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 [40화] 누만티아 공방전 (1)
“기가 차는군! 만약 그 제안을 거절하면 뒤에서 창을 들고 조각상 마냥 서있는 저 놈들이 내 등에 바람구멍을 내겠다는 것 아닌가?”
바가로크 왕이 말을 놓으며 언성을 높였지만 하밀카르는 여전히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두 분께서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지 않겠다고 말씀하셔도 저는 오늘 만찬이 끝나면 내일 두 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드릴 생각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병사들은 가시는 길에 두 분을 호위할 병사들을 이끌 부관들이라 미리 소개를 드리기 위해 불렀을 뿐입니다.”
그 말에 두 왕의 눈이 식탁 위에 놓여있는 쟁반만큼 커졌다.
바가로크 왕은 다시 존대를 하며 하밀카르에게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정말 내일 우리를 풀어준단 말이오?”
“카르타고의 수호신이신 바알 함몬께 맹세코 두 분은 내일 자유의 몸이 되실 겁니다. 다만 동맹을 맺지 않고 제 집을 나가실 경우 우리는 다시 전장에서 명예롭게 싸우게 되겠지요. 그 때는 제가 직접 이 자리에 함께한 아직 미숙한 두 아들들과 함께 카르타고군을 이끌고 타구스강을 건널 생각입니다.”
하밀카르가 말을 마치자 두 왕은 무거운 신음을 내뱉으며 입을 닫았다.
그들은 불과 한 달 전에 이제 갓 23살이 된 한니발과 18살이 된 하스드루발에게도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병력을 가지고도 대패를 당한 참이었다.
게다가 하밀카르가 그들의 이미 충분히 무서운 장수인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을 아직 미숙하다고 표현한 것이 두 왕의 공포심을 더욱 자극했다.
두 사람은 불패의 백전노장 하밀카르가 두 아들과 함께 자신이 다스리는 부족민의 마을과 도시를 약탈하는 상상을 하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불편한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것은 투리바스 왕이었다.
“우리 부족의 땅은 당신의 조국이 있는 북아프리카나 히스파니아 동남부처럼 비옥하지 않소.”
눈치 빠른 하밀카르는 얼핏 들으면 뜬금없는 소리로 들리는 투리바스 왕의 말에 숨은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투리바스 왕은 자존심 때문에 직접적인 표현을 피했지만 그가 방금 한 말의 진의는 카르타고의 속주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겠지만 세금을 많이 낼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하밀카르도 투리바스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말을 빙 돌려가며 투리바스 왕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올카데스족은 현재 우리 바르카 가문에 매년 농업생산량의 10분의 1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카데스족 왕께서는 둘 째 아드님을 우리 카르타고 노바에 유학을 보내셨습지요. 우리 바르카 가문은 지금도 올카데스 족의 왕자님께 여러분과 같은 환경에서 생활하실 수 있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앞으로는 바르카 가문에 매년 농사로 얻은 수입의 10%를 세금으로 내고 왕족 중 한명을 카르타고 노바에 볼모로 보내라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두 왕은 내심 하밀카르가 내건 조건이 상당히 관대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켈트족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적장의 목을 잘라 대문 앞에 장식하고 피정복민들을 전원 노예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카르타고인들은 속주민이 자신의 땅을 계속 점유하게하고 농사를 지어 세금을 내게 하는 것을 선호했다.
카르타고인들은 리비아 속주 같은 곳에서는 꽤 가혹한 세금을 걷어왔지만 시칠리아 같은 전략적 요충지의 속주민들에게는 매년 농업생산량에서 약 10% 정도의 세금만을 걷어왔다.
이는 고대 지중해세계에서는 대단히 관대한 조치였기 때문에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시칠리아의 지배자가 된 이후에도 한동안 시칠리아의 여러 그리스계 식민도시에는 친 카르타고파 시민들이 제법 많이 남아있었다고 전해진다.
하밀카르의 말에 바가로크 왕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농업생산량에서 10분의 1만 세금으로 내면 되는 거요? 전리품이나 숲에서 얻은 수입은 제외하고?”
하밀카르가 그의 말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또 동맹이 체결된 후 원하신다면 카르타고의 농업기술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고심한 끝에 바가로크 왕도 하밀카르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카르타고 노바에 머무는 동안 당시 지중해 최고의 농업기술을 가진 카르타고인들이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많은 농업소출을 내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또 볼모로 보낸 왕족들에게 귀빈대접을 하면서 카르타고식 교육을 한다는 것은 그들을 친 카르타고파로 만들어 성인이 되면 다시 출신 부족으로 돌려보낸 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바가로크 왕은 고개를 들고 하밀카르와 눈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좋소.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 * *
카르페타니족과 켈티베리족의 왕이 바르카 가문에 항복하자 하밀카르는 두 부족의 포로들을 몸값을 받지 않고 조건 없이 고향에 돌려보냈다.
또 그는 두 왕에게 약속한 대로 카르타고 노바에 온 켈트족 왕자들을 친자식처럼 대하고 적은 세금을 거두어 정복자의 횡포를 두려워하던 피정복민들의 마음을 다독였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전사한 아이우스 왕 대신 추대된 바카에이족의 새 왕도 카르타고 노바에 사절을 보내 바르카 가문에 항복의사를 전해왔다.
그러나 아레바키족은 여전히 바르카 가문과 적대하면서 간간히 새로 히스파니아 속주에 편입되어 아직 방어병력이 충분히 배치되지 않은 마을을 습격하곤 했다.
하밀카르는 더 이상 아레바키족의 침략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해가 지나고 기원전 223년 봄이 찾아오자마자 원정대를 보내기로 했다.
