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 [38화] 굴복하지 않는 아레바키족
기원전 224년 봄 어느 날 로마의 국회의사당 격인 건물 쿠리아 호스틸리아에 로마 원로원 의원 전원이 모였다.
올해는 몇 개의 군단을 편성하고 어느 지역을 중점적으로 원정사업을 펼칠지를 논의해야 했기 때문이다.
300명의 원로원 의원들은 현대의 프랑스가 위치한 갈리아 지역을 우선 정복해야 한다는 부류와 오늘날의 발칸반도 서부에 해당하는 일리리아 지역에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는 부류로 나뉘어 치열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당연히 갈리아를 우선 정복해야하는 것 아니오! 의원님께서는 그 옛날 갈리아인들이 7개월 동안이나 우리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하면서 조상님들 욕보인 역사를 잊으신 것이오?”
“답답하시구려!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좀 보시오! 카르타고를 굴복시킨 지금 로마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동쪽의 마케도니아요! 게다가 늪과 숲으로 그득한 갈리아를 개간해 수익을 내려면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요? 백년? 이백년?”
그 때 한 원로원 의원이 두 패로 나뉜 다른 동료들과는 또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바로 2차 포에니전쟁 당시 로마 최고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스피키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이하 프블리우스)였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여러분들의 의견이 모두 일리가 있지만 저는 우선 히스파니아 해안에 위치한 우리 로마의 동맹 도시 사군툼에 1개 군단을 상주시켜 바르카 가문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는 것이 가장 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명장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스키피오 가문의 수장이 뜻밖의 말을 하자 원로원 의원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를 평소 경쟁자로 여겨왔던 원로원 의원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바르카 가문을 견제하자는 의견에 반박했다.
“존경하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의원님. 바르카 가문이 히스파니아에서 켈트족을 상대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은 저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걱정할만한 일일까요? 카르타고인들은 에브로강 북쪽 지역에 세력을 넓히지 않는다는 우리와의 조약을 잘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카르타고의 100인회의 국내파와 동맹을 맺었고 근래에는 바르카 가문도 매년 우리에게 적지 않은 선물을 보내오고 있지 않습니까?”
티베리우스의 말에 푸블리우스가 대답했다.
“존경하는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의원님. 의원님 말씀도 맞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이집트의 파라오에 맞먹는 부를 손에 넣은 저들이 아직도 히스파니아에 세력을 넓히려드는 것이 영 의심스럽지 않으십니까? 저는 혹시 그들이 지난 전쟁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우리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자 티베리우스가 한 쪽 입꼬리를 있는 힘껏 치켜 올리며 푸블리우스를 비웃었다.
“오! 존경하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의원님! 아마 의원님께서는 이미 우리 로마가 서지중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사실을 그만 잊어버리셨나봅니다! 대체 카르타고인들이 어떻게 우리 허락도 없이 이탈리아 반도에 발을 들일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처럼 팔에 날개를 달고 날아서 지중해를 건너기라도 한다는 말씀인가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이 티베리우스의 말을 듣고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하하하!”
한 원로원 의원이 너무 웃다 흘러나온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당장 아폴로 신전으로 찾아가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드려야겠군요! 카르타고군이 로마를 공격하려고 날아서 세르비우스 성벽을 넘을 때 태양의 열기로 놈들의 날개를 태워 달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다시 한 번 쿠리아 호스틸리아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크하하하하! 이제 농담은 그만둡시다! 너무 웃겨서 진지한 논의를 할 수 없지 않소!”
푸블리우스는 배를 잡고 웃어대는 동료들을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 *
한편 푸블리우스가 동료 의원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은 타구스강에서 벌어진 전투의 수습이 끝나자 마자 아레바키족의 항복을 반드시 받아내야 한다며 하밀카르와 한니발을 열심히 설득했다.
“아버지! 형! 지금 이 기세를 몰아 누만티아를 공략해야 해요! 우리 병사들의 사기가 오른 지금이 아니면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하밀카르는그런 하스드루발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히스파니아는 바르카 가문이 카르타고 노바를 세운 동남부 해안지역을 제외하면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형이 험했다.
특히 아레바키족이 자리 잡은 히스파니아 중북부 지역은 농경지가 없지는 않았지만 울창한 숲과 넓은 늪지, 험한 산지가 뒤섞여있는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서는 카르타고군이 자랑하는 강력한 기병과 전투코끼리를 활용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하밀카르는 굳이 아레바키족의 영역을 정벌할 생각이 없었다.
“굳이 아레바키족의 영역을 정벌할 필요가 있겠느냐? 물론 히스파니아 중북부도 은이나 철이 많이 매장되어 있을지도 모르긴 하지. 하지만 우리는 이미 충분한 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내 생각에는 이제 힘을 기르면서 로마를 공격할 시기만 잘 고르면 될 것 같구나.”
사실 본래의 역사에서는 한니발도 아레바키족에 대한 원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밀카르와 공정한 하스드루발 없이 히스파니아 원정을 진행하느라 바르카 가문의 세력을 넓히는 속도가 지금보다 훨씬 느렸고 아레바키족의 근거지인 누만티아가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니발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레바키족을 굳이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 말씀이 맞다.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대승을 거둔 덕분에 아레바키족도 섣불리 우리를 공격하려 들지는 않을 거야. 우리가 먼저 자기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야.”
