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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42화 (42/201)

[ 42 ] [41화] 누만티아 공방전 (2)

“이번 마을도 간발의 차로 아레바키족의 별동대가 미리 다녀간 모양이군.”

한니발은 마른침을 삼키며 피처럼 붉은 불길이 아직 수확하지 않은 밀밭에 순식간에 번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손자병법에는 적에게 빼앗은 군량 1석은 아군이 수송해 온 군량 20석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도로망이 부실한 고대에 보급품 수송은 대단히 많은 시간과 인력, 비용이 소요되는 어려운 임무였다.

한니발은 벌써 5년째 히스파니아의 여러 지역에 원정을 다니면서 원정군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적군이 아닌 배고픔이라는 사실을 몸소 느껴왔다.

물론 카르타고 노바에서 보급품을 보내긴 하겠지만 한니발은 지금 가진 군량이 떨어질 때까지 충분한 보급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카르타고 노바에서 누만티아까지는 거리가 먼데다 지형이 험하고 도로망도 부실하지. 마냥 수송대만 기다릴 수는 없겠군. 어떻게든 군량을 확보할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그는 군량 문제를 타개할 방법을 모색하기 하스드루발을 자신의 막사로 불렀다.

하스드루발이 막사 안에 들어오자 한니발이 입을 열었다.

“어서 와 하스드루발. 내 동생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잠시 막사 밖으로 나가 있도록 해라.”

한니발의 명령이 떨어지자 막사 안에 있던 부관들이 한니발에게 경례한 후 밖으로 나갔다.

총사령관이 군량 부족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전군에 알려져 사기가 떨어지지 않게 하기위한 조치였다.

모든 부관들이 막사 밖으로 나가자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이 앉아있는 자리의 맞은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형. 군량 대책 때문에 부른 거지?”

“맞아. 우리에게 남은 군량은 앞으로 석 달 치 정도야. 아레바키족의 군대가 우리 군의 진로를 별로 방해하지 않고 있으니 앞으로 며칠만 더 행군하면 누만티아에 도착할 수 있겠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누만티아는 겨우 서너 달 공격해서 점령할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

“그렇지.”

한니발은 보기 드물게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리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해. 이대로 카르타고 노바로 회군하든가. 아니면 아레바키족 인근의 다른 작은 부족들을 약탈해서 군량을 확보해 누만티아를 공격하든가. 첫 번째는 방안을 선택하면 우리는 이번 원정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병사와 물자만 낭비하게 되겠지. 그리고...”

한니발이 아직 말을 마치지 않았지만 하스드루발은 굳은 표정으로 형의 말에 끼어들었다.

“두 번째 방안은 말이 안 돼. 우리를 적대하지도 않은 부족들을 약탈하면 히스파니아 전역의 켈트족들이 타도 카르타고를 외치며 뭉칠 계기를 주게 될지도 몰라.”

“그럼 넌 우리가 이대로 누만티아 원정을 포기하고 카르타고 노바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한니발의 말에 하스드루발이 억지로 군대에 끌려온 병사처럼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한테 세 번째 방법이 있긴 해.”

“뭐? 그게 뭔데?”

“급하게 누만티아를 공격하지 말고 아레바키족의 영역을 야금야금 차지해나가면서 병사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는 거야.”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에게 인류역사상 최초로 둔전을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둔전은 병사들이 땅을 경작하게 하여 군량을 자급자족하도록 하는 것이다.

전근대의 전쟁에서 둔전은 보급이 원활하지 않고 전쟁이 장기화 할 조짐이 보일 때 타국의 점령지나 국경지대에 주둔한 군대가 충분한 군량을 확보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의 대답에 약간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분명 훌륭한 발상이야. 그렇지만 그 방법은 우리가 당장 군량을 확보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될 거 같군. 벌써 초여름이 다가오고 있어. 봄밀 파종 시기는 이미 지났어.”

그러자 하스드루발은 품에서 동그란 자주색 뿌리에 초록색 이파리가 난 채소를 꺼내 한니발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내가 심으려는 건 바로 이거야.”

한니발은 동생이 품에서 꺼낸 채소에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

“이건 순무로군. 먹어본 적은 없지만, 카르타고에서 빈민들이 자주 먹는다고 들었어. 이베리아족들이 말에게 먹이는 걸 본적도 있고. 이건 늦봄이나 초여름에도 심을 수 있는 거야?”

“계절에 상관없이 심을 수 있어. 게다가 기르기도 쉽고 씨를 뿌리고 3개월이 되기 전에 수확할 수 있어. 수확량도 엄청나게 많은 편이고 말이야. 혹시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몰라서 카르타고 노바를 떠나기 전에 수송담당 부관에게 순무 씨앗을 많이 챙겨두라고 했어.”

순무는 외견이 무와 많이 닮았지만 무보다는 뿌리가 좀 더 작은 채소로 병참의 귀재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중요하게 여겼던 작물로 유명하다.

제갈량은 전쟁이 조금만 장기화 될 조짐이 보이면 바로 병사들에게 둔전을 시행할 것을 지시하며 성장이 빠르고 생산량도 많은 순무를 심게 했다고 전해진다.

순무는 기원전 3세기에는 아직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채소였지만 순무의 원산지가 지중해 연안의 남부 유럽인 덕분에 하스드루발은 현대의 스페인 남부지역인 카르타고 노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순무를 구할 수 있었다.

동생의 말에 한니발의 얼굴에 오랜만에 화색이 돌았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카르타고 노바에서 보급품이 도착할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겠구나! 그런데 아까부터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운 거야? 기껏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제안하고선 말이야.”

