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 [42화] 누만티아 공방전 (3)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둔전으로 부족한 군량을 해결하기로 마음을 정한 후 누만티아를 함락시키기 위해 발 빠르게 계획을 행동으로 옮겼다.
한니발과 함께 누만티아를 포위하기 위한 요새를 건설하던 하스드루발은 고개를 들어 먼발치에 보이는 누만티아를 올려다보며 감탄과 한탄이 반씩 섞인 탄식을 자아냈다.
‘와... 온라인 게임에 저런 요새가 나오면 공성전은 아예 하지 말라는 거냐는 항의 글 때문에 개발사 홈페이지 다운되겠네. 천혜의 요새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면으로 공격했다가는 진짜 뼈도 못 추리겠구나.’
누만티아는 높은 둑 사이에서 흐르는 두 강이 만나는 지점에 수소의 뿔처럼 우뚝 솟아나 있는 산 정상에 두꺼운 성벽을 둘러서 만든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누만티아가 자리 잡은 산은 아주 높지는 않았지만, 산세가 험하고 성문으로 이어진 산길이 겨우 수레 한 대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아 적은 병력으로도 산길에 통나무나 바위 따위를 굴려대면서 방어하기가 쉬웠다.
한니발은 누만티아를 보자마자 바로 전략을 떠올렸다.
“저렇게 험한 산 위에 성벽을 쌓다니... 공성망치나 공성탑을 사용하기는 어렵겠군. 요새를 만들어 누만티아를 포위하고 아레바키족의 군량이 떨어질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겠어.”
한니발의 말을 들은 하스드루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일류 전략가들은 저런 말도 안 되는 요새를 볼 때마다 비슷한 답을 내는구나.’
원래의 역사에서 누만티아는 기원전 133년에 스피키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완전히 파괴되어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린다.
한니발은 지금 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누만티아의 아레바키족에게 항복을 받아낼 때 사용한 방법과 같은 전략을 제시한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아직 22살밖에 안 된 형이 벌써 천년이 넘는 로마의 긴 역사 속에서 명장으로 이름을 남긴 자와 같은 전략을 생각해낸 것이 기뻤다.
그러나 한니발이 생각해낸 전략은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아레바키족에게 승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은 틀림없었지만 전쟁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전략을 기본으로 삼되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도박을 병행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형. 누만티아 포위 작전을 진행하면서 카르타고 노바에 파발을 띄워 트레뷰셋을 보내 달라고 하자. 전에 봤던 제일 큰 걸로 말이야.”
하스드루발의 말에 한니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부피가 너무 커서 이번 원정에는 안 가져오기로 했었잖아. 물론 그 커다란 투석기라면 누만티아의 성벽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겠지. 하지만 성벽이 한군데 무너지더라도 저 험한 지형 때문에 정공법으로 요새를 함락시키긴 어려울 거야. 아주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우리 병사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트레뷰셋을 가져오면 성벽이 아니라 요새 안에 돌덩이를 발사할 거야.”
그 말을 듣고 한니발이 감탄하며 미소 지었다.
“과연... 그 거대한 투석기가 4달란트(약 128kg)가 넘는 돌덩이를 요새 안으로 쏘아대면 아레바키족의 사기가 상당히 떨어지겠군. 괜찮은 생각이야. 워낙 거대한 물건이니 부품 수송에 애를 먹긴 하겠지만 해볼 만한 가치는 있겠어.”
인류역사상 최대의 트레뷰셋은 서기 13세기 잉글랜드의 유명한 정복 군주 에드워드 1세가 켈트족의 후예인 스코틀랜드왕국의 수도 스털링을 공격하기 위해 제작한 워울프(War-wolf)라고 알려져 있다.
하스드루발은 스코틀랜드인들이 워울프의 거대한 크기에 겁을 먹고 공성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에드워드 1세에게 항복했다는 일화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도 트레뷰셋을 사용해 아레바키족의 사기를 떨어트릴 생각을 해냈다.
‘뭐, 그 얘기처럼 트레뷰셋을 보자마자 바로 백기를 들진 않겠지만 매일 짐볼보다 큰 돌덩이가 지붕을 뚫고 집안에 떨어지면 아레바키족도 투지가 꺾이긴 하겠지.’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의 의견에 따라 카르타고 노바에서 트레뷰셋을 가져오기로 했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카르타고 노바에 서신을 보내서 트레뷰셋을 가져다 달라고 하자. 그리고 내가 병사 2만 5천 명으로 누만티아에서 나오는 아레바키족의 유격대를 차단할 테니까 넌 병사 4만 명을 지휘해서 계속 요새를 건설하고 순무를 재배하도록 해.”
“알았어. 그럼 어서 움직이자.”
* * *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누만티아를 포위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가자 아레바키족의 왕 타르반투는 전황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신 노덴스께서 정녕 우리를 버리시려는 건가... 아직 군량이 충분하다고는 하지만 이대로는 약을 구하지 못해 서서히 죽어가는 병자와 다를 게 없구나!”
타르반투 왕은 카르타고군을 물리칠 방도를 찾기 위해 누만티아에 모여 있던 소부족의 부족장들과 휘하의 장수들, 그리고 전장에서 병사를 지휘할 수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모아 회의를 열었다.
