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 [37화] 켈트족의 역습 (5)
“이랴! 가자 페라리!”
하스드루발은 근육 무늬가 새겨진 그리스식 청동흉갑과 투구를 착용하고 그의 애마 페라리와 인마일체가 되어 적을 향해 전력으로 돌진했다.
이베리아족 중기병들은 대장이 진형의 가장 선두에서 용맹한 모습을 보이자 사기가 올라 맹렬히 적을 향해 달려나갔다.
적 기병들이 전부 주무기를 잃고 퇴각하는 줄만 알고 뒤쫓던 켈트족 보병들은 또 다시 다른 기병들이 해일처럼 몰려오자 당황하고 말았다.
“카르타고 놈들의 기병이 다시 몰려온다! 모두 창을 던져라!!”
켈트족 보병들은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조준도 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투창을 던져댔다.
어지간한 성인남자 키보다 길고 무거운 철제 투척용 창 솔리페럼 수백 개가 이베리아족 중기병들을 향해 날아왔다.
하스드루발은 그 눈먼 투창들 중 하나가 자신의 미간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자 잽싸게 왼손에 들고 있던 방패로 얼굴을 가렸다.
- 콰곽!
코끼리 가죽을 덧대어 만든 나무 방패에 솔리페럼이 박히면서 뾰족한 창끝이 방패 반대쪽으로 뚫고나와 그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췄다.
특별히 튼튼하게 만든 방패가 아니었다면 전사할 수도 있었던 위험한 상황이었다.
창끝이 미간에 조금 닿는 바람에 피 한 방울이 흘러나와 이마를 타고 내려오더니 그의 윗입술에 닿으며 멈췄다.
하스드루발은 당황하지 않고 입술을 핥아 핏방울을 마시고 투창이 박혀 못쓰게 된 방패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을 뒤따르는 부하들에게 우레 같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랜스를 움켜쥐고 충격에 대비해라!”
이베리아족 중기병들은 자신들의 대장을 따라 켈트족 보병들에게 전력으로 부딪혔다.
- 투콰과과과곽!
듣는 이의 등골에 소름이 돋게 만드는 둔탁한 소리가 다시 한 번 타구스 강변에 울려 퍼졌다.
하스드루발의 돌격을 피하지 못한 적병 두 명이 한꺼번에 랜스에 가슴을 꿰뚫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즉사하고 말았다.
하스드루발의 대담한 지휘 덕분에 이베리아족 중기병 2진이 켈트족 연합군 본대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자 켈트족 병사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무기를 강물 속에 버리고 사방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전군에게 적을 추적할 것을 명령했다.
“전투코끼리는 뒤로 물러나고 보병과 기병들은 강을 건너 도망가는 적을 추적하라!”
명령을 마친 후 한니발은 자기도 타고 있던 코끼리에서 내려와 애마 부케팔로스로 갈아타고 북아프리카 출신 기병들을 직접 지휘하며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적을 쫓기 시작했다.
난전이 벌어지면 피아 구분을 잘 못하는 코끼리가 아군을 짓밟을 수도 있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한편 타구스 강 건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두 왕은 켈트족 병사들의 피로 붉게 물든 강물을 침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켈티베리족의 왕 투리바스는 자신의 장수들과 병사들이 카르타고군의 기병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아직 갈기도 자라지 않은 새끼사자인줄 알았더니 하밀카르의 아들들이 이미 다 자란 수사자가 되어있었구나!”
카르파테니족의 왕 바카로크가 패닉에 빠진 투리바스왕에게 말했다.
“그렇게 어미 잃은 강아지마냥 넋 놓고 계실 때가 아니오. 이미 카르타고군이 타구스 강을 건너 이쪽으로 오고 있소! 훗날을 도모하려면 지금은 일단 놈들의 칼끝을 피해야 한니다.”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투리바스 왕이 바가로크 왕에게 대답했다.
“옳은 말씀이오. 저 괴물 같은 놈들이 강을 넘기 전에 어서 이 자리를 피합시다.”
바카에이족의 왕 아이우스는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친위대를 이끌고 직접 아군을 지원하러 간 상태였지만 두 왕 중 누구도 그를 구하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르카 가문이라는 강력한 적과 싸우기 위해 일시적인 동맹을 맺었을 뿐 오랜 세월 서로를 경쟁자로 여겨온 사이였기 때문이다.
두 왕에게는 굳이 미래의 경쟁자를 위험을 무릎 쓰고 구할 의리가 없었기에 그들은 자기 부족의 병사들만을 챙겨 각자 전장에서 퇴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두 왕이 퇴각을 명령하자 켈트족 연합군의 장교들이 말을 타고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외쳤다.
“모두 퇴각하라! 살아남은 자들은 각자 자력으로 누만티아로 집결하라!”
한니발은 아직 켈트어를 완전히 익히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는 있었기 때문에 적군 장교의 외침을 듣고 기민하게 대응했다.
그는 적이 전장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면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덤벼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군에 켈트족 패잔병들을 끈질기게 추적하도록 명령했다.
“항복하는 자는 해치지 말고 도망가는 자는 끝까지 추적하여 섬멸하라! 오늘 놓친 자들이 내일 너희들의 목에 칼을 겨누게 될 것이다!”
총사령관 한니발의 명령을 하급 장교들이 전군에 전달하자 5만 5천명의 병사들은 한 마리의 거대한 야수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는 켈트족 패잔병들을 끈질기게 추격해 그들이 믿는 신의 곁으로 보내버렸다.
* * *
“어서 일어나지 못하겠나?! 지금쯤 아군이 두 배나 많은 적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언제까지 늙은 암소의 젖통처럼 늘어져있을 셈이냐!”