하스드루발은 침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한니발에게 대답했다.

“사실 순무에는 큰 단점이 하나 있거든.”

“그게 뭔데?”

“맛이 없어.”

“뭐? 그게 다야?”

“어. 정말 아무리 배고플 때 먹어도 끔찍하게 맛없어.”

현대의 한국에서 재배되는 순무는 오랜 기간에 걸쳐 품종개량을 해온 덕분에 아삭하고 알싸한 맛이 일품이지만 고대 지중해의 순무는 하스드루발이 그리워하는 전생의 맛을 내지 못했다.

‘처음 이걸 발견했을 때는 혹시 다시 순무 김치 해먹을 수 있을 줄 알고 엄청 좋아했는데. 식감도 별로고 무엇보다 풋내가 너무 심해서 먹기가 힘들어.’

한니발은 전쟁터에서 음식의 맛을 따지는 동생을 꾸짖었다.

그는 전시가 아닌 때에도 소식을 미덕으로 여기고 사치품을 멀리하는 금욕주의자였기 때문에 더욱 동생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스드루발. 미식은 그리스인 중에서도 가장 나약한 자들의 풍습이라는 실레노스의 가르침을 벌써 잊었어? 우리 가문의 자랑인 네 입에서 그런 실망스러운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군.”

형의 말에 하스드루발은 은근히 짜증이 났다.

‘아 그거야 실레노스는 스파르타 출신이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스파르타의 전쟁광들은 전쟁을 안 할 때는 일부러 최대한 맛없게 만든 검은 죽을 먹는다잖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형도 참 너무하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에게 순무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먹어봐. 이베라아족의 빈민들은 보통 쪄먹는다는데 날로 먹어도 별로 상관없어.”

그는 말없이 동생에게 순무를 받아든 후 한입 베어 물었다.

한니발이 순무를 씹을 때마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는 간신히 순무를 삼키자마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베리아족 병사들이 말에게만 주고 자기들은 안 먹은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거 보라고! 내가 그래서 우울했던 거라고! 앞으로 서너 달 후에는 한동안 그거만 먹으면서 지내게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안 그러려면 무조건 카르타고 노바에서 보급품이 제 때 도착하게 해야 해.”

한니발은 심각한 표정으로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수송대를 호위할 별동대를 따로 꾸려야겠군. 하스드루발. 지금 당장 순무를 최대한 덜 맛없게 요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 만에 하나 군량이 떨어져서 이것만 먹게 되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야.”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말을 듣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자기가 맛없어서 도저히 못 먹겠다는 말은 끝까지 안 하는구나. 평소에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더니 형도 사람은 사람이네.’

* * *

한편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둔전에 여념이 없는 동안 에레바키족의 왕 타르반투는 누만티아에서 농성을 대비하는 동시에 언제든 기병을 출동시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만약 카르타고군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기 시작하면 즉시 기병을 출동 시켜 적군의 후미를 공격하기 위한 조치였다.

비록 누만티아에 모였던 카르페타니족 등 다른 부족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왕이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돌아가 버렸지만, 아직도 누만티아에는 3만 명이 넘는 아레바키족 병사들이 집결해 있었다.

타르반투 왕은 직접 군수품 비축상태를 점검하며 자신의 병사들에게 왕이 이번 전쟁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번에 새로 군량을 들여왔던데 현재 몇 달 분의 식량을 비축하고 있지?”

타르반투 왕이 군량 창고를 시찰하면서 그를 수행하고 있는 부관에게 물었다.

“누만티아에 병사를 더 들이지 않는다면 앞으로 2년은 더 버틸 수 있습니다.”

“미리 카르타고군 인근의 작은 부족들을 공격해 식량을 빼앗아온 보람이 있군. 이제 놈들은 다른 부족에게서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됐으니 슬슬 병사들의 배급량을 줄여나가고 있을 거다. 계속 척후병을 보내 놈들의 동태를 살펴라.”

“전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 때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정찰을 나갔다 복귀한 척후병이 군량창고로 들어와 타르반투 왕에게 보고했다.

“위대하신 타르반투 전하께 보고드립니다. 방금 카르타고군의 진영을 정찰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놈들은 지금 어찌하고 있던가? 식량을 비축해 둔 마을을 찾기 위해 허둥지둥하고 있겠지?”

“카르타고군은 누만티아 주변을 빙 둘러가며 목책을 세우고 있습니다.”

타르반투 왕은 예상하지 못한 척후병의 말을 듣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군량이 부족한 카르타고군이 누만티아 주변에 목책을 세우고 있다고? 그건 보급품이 충분한 군대가 적 요새의 물자가 떨어질 때까지 버티려고 들 때나 하는 작업일 텐데?”

“그게... 일부 카르타고군 병사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농사? 카르타고 놈들이 또 희한한 생각을 해냈구나! 군인에게 농사를 짓게 하다니! 그나저나 이 시기에는 밀이나 보리를 심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농사를 짓는다는 거지?”

“카르타고군 진영의 근처를 떠돌던 유민(流民)에게 물어보니 순무를 심어서 기르고 있다고 합니다.”

척후병의 말에 타르반투 왕과 그의 주변에 있던 부관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타르반투 왕은 마치 진상 고객을 대하는 상인처럼 완전히 질려버렸다는 얼굴로 주변의 수하들에게 말했다.

“순무는 노예나 소가 먹는 맛대가리 없는 채소가 아니더냐! 지독한 카르타고 놈들! 이곳 누만티아를 점령하려고 아주 단단히 각오한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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