하밀카르는 이번에도 지난 전투에서 큰 성과를 낸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에게 아레바키족 원정을 맡기기로 했다.
“한니발, 하스드루발. 아레바키족의 습격으로 국경지대의 우리 마을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고 한다. 하루빨리 타르반투 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히스파니아의 에브로강 이남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도록 해라.”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아버지의 명령에 대답했다.
“이미 출전 준비를 마쳤습니다. 곧 출발하겠습니다.”
“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올게요 아버지!”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6만 5천명의 대군을 이끌고 아레바키족의 왕 타르반투가 사는 요새도시 누만티아를 향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저번 원정군보다 수가 1만 명이나 늘어난 대군이었지만 기병의 수는 8천기로 오히려 줄었고 전투코끼리는 아예 데리고 가지 않기로 했다.
아레바키족의 영역은 지형이 험해 기병과 전투코끼리를 활용하기 어려운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누미디아 기병들이 즐겨 타는 북아프리카산의 작지만 민첩한 말들은 평야지대에서 자랐기 때문에 산악지형에서는 제대로 달리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원정에서는 카르타고군 최강의 전력 중 하나인 누미디아 기병들은 한기도 데려갈 수 없었다.
아라베키족도 카르타고군이 자랑하는 기병과 전투코끼리의 수가 줄어든 것을 알고 유격대를 보대 행군하는 카르타고 군의 측면이나 후방을 기습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적이 마음대로 게릴라 전술을 펼치게 둘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게릴라전술로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약 7년 동안 로마군을 상대로 숱한 승리를 거둬온 아버지 하밀카르에게 군사학을 교육받은 덕분이었다.
카르타고군이 울창한 숲에 나있는 좁은 길로 들어서게 되자 하스드루발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내가 아레바키족이라도 이런 지형이면 유격대로 후방의 수송대를 덮치겠네. 수송대의 위치를 행렬의 중간으로 옮기고 후방에는 북아프리카 중장보병을 배치해라! 북아프리카 중장보병들은 내가 직접 지휘한다.”
아니나 다를까 카르타고군이 일렬종대로 늘어서서 좁은 숲길로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리 매복하고 있었던 튜닉차림에 외날검 팔카타와 작은 방패를 든 아레바키족 유격대 수천 명이 괴성을 지르며 카르타고군 행군대열의 후미를 덮쳐왔다.
“우와아아아아!”
그러나 북아프리카 중장보병들은 하스드루발의 지시로 미리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고 튼튼한 철제사슬 갑옷과 청동투구, 큰 방패로 무장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레바키족 유격대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냈다.
결국 아레바키족 유격대의 지휘관은 많은 사상자만 낸 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크윽! 카르타고놈들이 우리의 공격을 예측하고 있었다니! 모두 후퇴하라!”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적의 기습을 막아낸 카르타고군은 사기가 올라 환호성을 질렀다.
“아레바키족 놈들이 도망간다! 이번에도 신들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있는 게 분명해!”
그러나 숲을 빠져나가자마자 카르타고군 병사들은 조금 전까지 드높았던 사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불안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한니발이 정찰을 보낸 척후병이 청천벽력 같은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한니발 장군님. 아레바키족 놈들이 인근의 모든 마을에서 식량을 공출해 누만티아로 옮기고 있습니다! 가지고 갈 수 없는 식량은 모두 태워버리고 있다고 합니다!”
척후병의 말에 한니발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레바키족의 왕은 다른 세 부족의 왕보다는 머리가 돌아가는 자인가보군. 기병들은 최대한 빨리 아직 아레바키족이 다녀가지 않은 마을을 찾아다니며 식량을 확보해라!”
* * *
한편 아레바키족의 왕 타르반투는 누만티아의 왕궁에서 끊임없이 척후병을 보내 카르타고 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정찰을 마치고 누만티아로 돌아온 아레바키족 척후병 한명이 타르반투 왕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위대하신 타루반투 전하께 보고 드립니다. 우리 유격대의 기습공격은 적장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유격대가 시간을 끄는 동안 기병대가 효과적으로 카르타고군 근처의 여러 마을에서 식량을 공출한 후 주민들을 흩어버리고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적은 군량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왕좌에 앉아있던 타르반투 왕은 척후병의 보고를 듣고 무릎을 치며 쾌재를 불렀다.
“기습이 실패한 건 안타깝지만 전체적인 전황은 생각대로 돌아가고 있군!”
아레바키족의 왕 타르반투는 일전에 다른 세왕이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에게 패배한 것을 보고 최대한 정면승부를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타르반투 왕은 처음에는 유격대를 활용한 게릴라전술로 카르타고군을 괴롭히려고 했지만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아레바키족의 기습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자 청야전술을 사용하기시작 했다.
청야전술은 방어군이 자발적으로 아군 영토 내에 있는 적군 주변의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버려 적군이 보급에 한계를 느끼고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다.
원래 역사에서 이탈리아 반도에 들어선 한니발도 로마의 방패라고도 불리는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청야전술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해야 했고 한니발과 함께 인류역사상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되는 나폴레옹도 러시아군의 청야전술 때문에 뼈아픈 패배를 맛봐야만 했다.
비행기나 자동차가 발달해 보급이 쉬워진 현대전에서는 효과가 줄어들었지만 현대 이전의 전쟁에서 청야전술은 살을 내주고 적의 뼈를 취하는 효과적인 방어전술이었다.
타르반투 왕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변에 있던 신하들에게 말했다.
“카르타고 놈들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뭐 이제 놈들에게는 당장 우리 땅을 떠나는 것과 타지에서 굶어 죽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긴 하겠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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