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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32화 (32/201)

[ 32 ] [31화] 순조로운 전쟁준비 (1)

아르키메데스를 데리고 히스파니아로 돌아온 하스드루발은 내정에 신경 쓰면서도 한동안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던 병법공부와 군사훈련에 매진했다.

그렇게 다시 평온하지만 바쁜 일상으로 돌아온 지 어느덧 3년.

하스드루발은 어지간한 켈트족 전사보다도 건장한 아버지와 형 한니발보다는 못하지만 페니키아인 치고는 키가 꽤 크고 다부진 근육을 자랑하는 늠름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그는 18살이 되면서부터 형 한니발이 지휘하는 부대의 기병대장으로 임명되어 종종 원정을 떠났다.

하지만 4년 전 카르페타니족을 대파한 이후 히스파니아에서 바르카 가문의 위세가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원정사업은 큰 전투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날도 하스드루발은 형 한니발과 함께 루시타니아 지역의 작은 도시 하나를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복속시킨 후 막 카르타고 노바로 돌아온 참이었다.

“아오! 이건 또 뭐야!”

하스드루발은 애마 페라리를 타고 시민광장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카르타고 노바를 떠날 때만해도 공터였던 광장 한복판에 커다란 분수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두 사람 앞에 나타난 분수는 언뜻 봐도 최고급 대리석을 깎아 만든 것이었다.

대략 3m 높이의 분수 꼭대기 에서 야자수 모양으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수면 위에는 물이 흐르는 힘을 이용해 작동하는 어떤 장치가 되어있는 건지 청동으로 만든 작은 돌고래 모양 인형 여러 개가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기원전 3세기 기준으로는 그야말로 첨단기술을 쏟아 부어서 만든 최고급품이었다.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이 원정을 떠나느라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시민광장 한복판에 이렇게 근사하고 쓸데없는 물건을 만들 사람은 단 한명 뿐이었다.

“아르키메데스 그 정신 나간 늙은이가 또 한 건 저질렀나보군.”

평소 감정표현이 희박한 한니발이 드물게 눈살을 잔뜩 찌푸리면서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질서와 절제를 미덕으로 여기는 한니발과 대중목욕탕에서 한참 몸을 씻다가도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알몸으로 집까지 뛰어가는 아르키메데스는 그야말로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이 이번에야말로 아르키메데스를 카르타고 노바에서 추방하자고 할까봐 일부러 더 화를 내는 척하며 자기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

“그러게 말이야 형! 이 양반이 드디어 노망이 났나봐! 공공장소에 맘대로 이런 걸 만들면 어떻게 하라고! 형은 먼저 집에 가있어. 내가 당장 찾아가서 한마디 하고 올게.”

그러나 한니발은 동생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도 같이 가자. 이번에는 정말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어.”

두 사람은 급히 말머리를 돌려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르키메데스의 집으로 향했다.

시라쿠사에서 주인을 따라 카르타고 노바에 온 노예가 멀리서 낯익은 검은 말 두 마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미리 마중을 나와 두 형제를 저택 2층에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연구실로 안내했다.

한니발은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창밖에 보이는 분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르키메데스를 다그쳤다.

“바르카 가문의 허락 없이 카르타고 노바에 저런 걸 만들 사람은 당신뿐이지. 어디 해명해 보시오.”

그러나 아르키메데스는 한니발의 서슬 퍼런 추궁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자네는 식사를 할 때마다 그 이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나?”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 해주시오.”

“거 참! 동생하고 다르게 이해력이 부족하군! 사람은 살기 위해 음식을 먹지. 난 지적호기심을 해소하지 못하면 죽는다고! 어느 날 갑자기 저 분수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어. 그래서 만들었지. 그게 전부일세!”

아르키메데스의 뻔뻔하다 못해 당당하기 까지 한 궤변을 듣고 화가 난 한니발의 얼굴이 불에 달군 쇠처럼 빨개졌다.

