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 [39화] 당근과 채찍
“하밀카르 총독님께 보고드립니다. 한니발 장군의 군대가 열흘 전 카르페타니족의 가장 큰 도시인 톨레툼에 입성했습니다. 방어병력이 부족했던 톨레툼 시민들은 큰 저항 없이 우리 카르타고군에게 성문을 열었습니다.”
하밀카르는 한니발이 띄운 파발꾼의 보고를 받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 아들들이 여전히 잘해주고 있구나!”
타구스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가 카르타고군의 대승으로 끝난 데다 하스드루발이 카르페타니족과 바카에이족의 왕을 생포한 덕에 바르카 가문의 히스파니아 원정사업은 더더욱 일사천리로 진행 되었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사기가 오른 병사들과 함께 지도자를 잃은 카르페타니족과 켈티베리족, 그리고 바카에이족의 영토를 별 어려움 없이 손쉽게 점령해 나갔다.
두 아들이 군공과 경험을 쌓는데 여념이 없을 동안 하밀카르는 카르타고 노바의 바르카 가문의 저택에 카르페타니족의 왕 바가로크와 켈티베리족의 왕 투리바스를 붙잡아두고 그들을 회유하고자 했다.
하밀카르는 보고를 마친 병사를 돌려보내 쉬도록 한 후 저택 집사장을 불렀다.
“바가로크 왕과 투리바스 왕은 지금 뭘 하고 있나? 내가 함께 사냥을 가자고 한지가 벌써 사흘이 지났는데 답변이 없군.”
“두 분께서는 몸이 안 좋으셔서 침실에서 쉬고 싶다고 하십니다.”
집사장의 말에 하밀카르는 땅이 꺼져라 한 숨을 쉬었다.
“또 꾀병을 부리는 것 같은데. 이거 고집들이 정말 대단하시구먼.”
하밀카르는 맹획을 회유한 제갈공명처럼 바가로크 왕과 투리바스 왕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덕분에 두 왕은 카르타고 노바로 압송된 후 감옥에 갇히는 대신 바르카 가문의 저택에서 묵으며 귀빈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긍지 높은 켈트족의 왕들은 쉽게 하밀카르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렇게 대여섯 달이 흐른 후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성공적인 원정을 마치고 겨울이 오기 전에 카르타고 노바에 돌아왔다.
하밀카르는 성대한 개선식을 열어 두 아들을 환영했다.
자주색 옷감을 아낌없이 써서 화려하게 치장한 코끼리 등에 올라탄 한니발이 개선군 행렬 맨 앞에서 카르타고 노바의 성문에 들어서자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색색가지 꽃잎을 뿌려대며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을 환영했다.
“한니발 장군 만세!”
“기병대장 하스드루발 만세!”
애마 페라리를 타고 한니발이 탄 코끼리를 바로 뒤에서 따라가고 있던 하스드루발은 시민들이 개선장군도 아닌 자신의 이름을 외치자 머쓱한 기분이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내 이름이 왜 거기서 나와? 또 아버지가 먼저 카르타고 노바에 돌아오셔서 내 자랑을 잔뜩 하셨나보네. 이 화려한 개선식도 설마 자식자랑 하려고 여신 건 아니겠지?’
그러나 하스드루발의 예상과는 달리 개선식은 하밀카르가 여전히 바르카 가문에 항복하는 것을 거부하며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두 켈트족 왕의 마음을 흔들기 위한 노림수였다.
하밀카르는 바르카 가문의 저택에서 가장 높은 층에 있는 넓은 방 두 개에 바가로크 왕과 투리바스 왕이 묵도록 했는데 그 곳의 발코니에서는 카르타고 노바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마침 바가로크 왕이 묵고 있는 방에서 서로 마주보며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던 두 왕은 카르타고군의 개선 행렬을 보자마자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개선군 행렬 후미에 이번 원정에서 카르타고군이 얻은 전리품을 실은 수레가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가로크 왕은 상심한 나머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카르타고 놈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우리의 영토를 훨씬 더 많이 빼앗았나 봅니다.”
투리바스 왕이 그런 바가로크 왕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오. 전리품이 저 정도면 우리 부족 영토의 절반은 빼앗겼다는 건데...”
개선행렬은 두 왕이 자기 부족의 안위와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계기를 주었다.
바가로크 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 내년 가을이 될 때 쯤에는 바르카 가문이 우리 두 부족을 멸망시켜 버리겠군요. 그럼 저들은 더 이상 우리를 살려둘 이유도 없을 것이고 우리의 죽음이 부족에 도움이 될 일도 없겠지요.”
* * *
한편 하밀카르는 큰 잔치를 열어 반년 동안 고생한 원정군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한 후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한니발, 작은 하스드루발. 지난 반년 간 정말 고생 많았다. 둘 다 정말 잘해줬어.”
하스드루발이 아버지의 칭찬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별 말씀을요. 고맙습니다 아버지. 오늘 같이 화려한 개선식은 언젠가 로마의 세르비우스 성벽을 무너뜨리고 나서나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 말에 하밀카르는 멋쩍은 듯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뭐... 개선식이 좀 과하긴 했지? 사실 아비로서 너희들의 군공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벌써 반 년째 붙잡아두고 있는 카르페타니족과 바카에이족의 왕의 마음을 흔들어보려고 기획한 행사란다. 내가 그렇게 회유하려고 애를 써도 켈트족 고집이라는 게 정말 보통이 아니더구나.”