회의실에 비치된 거대한 직사각형 테이블에 모든 참석자가 앉자 타르반투 왕이 입을 열었다.
“모두 모이셨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소. 다들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대충 알고 계실 거요. 카르타고인들이 시시각각 우리의 목을 조여 오고 있소. 이대로는 우리 아레바키족도 다른 부족들처럼 놈들에게 굴복하게 될지도 모르오.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모두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자유롭게 말해주길 바라오.”
그러나 타르반투 왕의 간곡한 말에도 불구하고 회의장에 모인 수십 명 중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때 부족장 중 한 명이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카르타고 놈들의 보급선을 완전히 차단한 상태에서 청야전술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부족장의 말에 타르반투 왕이 조금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누가 모르오? 짐은 여러분께 대책을 말해달라고 부탁했지 일전에 사용한 전략이 실패한 원인을 분석해 달라고 한 적은 없소만?”
타르반투 왕의 장수 중 하나가 주군의 편을 들었다.
“대체 누가 카르타고 놈들이 작물의 씨앗까지 미리 들고 와서는 순무를 심어가며 우리 땅에서 버틸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부족장 중 한명이 조심스러운 목소리 타르반투 왕에게 말했다.
“비록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하나 바르카 가문과 정전협정을 맺는 것도 부족민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바르카 가문이 피정복민인 켈트족과 이베리아족을 관대하게 대한다는 이야기가 히스파니아 전역에 퍼지자 완고한 아레바키족 중에서도 카르타고인과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타르반투 왕이 얼굴이 용광로 속의 쇳물처럼 시뻘게지면서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래서! 지금 카르타고군에게 항복이라도 하자는 것인가! 저들은 아직 이곳 누만티아를 향해 화살 한 개도 쏘지 않았는데 적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머리를 숙이자는 말인가! 그대가 그러고도 우리 대 아레바키족의 부족장이란 말이냐!”
그때 타르반투 왕의 다른 장수 중 한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전하의 말씀대로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습니다! 저에게 병사 1만 명을 맡겨주신다면 카르타고 놈들이 짓고 있는 요새를 부수고 순무밭을 망쳐놓고 오겠습니다!”
그러자 몇몇 부족장이 고함을 지르며 그 말에 반박했다.
“전 병력의 3분 1을 사자의 아가리에 처박겠다고?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군! 자네는 그게 바로 적장 한니발이 가장 바라고 있는 일이란 걸 정녕 모르겠는가?”
“그럼 이대로 껍질 속에 몸을 숨긴 거북이처럼 요새에 틀어박혀 식량이 떨어질 때만 기다리자는 말씀이십니까!”
순식간에 회의장 안이 항복하자는 자들과 카르타고군의 작업을 적극적으로 방해해야 한다는 자들로 나뉘어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타르반투 왕은 그 모습을 보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탄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쓸 만한 대책은 나오지 않고 서로 싸워대기만 하니 정말 답답하구나! 정녕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그 때 타르반투 왕의 딸인 아우니아 공주가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바마마. 저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순간 회의실 안이 조용해지면서 모든 시선이 아우니아 공주에게 쏠렸다.
고대 지중해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군사회의에 여자가 참여하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켈트족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켈트족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현대와 비교해도 별로 차이가 없을 정도로 높았기 때문이다.
켈트족의 여자들은 남자와 똑같이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가 용맹하게 싸웠고 자신이 결혼할 남자를 직접 선택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왕이나 부족장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타르반투 왕이 딸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 우리 용맹한 딸 아우니아. 어서 말해 보거라.”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우니아가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카르타고의 침략자들이 우리 영역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여러 차례 유격대를 보내 적을 기습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해왔습니다.”
“그랬지.”
“하지만 대부분의 유격대가 울창한 숲속에서 적을 기습했던 만큼 카르타고 놈들도 우리 병사들을 끝까지 추적해 섬멸하려 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숲에서는 말을 타기가 어렵고 우리 아레바키족은 놈들보다 숲에서 달리는데 익숙하니까 말입니다.”
타르반투 왕은 아우니아 공주의 말을 듣고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네 말 대로다. 누만티아가 적에게 포위당했고 우리가 청야전술을 사용하는 바람에 주변에 마을도 거의 없을 테니 아마 아직도 숲속에 숨어있는 자가 많겠지.”
아우니아 공주는 타르반투 왕의 말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그겁니다. 누만티아에서 유능한 지휘관을 파견해 우리 아레바키족의 패잔병들을 다시 규합해서 적의 보급로를 끊으면 카르타고 놈들도 꽤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놈들이 순무 농사를 짓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음 보급이 올 때까지 버틸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밝게 웃는 아우니아 공주와는 달리 타르반투 왕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좋은 생각이지만 카르타고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쪽 숲까지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자 아우니아 공주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아바마마. 정예기병 500기만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제가 남쪽 숲에 숨어있는 아군을 끌어 모아 카르타고 놈들의 보급선을 차단하겠습니다. 보급이 늦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끊어지면 제 놈들이 말이나 소가 아닌 이상 순무만 먹으면서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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