이처럼 가끔 아르키메데스의 돌발행동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때도 있었지만 지난 3년간 바르카 가문의 2차 포에니전쟁 준비는 하스드루발의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대체로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히스파니아의 불은 완전히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비싼 명품으로 자리 잡았고 작년에는 마우리아 제국에서 들여온 사탕수수를 북아프리카에 있는 바르카 가문의 소유지에서 재배하여 세계최초로 고체 설탕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인도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탕수수의 즙을 시럽형태로 사용해 왔지만 그것을 고체화 한다는 발상을 아직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추가 처음 중세유럽에 소개되었을 때 같은 무게의 금과 거래될 정도로 비쌌던 것 처럼 고체 설탕도 전 지중해에 희귀한 향신료이자 약재로서 엄청난 가격에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또 하스드루발에게 미래의 수학지식까지 배운 천재 아르키메데스의 연구 덕에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던 신무기 개발도 슬슬 성과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무기개발에서 아르키메데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컸기 때문에 하스드루발은 이번에도 팽팽하게 잡아당긴 고무줄 같은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을 풀기위해 대화의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참. 아르키메데스 선생님. 신형 투석기 개발사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그거? 벌써 석 달 전에 설계 끝내고 제작 들어갔지. 아마 지금쯤이면 거의 완성됐을 걸? 나도 할 일은 해놓고 딴 짓 하는 사람이라고!”

한니발은 평소 신형 투석기 개발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화가 난 와중에도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말았는데 하스드루발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형. 일단 여기서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빨리 집에 가서 갑옷부터 벗고 공성무기 제작소에 다녀오는 게 어때? 나 신무기가 완성됐는지 너무 궁금해.”

새로운 투석기의 성능이 늘 궁금했던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의 속내를 짐작하면서도 미끼를 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말대로 분수 건은 나중에 추궁해도 큰 문제없겠지. 난 먼저 병영에 가서 이번에 새로 본국에서 뽑은 신병들의 상태를 점검해야 돼. 이따 제 3시에 공성무기 제작소에서 만나자.”

“어? 우리 아직 점심 안 먹었잖아. 집에 안 들를 거야?”

“오늘은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아.”

“그래 그럼. 그럼 난 집에서 점심먹고 대장간에 들렀다가 공성무기 제작소에 갈게.”

대화를 마친 두 형제는 아르키메데스의 집에서 나와 말을 타고 각자의 목적지로 갔다.

한니발 보다 먼저 집에 돌아온 하스드루발이 마구간지기에게 애마 페라리를 맡기고 현관문을 지나 집안에 들어서자 고향 카르타고의 바닷바람처럼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스드루발 도련님 수고 많으셨어요.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한니발 서방님은 같이 안 오셨나요?”

하스드루발을 부른 사람은 작년에 한니발과 결혼한 히밀케 였다.

“다녀왔습니다 형수님. 형은 먼저 병영에 들러서 이번에 새로 뽑은 신병들의 상태를 점검하겠대요.”

“아내보다 신병들을 먼저 보러가시다니 서방님도 여전하시네요. 뭐 여전하시다는 건 무사히 돌아오셨다는 뜻이니 기쁜 일이지만 좀 섭섭하네요.”

4년 전 공정한 하스드루발과 결혼한 산악부족의 공주는 남편이 이베리아어를 할 줄 알아서인지 아직도 페니키아어 실력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히밀케는 그녀와 같은 이베리아족의 공주 이면서도 카르타고인인 할머니의 교육을 받고 자란 덕에 페니키아어를 원어민처럼 잘했다.

게다가 성격이 자상하고 길고 검은 생머리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미인이라 카르타고 노바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히밀케를 좋아했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사실상 바르카 가문의 맏며느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참. 지금 쯤 도착하신다는 연락을 받고 식사 준비를 해놓았어요. 시장하실 텐데 얼른 식사부터 하세요 도련님.”

“정말요? 역시 형수님이 최고에요!”

시동생의 말에 히밀케는 화사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후 하인들에게 직접 식사준비를 지시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히밀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별 얘기 아니라도 히밀케 형수님하고 대화를 하면 뭔가 치유되는 기분이라니까. 나도 몇 년 후면 형수님처럼 참한 여자랑 결혼하겠지? 전생에는 딱 한번 100일도 못 사귀어보고 깨진 게 전부였는데 되게 기대되네!’

하스드루발은 형수와의 대화를 마친 후 서둘러 갑옷을 벗고 식당에 들어섰다.

점심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에 하스드루발은 홀로 점심을 먹어야 했다.

하스드루발이 자리에 앉자 하인들이 음식을 가져왔다.

히밀케는 꽤 많은 음식을 준비했지만 하스드루발은 일정이 바빴기 때문에 폭신한 빵 한 덩이와 구운 양꼬치 한개, 그리고 오렌지 한 개와 물을 섞은 포도주 한잔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르카 가문의 대장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르카 가문이 마우리아제국과 무역을 시작한 후 약 2년 전 처음으로 우츠 강철을 들여오면서 부터 카르타고 노바의 대장간에는 매일 쇠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흐아... 냉탕에 몸을 담그다 사우나에 들어가는 느낌이네. 뜨거운 열기가 모공 하나하나에 스며드는 기분이야.’

