 받아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긴 작대기 하나를 들고 마당위에 쌓여있는 모래에 갖가지 도형을 그려가며 연구를 하고 있는 백발노인이 보였다.
하스드루발이 자신을 안내하고 있는 노예에게 말했다.
“저분이 아르키메데스 선생님이신 모양이네.”
“맞습니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연구에 열중하고 계시지만 자칫 저 도형을 밟기라도 하면 그 분이 히에론 전하라도 일단 고함부터 지르시지요.”
하스드루발은 역사적인 위인을 눈앞에 두자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로마군이 시라쿠사를 점령했을 때도 도망가지 않고 집에서 연구하다 칼 맞고 죽었다더니 진짜 듣던 그대로인 사람이구만. 아! 이렇게 하면 아르키메데스의 관심을 끌 수 있겠네!’
하스드루발이 다시 아르키메데스의 노예에게 말했다.
“내게도 저 긴 나무막대기를 하나 가져다 줄 수 있겠나? 연구에 매진하시는 대학자님을 뵈니 나도 학구열이 샘솟아서 그러네.”
“아직 젊어보이시는데 학자셨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노예가 가지고온 막대기를 받아든 하스드루발은 잽싸게 아르키메데스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스드루발은 자신을 말리는 노예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아르키메데스의 앞에 서서 아르키메데스가 땅에 그리고 있는 도형과 기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구분구적법 연구를 하고 계셨구나? 이거 재밌겠네.’
구분구적법은 아르키메데스가 세계최초로 발견한 도형의 넓이나 부피를 구하는 방법인데 이는 현대 한국의 수많은 수험생들을 수포자로 만든 적분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오른발을 슬며시 내밀어 아르키메데스가 땅에 그린 삼각형을 사뿐히 밟았다.
하스드루발의 만행에 아르키메데스의 새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대추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비켜! 비켜! 이 어린놈의 새끼가 감히 내 연구를 방해해?! 당장 그 더러운 발 치우지 못해?!”
아르키메데스가 소리를 지르며 날뛰었지만 하스드루발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막대기로 바닥에 그리스어로 수학공식을 적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더 화가 난 아르키메데스는 더욱 격렬하게 날 뛰기 시작했다.
“이 야만인 꼬맹이가 미친 건가? 거기 누구 없느냐! 당장 이 미친 녀석을 대문 밖으로 끌어내라!”
급기야 손에 든 막대기로 하스드루발을 후려치려던 아르키메데스는 그가 적어 내려가는 수학공식이 점점 마당 위를 메워가자 두 눈을 보름달처럼 크게 뜨고 탄식을 자아냈다.
“너... 너 같은 애송이가 대체 어떻게?”
하스드루발은 전생에 비록 사학도였지만 서울대에 진학한 수재였던 데다가 가정형편상 끊임없이 과외 선생 노릇을 해야 했기 때문에 여전히 고등학교 레벨의 수학은 수능 1등급을 받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하스드루발이 구분구적법을 기초로 수많은 수학자들이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완성한 적분공식을 써내려가자 그 진가를 알아본 아르키메데스가 너무 놀란 나머지 뒤로 넘어질 지경이 된 것이다.
‘이쯤이면 됐겠지.’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수학공식에 아르키메데스가 완전히 열중한 것을 알아채고 갑자기 막대기를 잡은 손을 멈추어 버렸다.
그러자 아르키메데스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날뛰기 시작했다.
“아니 이 녀석이 누구 숨넘어가는 꼴 보려고 하나? 현기증 난다고! 더 써! 더 쓰라고 이 자식아!”
하스드루발은 그런 아르키메데스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여기서는 더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아르키메데스 선생님.”
“그럼 대체 어디서 보여주겠다는 거냐!”
“저와 함께 히스파니아에 가신다면 마저 보여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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