하밀카르는 장남에게 카르타고 노바의 수비를 맡기고 2만 명의 병사들과 함께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을 지원하러 가는 도중 강행군에 지친 신병들을 직접 다그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하급 장교에게 맡길 일이었지만 타구스 강변에서 10만이 넘는 켈트족과 두 아들이 지휘하는 5만 5천명의 군대사이에 언제 전면전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초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 군이 아직 전면전을 벌이지 않았더라도 대치상태가 오래 지속되다보면 켈트족 연합군이 임시본부로 삼은 누만티아에서 아레바키족의 군대가 출격해 갑자기 두 아들들의 뒤를 공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밀카르는 병사들을 독려한 끝에 예정보다 이틀이나 일찍 타구스 강변에 도착했지만 전투는 이미 카르타고군의 승리로 끝난 뒤였다.
하밀카르는 전투가 끝난 전장에서 아군 병사들이 적군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전리품을 챙기느라 분주한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 두 녀석이 내 도움 없이도 해냈다고? 하나는 이제 22살이고 다른 하나는 몇 달 전에 성인식을 치른 녀석인데?”
하밀카르는 발걸음을 재촉해 한니발 부대의 숙영지를 찾아갔지만 두 아들은 마침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하밀카르가 한니발의 지휘관 막사를 지키고 있던 부관에게 물었다.
“내 아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어디에 있나?”
부관은 하밀카르에게 경례를 한 다음 대답했다.
“두 아드님은 이번 전투에서 눈먼 화살을 맞고 전사한 바카에이족의 왕 아이우스의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
부관의 말에 하밀카르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적군의 총사령관 중 한명이 전장에서 화살을 맞고 죽을 정도면 아군이 일방적으로 큰 승리를 거뒀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30년이 넘는 세월을 전장에서 보낸 불패의 백전노장 하밀카르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두 녀석이 정말 큰일을 해냈구나! 당장 아들들을 만나러 가봐야겠다. 어서 나를 그곳까지 안내해라.”
하밀카르는 부관의 안내를 받아 전장에서 도보로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숲속에서 장례를 치르고 있는 하스드루발과 한니발을 보았다.
한니발은 켈트족이 자연을 사랑하고 숭배하는 민족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켈트족의 전통과 문화를 감안해 아이우스왕의 장례식을 숲속에서 켈트족 성직자가 진행하도록 조치했다.
하스드루발은 전생에서부터 자신들의 흔적을 별로 남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간 민족들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켈트족 성직자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례식 도중에 끼어드는 것은 큰 실례였기 때문에 하밀카르는 아들들에게 자신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모든 의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아이우스 왕의 장례식은 한 낮에 시작해서 석양이 하늘을 잘 익은 석류처럼 붉은 빛으로 물들일 때에야 간신히 마무리되었다.
모든 장례절차가 끝나자 한니발이 부관들에게 명령했다.
“시신을 가장 좋은 관에 안치하고 바카에이족에게 보내라. 하밀카르 총독님께서는 앞으로 히스파니아의 모든 부족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나갈 생각이시니 절대 바카에이족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면 안 된다.”
그 때 하밀카르가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네 말대로 다. 전후처리까지 완벽하구나.”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뜻밖에 예정보다 이틀이나 일찍 타구스 강변에 도착한 아버지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한니발이 먼저 하밀카르에게 말했다.
“아버지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셨군요. 지원군에 신병들이 많이 섞여있어서 좀 더 오래 걸리실 줄 알았습니다.”
한니발의 말에 하밀카르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내가 병사들을 좀 다그쳐서 강행군을 했거든. 그런데 너희들이 이렇게까지 잘해낼 줄 알았으면 그럴 필요도 없었겠구나. 나한테 혼나고 눈물을 찔끔거리던 신병들한테 좀 미안하구먼. 그래. 이번 전투의 전과와 아군의 피해는 어느 정도나 되나?”
“이번 전투에서 적 4만 명을 사살하고 약 3만 명을 생포했습니다. 도주한 자는 3만 2천 명 정도 됩니다. 아군의 피해는 리비아 창병 중에서 전사자가 천 명 정도고 기병의 피해는 백 명이 안 됩니다.”
한니발의 말에 하밀카르는 너무 기쁜 나머지 두 아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정말 잘해주었다! 너희들도 이렇게 의젓하니 로마의 세르비우스 성벽이 무너질 날이 얼마 안 남았구나!”
아버지의 말에 한니발이 대답했다.
“이 정도로 큰 전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하스드루발이 지휘한 기병들이 큰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기병돌격을 당한 적병들이 마치 코끼리에 부딪힌 것처럼 멀리 날아가는 것을 보고 저도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 말에 하밀카르가 하스드루발의 등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네가 전에 말하던 그 등자라는 도구가 생각보다 훨씬 쓸모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정말 잘해주었다 하스드루발! 이제 켈트족 놈들은 다시 우리에게 대항할 생각을 못하겠구나!”
그러나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은 하스드루발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렇지만 켈트족과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스드루발의 말에 하밀카르와 한니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의 하스드루발이라면 이처럼 큰 승리를 거둔 뒤에는 광장히 기뻐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니발이 아직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오늘의 승리로 우리는 카르페타니족과 바카에이족의 영역을 손쉽게 차지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리고 켈티베리족도 더 이상 우리에게 덤빌 생각은 하지 못할 텐데?”
한니발의 말에 하스드루발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아레바키족이 남았어. 놈들을 굴복시키지 못한 채로 이번 전쟁을 끝내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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