한니발의 판단은 일반적인 히스파니아에 사는 켈트족의 성향을 고려하면 대체로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미래의 역사지식을 가지고 있는 하스드루발의 생각은 달랐다.
“아레바키족을 다른 켈트족들과 똑같다고 생각하면 안 돼. 그 자들은 다른 부족들보다 훨씬 용맹하고 자긍심이 강한 자들이야. 가만히 내버려두면 로마를 공격하려고 우리 병사들이 이탈라이 반도에 가있을 히스파니아 속주의 여러 곳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우릴 괴롭힐 거야.”
본래의 역사에서 카르타고와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로마는 히스파니아 전체를 차지하기 위해 그곳에 사는 거의 모든 부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
다른 부족들이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하는 로마의 검 앞에 속절없이 쓰러져갈 때도 아레바키족은 용맹하게 게릴라전을 펼쳐 로마군을 상대로 여러 번 승리를 거뒀다.
결국 강대국 로마를 이겨낼 수는 없었지만 아레바키족은 무려 20년 동안이나 로마군의 침략을 견뎌낸 최후의 켈티베리안이었던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강인하고 자긍심강한 부족이 한 번도 싸워본 적 없는 적에게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설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레바키족을 완전히 정복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우리를 공격할 생각이 다시는 안날정도로 본 때를 보여줄 필요는 있어.’
하스드루발이 단호한 표정으로 주장을 굽히지 않자 하밀카르는 아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하밀카르가 하스드루발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카르타고 노바로 말머리를 돌리면 뒤통수가 따끔거려서 잠을 잘 수가 없을 것 같구나. 그렇지만 일단 기회가 왔을 때 지도자를 잃은 다른 부족들부터 정리해야한다. 그 후에 아레바키족들이 다시는 우리를 건드릴 생각이 들지 않도록 따끔한 맛을 보여주자꾸나.”
* * *
“이런 멍청한 작자들 같으니! 내가 그렇게 모든 병력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건만!”
아레바키 족의 왕 타르반투가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손에 들고 있던 청동술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그 속에 담겨있던 벌꿀주가 회의실 바닥을 적셨다.
타르반투 왕은 타구스강에 진을 치고 있을 동맹부족에게서 소식이 없어 연락병을 보냈더니 다른 부족의 왕들이 건네 준 서신 대신 카르타고군이 인도한 바카에이족의 왕 아이우스의 시신을 가져오는 바람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그는 간신히 노기를 억누르면서 자신의 앞에서 한 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연락병에게 물었다.
“그래! 시체가 되어 돌아온 아이우스 왕 말고 다른 왕들은 어디에 있다더냐!”
연락병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신의 왕에게 대답했다.
“그... 그게... 카르타고군에게 크게 패배하고 말을 타고 도망치다가 그만 적 기병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고 합니다.”
카르페타니족의 왕 바가로크와 켈티베리족의 왕 투리바스는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패잔병을 수습할 틈도 없이 말을 타고 누만티아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뜻밖의 대패로 너무 당황한데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평소의 승마술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하스드루발이 지휘하던 이베리아족 중기병들에게 그만 사로잡혀 버리고 만 것이다.
이베리아족 중기병들은 등자를 장착한 말을 탄 덕분에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승마술을 100% 발휘해 적의 왕을 두 명이나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웠다.
그 말에 타르반투 왕과 그와 함께 회의를 하고 있던 소부족 부족장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타르반투 왕은 분노로 심기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려고 애썼다.
“두 등신들이 사로잡혔다면 카르페타니족과 켈티베리족의 패잔병들은 누만티아로 오지 않고 자기 고향으로 도망치려 하겠군. 아주 가관이구만. 또 뭔가 보고할 사항은 없느냐? 10만이 넘는 대군이 5만 5천명에게 졌으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카르타고군의 지휘관 한니발의 계략에 아군이 속아 넘어가 보병들이 강을 건너는 틈을 타 적이 기병과 코끼리로 공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락병이 말끝을 흐리자 타르반투 왕이 노성을 질렀다.
“왜 말을 하다 마는 것이냐!”
“그....그게 저도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카르페타니족 출신 패잔병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적의 장수 중에서 사악한 마술을 부리거나 아니면 신의 가호를 받은 자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타르반투 왕의 오른편에 앉아있던 부족장이 연락병을 꾸짖었다.
“네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연락병은 겁에 질린 얼굴로 머리를 조아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들은 것을 그대로 전해드렸을 뿐입니다. 갑자기 전장에 나타난 적의 기병 수천기가 아군 보병들에게 돌진했는데 적의 이상하게 생긴 창에 맞은 아군들이 마치 거인의 발에 채인 것처럼 멀리 날아갔다고 합니다.”
켈트족 연합군의 패잔병들 중 상당수는 하스드루발이 지휘한 중기병들의 엄청난 충격력이 우스꽝스럽게 생긴 생소한 발받침인 등자와 충돌시의 충격을 완화해주는 등받이가 달린 U자형 안장 때문이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적 기병들이 초자연적인 힘 때문에 강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말에 부족장들의 얼굴에도 겁을 먹은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대세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긴 했지만 자연을 숭배하는 켈트족은 특히 미신을 잘 믿는 경향이 강했다.
부족장들이 겁을 먹기 시작한 것을 눈치 챈 타르반투 왕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겁낼 것 없다! 카르타고 놈들이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면 놈들의 목을 잘라 우리 켈트족의 신들이 놈들의 신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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