우츠 강철은 인도 남부에서만 생산되는 특수한 철광석을 인도인들이 자신들만의 발전된 기술로 제련한 고대세계에서 유일한 강철이었다.

우츠 강철로 만든 무기는 선철과 연철의 합금으로 만든 당시 지중해 세계의 철제무기에 비해 훨씬 단단하면서도 질겨서 잘 깨지거나 부러지지 않았다.

하스드루발이 마우리아 제국과 조공무역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우츠 강철과 히스파니아의 불의 원료인 초석을 수입하기 위해서였다.

‘아마 인도인들은 도가니 제철법으로 강철을 제련했겠지. 카르타고의 기술력으로도 도가니 제철법을 도입할 수 있겠지만 그냥 우츠 강철을 수입해오는 게 제일 나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로마도 따라 할 수 있으니까.’

그 때 수석 대장장이가 대장간 안으로 들어온 하스드루발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하스드루발 대장님 루시타니아 원정 잘 다녀오셨습니까?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기쁩니다.”

“자네가 만들어준 무시무시한 병장기를 보고 적군이 겁을 먹은 덕분에 피한방울 안 흘리고 도시를 접수했지. 그런데 전에 말한 검은 다 만들어졌나?”

“저번에 말씀하신 그 무식하게 큰 낫 같이 생긴 검 말씀이군요. 이름이 다키아의 팔크스 였던가요? 지금 가져오겠습니다.”

하스드루발은 로마의 긴 역사에서 로마군을 가장 괴롭혔던 병종을 훈련시켜 2차 포에니전쟁이 발발하면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바로 로마군의 방패를 일격에 쪼개버렸다는 다키아의 팔크스(Falx)를 사용하는 충격보병과 빠른 기동력과 뛰어난 활솜씨로 로마군을 괴롭혔다는 파르티아의 궁기병, 그리고 강한 충격력을 자랑하는 중기병이었다.

궁기병을 양성하려면 질 좋은 합성궁을 먼저 개발하여야 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걸릴게 분명했지만 다키아의 팔크스는 힘 좋은 병사들을 몇 달만 훈련시키면 당장이라도 활용할 수 있는 무기였다.

수석 대장장이가 가져온 검은 검신에 아름다운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하스드루발이 머릿속에 그린 다키아의 팔크스와 거의 비슷했다.

“내가 전에 말해준 단서를 잘 참고해서 검을 만들었나보군.”

그의 말에 수석 대장장이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하나 만드느라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적당한 온도로 가열했다가 망치로 두드려 점차 칼 모양으로 단조(鍛造)하면서 적당히 식히는 과정을 수십 차례 반복해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 ‘적당히’를 찾아내느라 지난 2년간 여기 대장장이들은 다 몇 번 씩 몸살이 났습니다.”

수석 대장장이가 말한 방법은 바로 하스드루발이 전생에 역사서를 읽다 접한 이슬람의 명검 다마스쿠스 검의 대략적인 제조방법이었다.

다마스쿠스 검의 제조법이 실전된 이 후 현대의 몇몇 과학자들이 전설의 명검을 다시 재현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모든 비밀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 노바의 대장장이들이 자신이 역사서에서 읽은 방법을 참고하여 스스로 새로운 제작방법을 개발하도록 유도했는데 우츠 강철로 검을 만들기 시작한지 2년 차에 들어서자 검의 품질이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다.

하스드루발은 말없이 수석대장장이에게 다키아의 팔크스를 건네받은 후 근처에 장식되어 있던 로마 군단병의 스큐툼을 모방해서 만든 커다란 방패를 힘껏 베었다.

그러자 얇을 나무판을 여러 겹 덧대고 가장자리를 청동으로 두른 튼튼한 방패가 도끼에 맞은 장작조각처럼 힘없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하스드루발은 새로 만든 검에 크게 만족하며 수석대장장이를 칭찬했다.

“훌륭하군!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네! 곧 집사장에게 말해 모든 대장장이들에게 상여금을 지불하라고 말해두겠네. 그리고 오늘은 이만 하던 일을 접고 푹 쉬도록 하게.”

수석 대장장이는 깐깐한 고용주를 드디어 만족시킨 데다 생각지도 못하게 보너스에 반차까지 받게 되자 입이 귀에 걸리도록 활짝 웃으며 부랴부랴 퇴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아직 퇴근할 수 없었다.

“이제 공성병기 제작소에 가봐야지. 거기도 뭔가 성과가 나왔다던데 시간 있을 때 부지런히 움직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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