아버지의 말에 한니발이 대답했다.
“그럼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되겠군요. 당장 두 왕의 목을 치고 장례를 치른 뒤 자신들의 부족으로 돌려보내시지요. 그리고 내년 봄에 다시 놈들의 영토로 원정을 떠나 이번에야말로 카르페타니족과 바카에이족을 역사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하스드루발은 담담한 표정으로 두 부족을 멸망시켜 버리겠다는 한니발의 말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생각해보니 한니발 형은 원래의 역사에서도 로마로 가는 길을 막고 버틴 키살피네 지방의 갈리아인인 타우리니족을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어. 그렇지만 카르페타니족과 바카에이족을 잘 회유하는 게 장기적으로 로마정벌을 준비하는데 더 도움이 될 거야.’
그는 한니발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형. 그렇지만 카르페타니족과 켈티베리족을 멸망시키면 아직 아레바키족 같이 우리에게 적대하는 부족들이 다시 힘을 합쳐서 우리에게 저항할지도 몰라. 자기들도 같은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좀 더 시간을 들여서라도 바가로크 왕과 투리바스 왕을 잘 설득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자 한니발이 하스드루발과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히스파니아의 켈트족들은 자존심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자들이야. 더구나 두 왕과는 얼마 전 까지 전장에서 우리와 검을 맞대던 사이인대 이제 와서 달래는 것이 효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군.”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지난 타구스강 전투에서 목에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질 때까지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던 바카에이족의 왕 아이우스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기 때문이다.
그때 하밀카르가 셋째 아들 하스드루발의 편을 들었다.
“난 하스드루발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니발의 말대로 무력으로 눈앞의 적을 말살하고 주변 부족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는 게 가장 빨리 히스파니아에 세력을 넓힐 수 있는 수단이긴 하지. 그렇지만 한번 잘 생각해 보거라 한니발. 우리가 왜 우리 가문과 조국 카르타고에 해가 될지도 모르는데 굳이 강대국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한니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로마가 수백 년 동안 우리 땅이었던 시칠리아 서부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정전 협정을 맺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아 스스로 약속을 어기고 우리에게서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까지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네 말이 맞다. 우리도 사르데냐와 코르시카까지 로마에게 빼앗기지 않았다면 굳이 가문의 존속을 걸면서 전쟁을 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지. 로마가 두 섬을 우리에게 빼앗음으로서 지중해를 자기네 앞마당의 연못으로 만들려는 야욕을 드러내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로마는 언젠가 조국 카르타고가 있는 북아프리카까지 넘볼게 분명하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한니발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켈트족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들면 결국 저들도 우리가 빈틈을 보일 때 다시 우리에게 이빨을 드러낼 것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러면 어찌해야 저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한니발에 말에 하밀카르가 양손을 모아 깍지를 끼면서 대답했다.
“당근과 채찍을 잘 섞어 써야지. 너희 둘 다 오늘 저녁에 만찬회장으로 오너라. 내가 이번 기회에 외교무대에서 협상하는 법을 보여주마.”
* * *
두 아들과의 대화를 마친 하밀카르는 곧바로 바가로크 왕과 투리바스왕을 저녁 만찬에 초대했다.
바르카 가문이 외국에서 온 사절들을 대접할 때 사용하는 만찬회장에 도착한 두 왕은 미리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바르카 가문의 상징인 번개가 새겨진 청동문을 열자 긴장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만찬회장은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직사각형 식탁이 놓여있고 그 주변을 창을 든 호위병 네 명이 지키고 있었다.
먼저 도착해 식탁에 앉아있던 하밀카르와 한니발, 하스드루발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맞이했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왕은 밝은 표정으로 자신들을 환영하는 하밀카르에게 간단한 목례로만 인사를 대신한 후 자리에 앉았다.
바가로크 왕과 투리바스 왕은 자신들을 사로잡은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자리에 있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하밀카르가 음식을 권했다.
“어서 드시지요. 카르타고의 음식과 켈트족의 음식을 모두 준비했습니다. 부디 두 분의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군요.”
식탁위에는 카르타고의 고급음식인 실피움이라는 허브를 곁들인 플라밍고 혀 구이와 켈트족들이 좋아하는 멧돼지 통구이 등 다양한 음식이 놓여있었다.
그제서야 초대를 받은 두 왕 중 바가로크 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환대에 감사드리오. 그런데 다른 가족 분들이나 가신들은 안보이시는군요.”
자신의 접시에 멧돼지 고기를 덜어가던 하밀카르가 바가로크 왕에게 대답했다.
“오늘은 제 두 아들과 두 분하고만 있는 자리에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하밀카르의 말에 투리바스 왕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실 말씀이 있다는 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게 있다는 뜻 이겠군요. 말씀해 보시지요.”
하밀카르는 단도직입적으로 두 왕에게 원하는 바를 말했다.
“카르페타니족과 켈티베리족이 올카데스족처럼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가로크 왕과 투리바스 왕의 표정이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일그러졌다.
그들은 올카데스족이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대부족들의 연합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어 카르페타니족의 위협에서 해방되자 사실상 바르카 가문의 속주민이 되어 앞으로도 안전을 보장받기로 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가로크 왕이 노기(怒氣)를 억누르지 못해 씩씩거리면서 하밀카르에게 소리쳤다.
“기가 차는군! 만약 그 제안을 거절하면 뒤에서 창을 들고 조각상 마냥 서있는 저 놈들이 내 등에 바람구멍을 내겠다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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